▲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핀크스 포도호텔 전경

한여름 뙤약볕을 받은 제주시내는 달궈진 가마솥 같았다. 아스팔트가 녹을 듯 아지랑이가 이글거리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수은주 35℃. 체온과 비슷한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탁 트인 평화로(平和路)를 타고 서귀포 방향으로 20분 쯤 내달리니 오른 편으로 좁은 샛길이 나타났다. 산록(山麓)이라는 도로이름에 걸맞게 나지막한 산기슭이었다. 잠시 오르막에 접어드는 가 싶더니 갑자기 짙은 안개가 드리우고 비바람이 차창을 세차게 두드린다.

중절모 눌러 쓴 초로(初老)의 신사

안개바람을 헤치고 달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濟州道 西歸浦市 安德面 上川里). 이 한라산 자락에 재일동포가 만든 별천지(別天地)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오는 길이다. 제주 특유의 변덕스런 날씨로부터 요란한 환영인사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 최초로 ‘세계 100대 골프장’에 선정된 핀크스골프장(PINX GC), 송글송글 잘 익은 포도송이 같은 포도호텔, 그리고 200여 채의 생태주택(生態住宅)이 비오토피아(BIOTOPIA)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별천지를 만든 것일까? 호기심을 안고 비오토피아 커뮤니티센터로 향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검정색 중절모를 눌러 쓴 초로(初老)의 신사가 반갑게 악수를 청해왔다.

“멀리까지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여독(旅毒)도 풀 겸 사우나부터 하세요. 인터뷰는 천천히 하지요.”

▲ 김홍주 회장

상천리 별천지의 수장 김홍주(金弘周, 65) 회장이었다. 오사카(大阪)에서 방금 도착해 손님들과 식사를 겸하며 미팅을 하던 참이었다.

사우나에 들어서니 비바람이 횅횅 부는 가운데 노천온천이 있었다. 바닥에는 미끈미끈한 우윳빛 가루가 잔뜩 있었다. 아라고나이트라는 성분이 우윳빛 침전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라고나이트는 온천의 나라 일본에서도 서너 곳 밖에 없는 희귀한 온천수로, 칼슘과 마그네슘 각종 미네랄이 함유돼 있어 피부미용과 혈액순환에 효과가 있다. 숙소인 포도호텔 객실 안에도 72℃의 뜨거운 온천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지질학계의 정설을 뒤집다

지금까지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지하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게 기정사실이었다. 물이 고이려면 주변이 화강암 지대여야 하는 데 제주도는 현무암 지대여서 물이 고이지 못한다는 것. 현무암으로 뒤덮인 제주도에서 ‘온천개발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단정돼 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온천 개발? 김 회장은 무슨 배짱이었던 것일까.

“지질학 이론상으론 지구 중심으로 갈수록 점점 뜨거워지고 물이 고인 지대가 있기 마련이에요. 온천 관련 전문 서적을 탐독하고서 기술만 뒷받침된다면 승산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실력 좋다고 소문 난 일본과 러시아의 온천개발 전문가들을 찾아 다녔다. 신칸센(新幹線) 열차의 식당 칸에서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설사 온천을 발견하더라도 저수량이 적거나 수온이 낮으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기 십상이라 했다. 해서 김 회장은 굴착파이프를 보온재로 감싸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실제 시공에 적용했다.

“시추작업은 1000m 깊이까지 파내려간 상태에서도 1mm의 오차가 발생하면 바로 땅이 함몰되고 맙니다. 고도로 정밀한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죠. 온천의 나라인 일본에서도 5번 굴착에 1번 성공할까 말까 하는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니까요.”

상천리(上川里) 부지에 수년에 걸쳐 기반 시설을 갖추고 굴착작업에만도 5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 물길을 찾는 방사능 저주파도 수 없이 쏘았다. 2001년 3월 마침내 아라고나이트 온천수가 솟구쳐 올랐다. 단박의 성공. 그 뒤 근방에서 한 개를 더 시도하여 또 성공하였다. 한 사람의 집념으로 시작된 온천개발은 제주도 지하에 거대한 규모의 화강암 지대가 형성돼 있으며, 150만년전 생성된 태고(太古)의 온천수가 담겨 있음을 증명했다. 또한 제주도 온천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지질학계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기도 했다.

핀크스의 유래(由來)

그의 이름 홍주(弘周)는 널리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조성한 것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과 상통하고 있다. 그는 작명에도 원칙이 있다. 좋은 뜻은 기본이요 기억하기 쉽고 발음하기도 쉬우면서 활자로서의 균형미까지 완벽해야 한다는 것.

골프장 핀크스는 ‘누군가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의 라틴어로 P.I.N.X를 조합해 발음해보면 절로 경쾌함이 느껴진다. 수많은 단어를 써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김 회장은 골프장이 거의 다 지어질 때까지도 이름을 결정짓지 못했다고 한다. 완공을 며칠 앞두고 “핀크스다. 이보다 더 멋진 이름은 없다”고 무릎을 쳤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5년 미국잡지 <골프다이제스트>는 핀크스를 ‘세계 100대 골프장’으로 선정했고, 매스컴들은 “핀크스란 이름이 신선하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포도호텔을 세울 때의 사연도 별나다. 호텔 지붕은 동그랗고 객실천정은 서까래를 대서 만들었다. 객실의 바닥 장판도 한지(韓紙)를 콩기름으로 여러 번 덧칠해 만들었다. 호텔 주변을 빙 둘러 허리춤 높이의 현무암 돌담을 쌓고, 정원은 한라산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향나무, 소나무 반송(盤松), 갈대들로 채웠다. 그래서 포도호텔은 제주의 자연과 한국의 전통 미(美)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해낸 역작으로 불린다.

호텔의 설계는 세계적인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준(伊丹潤, 本名 유동룡-庾東龍)씨가 맡았다. 하지만 벽에 걸린 조그만 장식품 하나까지도 김 회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러다보니 이타미 씨와 디자인이나 장식품의 공간배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심지어 호텔 건축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신은 포도호텔을 설계한 디자이너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저는 그저 건축비를 대는 사람이고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훌륭한 예술품을 만드는 데 선생을 돕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 의견이 반영되더라도 이 작품이 이타미 선생의 것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김 회장의 의견은 자칫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건축설계의 달인(達人) 이타미 씨는 김 회장과 여러 차례 대화를 거듭하면서 그의 디자인 식견을 인정해 갔다. 이런 저런 곡절을 겪은 끝에 2001년 11월 내외관 전체가 제주 전통으로 어우러진 호텔이 탄생했다. 포도호텔은 객실수 26실의 단층호텔이지만 육성급(六星級)호텔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수익성만을 본다면 이런 초미니 호텔은 탄생할 수 없었을 터이다. ‘핀크스’와 마찬가지로 ‘포도’라는 이름 역시 김 회장 작품이다. 주변에서 ‘품격을 높이려면 영어나 프랑스어로 이름을 짓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한사코 포도를 고집했다.

“호텔을 다 짓고 하늘에서 바라보니 객실 지붕은 동그란 포도알갱이요, 객실을 잇는 복도는 포도가지인 거에요. 바로 ‘포도’가 떠오르더군요. 또 기억하기 쉽고 청량한 발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타미준(伊丹潤)은 2003년 7월 포도호텔 설계로 프랑스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章을 수상했다.

하인리히 슐리만

김 회장의 인생 롤 모델인 하인리히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은 고대 도시 트로이(Troy)유적과 미케네문명(Aegean civilization)을 발굴해낸 독일의 고고학자다. 관서학원대학(關西學院大學)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는 내내 슐리만에 푹 빠져 지냈고, 60년대 말 서울의 연세대학교로 유학 왔을 때에도 상담 교수에게 “고고학을 전공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정도다.

그리스와 로마의 탄생, 페르시아 전쟁, 카이샤르내전까지 인류사를 뒤바꾸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슐리만으로부터 비롯됐다. 김 회장은 지금도 로마 그리스 이야기를 생각하면 뜨거운 피가 솟구치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슐리만을 존경한 덕택에 제주도에서 온천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를 몰랐다면 그런 용기도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몸부림이잖아요.”

1944년 오사카(大阪)의 조선인 부락 아카가와(赤川)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꽤나 거칠게 살았다.

“야생원숭이처럼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며 열매 따고 뿌리를 파먹었죠. 허기(虛飢)를 채우려고. 그중 제일 좋아했던 게 호박잎이었습니다. 훗날 한 일본인 친구가 「난 호박잎까지 먹었다」며 고생담을 늘어놓기에 「그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라 말하며 어찌나 웃었던 지...”

대학을 졸업하고 훌쩍 떠난 본국 유학길. 1967년의 서울 거리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다. 해가 떨어지면 시내는 암흑천지로 돌변했다. 유학 와서까지 배 곯는 날들이 많았다. “먹는 장사를 하면 배 고픈 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유학생들과 힘을 모아 무교동(武橋洞)에 밥집을 차렸다.

샤넬 부럽지 않은 김홍주(金弘周) 표 구두

▲ 고향에서 펼치는 꿈을 밝히는 김홍주 회장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일본은 반겨주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일본 경제는 진무경기(神武景氣)의 호황을 지나 도쿄(東京)올림픽을 개최하는 등 가히 최고의 활황을 맞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재일한국인들에게 기업 취업의 문호는 철저히 차단되고 있었다. 간사이지방(關西地方)의 명문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었지만 취업에는 무소용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형제들이 꾸려가는 신발공장이 있는 코베(神戶)로 향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26세 되던 해 자본금 60만 엔으로 신발공장을 차렸다. 그 때 일본에서는 700여개의 신발공장이 난립할 정도로 신발의 수요가 높았다. 이 와중에 20대 중반의 사장 김홍주의 놀라운 사업 수완이 빛을 발한다.

“어느 회사나 신발 품질은 거기서 거기였어요. 품질을 높이는 건 한계가 있었죠. 그렇다고 남들과 비슷한 신발을 만드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경쟁력은 디자인뿐’이라 생각하며 밤낮없이 도안(圖案)작업을 하였습니다. 제가 디자인한 신발은 샤넬이나 크리스챤디오르에 뒤지지 않는 명품이라 자부했습니다.”

판단은 적중했다. 그가 디자인한 신발은 대히트를 쳤다. 세계 일주를 하듯 여러 곳을 다니라는 뜻대로 ‘홍동(弘動) 제화’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만 갔다. 창업 3년 만에 일본 신발업체 랭킹 5위 안에 진입했다.

도시락 프랜차이즈 ‘혼케(本家)가마도야’

하지만 9년째 되던 해 그는 승승장구하던 신발공장을 정리한다. 회사조직이 커지고 유통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수익성은 낮아져 갔고, 신발산업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과감하게 폐업신고를 냈다.

그리고 찾아낸 아이템이 도시락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도시락은 찬 음식이었다. 으레 데워서 먹어야 하는 게 상식으로 통했다. 김홍주 회장은 일본 땅에 따뜻한 도시락을 보급시킨 장본인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슬고슬한 밥에 방금 조리한 생선구이가 담겨진 도시락, 이걸 서비스한다면 틀림없이 히트를 칠 것이다. 거기에 디자인까지 입히면 최고의 도시락이 되리라 확신했죠.”

1980년 코베(神戶)에서 ‘혼케가마도야(本家かまどや)’라는 이름의 도시락가게를 오픈했다. 그 때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브랜드네임을 살펴보면 부뚜막에서 무쇠솥에 밥을 짓던 한국 종가집(本家) 아낙의 풍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시락 회사 창업이란 그 옛날 배 곯던 시절을 완전히 극복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고, ‘벤토천국(弁当天國)’ 일본을 향한 도전장이었다.

현재 혼케가마도야는 일본 최대의 도시락 프랜차이즈로 발전했다. 연간 매상고 1200억엔 대에 일본 전국의 매장 수가 2500여 개에 달한다. 일본내 프랜차이즈 가운데 햄버거전문점 맥도날드와 외식레스토랑 스카이락 다음으로 매장이 많다. 그는 일본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한국의 ‘한솥도시락’에 전수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이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졌으니 ‘김홍주는 도시락 왕’이라 불러도 과장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류(宇宙類)와 산중문답(山中問答)

하지만 김 회장은 일본 땅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사업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허전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고 한다. 매일 채기가 있는 것 마냥. 이 때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가 그를 잡아당긴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제주도라는 거대한 자석이 작은 쇠붙이인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곧 부모의 고향마을 서귀포 인근을 답사하여 목장 터를 찾았다. 틈틈히 사 모은 부지가 무려 264만㎡(약 80만평), “하필이면 왜 목장이었냐”고 묻자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물 맑고 공기 깨끗한 곳에서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읊었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하고 싶지 않나요? 어릴 적 꿈을 현실세계에 그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제주도에서 펼치는 사업들은 지금까지 겪어온 인생역정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처럼 살았습니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양육강식(弱肉强食)의 냉정함이 지배하는 정글과도 같죠. 하지만 제 고향에 와서까지 전사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가 제주도에서 벌인 사업은 수지타산(收支打算)이 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 일색이다. 투자라기보다 자선 사업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제가 바둑을 좋아하는 데 가장 좋아하는 기사가 다케미야마사키(武宮正樹)입니다. 그 이의 바둑은 중앙부를 중심으로 넓게 넓게 두는 ‘우주류(宇宙類)’입니다. 실속도 없고 위험천만해 보이는 스타일이지요.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꿈을 쫓는 도전의지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옵니다.”

韓日의 징검다리, NHK로 생중계(生中繼)된 포도호텔

김홍주의 정체성(正體性)은 무엇인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뿌리를 한국에 두고 있는 사람.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과 일본의 징검다리가 될 숙명을 안고살 수 밖에 없다.
그는 한-일 두 나라가 좀 더 가까워지도록 도울 일은 없을까 고민을 해왔다. 그 결과 매년 핀크스 골프장에서 개최하는 한-일여자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이 탄생한 것이다. 올 12월로 10주년을 맞이하는 핀크스컵 한일전에는 양국의 우정과 교류를 바라는 재일동포 김홍주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제가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한일골프대회를 만들 생각을 안했을 것 같아요. 재일동포니까 두 나라 선수 모두에게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양국 선수들이 한 자리에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다. 골프 치며 어깨동무하고 서로 우정을 키우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2003년 5월 포도호텔에서는 한-일 교류역사상 이정표(里程標)로 남을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바둑의 명인들이 대결하는 제58회 본인방전(本因坊戰)의 결승이 치러졌던 것. 일본에서 개최되는 바둑대회 가운데 가장 유서 깊은 기전(棋戰)인 본인방전은 역사가 에도시대(江戶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개 바둑대회라기보다는 일본을 상징하는 행사인 것이다. 이 때 일본국영방송 NHK는 일본 전역으로 결승대국을 생중계했고,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은 대회 기간 내내 경기소식과 더불어 한 수 한 수의 기록을 담은 기보(棋譜)를 연재했다. 해외에서 최초로 열린 본인방전이 바로 김홍주 회장의 안방에서 열린 것이다.

“그 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조치훈(趙治勳)과 가토마사오(加藤正夫), 다케미야마사키(武宮正樹) 같은 내로라하는 바둑명인들이 포도호텔을 찾았죠. 본인방 사상 최초로 온돌방에 앉아 바둑을 두었습니다. 일본식 다다미가 아니라 한국 고유의 온돌방에서 본인방이 열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결승대국이 열리던 그날 저녁 김 회장은 대취(大醉)했다고 고백했다. 일본에 있으면서 상상도 못했던 일이 고향땅에 세운 자신의 호텔에서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유토피아(UTOPIA)를 색칠한다

생태주거 마을 비오토피아(BIOTOPIA)는 핀크스골프장에서 남쪽으로 1.5km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오는 김홍주 회장은 전사(戰士)의 갑옷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화가로 변신해 붓을 들고 오랫동안 꿈 꿔온 이상향을 채색해 간다.

비오토피아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제주도의 천혜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 게 특징이다. 뒤뜰에는 한라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시냇물이 쉼 없이 흐르고, 앞 마당의 제주 바다와 봉긋 솟은 산방산(山房山)은 눈을 시원하게 한다. 해발 400m에서 불어오는 산 공기는 폐부(肺腑) 깊숙한 곳까지 신선함을 선사한다.

핀크스골프장과 포도호텔, 비오토피아 김 회장이 제주에서 만들어낸 삼두마차(三頭馬車). 이곳의 그림, 조형물, 레스토랑에 흐르는 음악, 심지어 컵 받침이나 잡초 한 포기까지도 본인이 직접 컬렉션하고 디자인한 것들이다. 그의 예술적 안목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고교 때는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렸고, 대학 때는 가부끼(歌舞伎)와 분라쿠(文樂)에 심취했고, 유학시절에는 한국의 전통악기 단소(短簫)에 푹 빠져 살았다. 나이 쉰을 넘겨서 익힌 피아노로 바하(Bach)의 인벤션(invention)을 연주하기도 한다.

배고픔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사업가가 되었지만 예순중반의 초로(初老)의 나이에도 그는 어릴 적 소년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상천리(上川里)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지평선까지 펼쳐진 드넓은 洋잔디밭 위로 동글동글 맺힌 포도농장과 시냇물, 노천온천,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향연(饗宴)을 펼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주인마냥 자연(自然)과 어우러진 예술품들.

‘설령 손해가 난들 어떠랴’ 손익의 개념 없이 고향 제주에서 펼치는 김홍주 회장의 꿈.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꿈은 “70% 나아간 노정(路程)”의 중간지점에 머무르고 있을 따름이다. 팔색조(八色鳥)처럼 다채로운 그가 고향 땅에서 어떤 그림을 완성해 낼 것인가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