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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의 학술세미나 거부당하고 국동대혈을 답사하다일제에 의해 조작된 장수왕의 평양 천도…실제는 고구려 역사에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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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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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거의 스무 해 전 일이다. 2001년 8월 여름에 한국사학회와 연변대학이 공동 주최한 북방영토문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신형식 백산학회 회장을 비롯해 이성무 국사편찬위원장 및 조법종 박사와 국사편찬위원회 직원 등이 동행했다.

연변대학에서 학술세미나를 마치고 집안 및 고구려산성 답사를 할 계획이었다. 나를 비롯해 신형식 회장과 조법종 박사 등의 발표논문이 게재된 논문발표 자료집을 준비해 연변대학을 방문했다. 그러나 연변대학에서는 한ㆍ중간의 영토문제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방침이라고 했다.

따라서 학술세미나의 핵심인 논문 발표도 하지 못하고, 작은 회의실에서 신형식 회장, 이성무 위원장, 조법종 박사, 논문 발표자 등과 연변대부총장과의 짧은 대담으로 세미나를 대신했다. 중국은 이미 1990년대부터 동북공정의 추진을 획책하고 있었다.

더구나 1992년 한중수교로 인해 한국인들의 연변지역 방문이 빈번해지고, 만주지역의 고토에 대한 발언이 종종 문제가 되자 중국 정부는 한중간의 영토관련 문제를 매우 자제시켰다. 결국 중국은 2002년에 동북공정을 공식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일행은 10여 명의 학자군과 일련의 일반 관광객을 합쳐서 20여 명이 됐다. 연길 일대를 간단히 둘러본 후 집안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집안(輯安)일대, 환도산성, 고분벽화무덤, 박물관,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압록강 일대와 백암산성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집안시 일대를 둘러본 첫날 저녁 호텔내의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내일 새벽 국동대혈을 방문하려는 젊은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 ‘국동대혈(國東大穴)’의 명칭은 ‘국내성의 동쪽에 대혈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튿날 아침 7시 30분 경에 국사편찬위원장을 비롯해 원로 교수 등 연세 많은 일행을 남겨 두고 십 여명의 젊은 학자들은 중형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압록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나아갔다.

맑디 맑은 압록강의 물은 예전과 변함 없었고 단지 남동쪽의 북한 산들은 계단식 밭으로 개간해 더욱 헐벗은 모습이었다. 지난 93년 답사했던 장천 묘와 모두루 묘가 좌우로 나타났다. 최근 장천묘의 벽화가 도굴 당해 한국으로 반출됐다는 소문에 모든 관광유적지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실제 환도산성 답사도 입구의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서야만 했다.

압록강의 강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강의 양안에 험준한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십칠리의 거리다.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행이 시작됐다. 20분쯤 오르니 긴 막대기로 막아 놓은 국동대혈의 입구인 관리소가 나타났다. 8시 10분 경이었다. 이곳은 중국의 현급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곳이다. 칠십을 넘은 두 노인이 지키고 있었고 입장권을 구입 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솔길 양 편으로 밭이 이어지고 경사진 언덕에 이십년 가량 자란 잣나무가 우거진 곳이 나타났다. 한번 답사했다는 조법종교수가 앞장 섰지만 좀체로 국동대혈의 자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가까운 산 중턱에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다가가니 작고 협소한 동굴들이 나타났다. 그 중 큰 동굴은 크기가 심상찮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이자 하백(河伯)의 딸로 일컫는 유화(柳花)부인의 초상 그림과 신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국동대혈 중 유화부인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보인다. 동굴의 입구는 동남으로 향하고, 북서쪽은 막혀있다. 높이는 10미터, 폭은 25미터, 깊이가 20미터, 면적이 약 30×20평방미터이며 백여 명 수용이 가능한 곳이다. 압록강까지의 거리는 약 400미터이며 압록강이 바라보인다. 압록강 양측에는 무수한 산들의 용이 기운차게 뻗어내려 기괴한 봉우리를 돌출시켜 위용을 뽐내고 있다.

강 건너편에 보이는 북한지역의 첨예한 필봉들이 이곳을 향해 굴신하는 모습은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말해주고 있다. 호텔에서 가져온 작은 물병은 벌써 바닥이 났고, 7월 무더위에 등산하기란 제법 힘이 들고 땀이 나기 마련이다. 원래 유화부인은 동명왕 14년(B. C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돌아가시므로, 부여왕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그 후 태조왕이 부여로 행차해 태후 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반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은 대무신왕 3년(20년)에 세웠다는 기록과 후대의 여러 왕들인 신대왕,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고국원왕,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이 졸본의 시조 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볼 때 이 곳이 거리상 먼 부여의 태후 묘를 대신하는 유화사당임이 확실하다.

이윽고 약 100미터를 올라가니 바위산 정상에 앞뒤로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다. 일행들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여기에도 나이 든 노인이 앉아 있다. 이렇게 앞뒤로 뚫린 큰 동굴은 생전 처음 본다. 동굴의 입구는 서남 방향이고, 동굴이 동북방향으로 서로 통해 뚫려 있다. 연결된 깊이는 16미터, 폭은 20미터, 높이는 6미터, 동굴의 바닥은 평탄하고 동굴의 천장은 활 모양으로 둥글고 마치 무지개 형상이다. 동굴 안에는 백 수십 인이 들어갈 정도로 넓다.

일반 백성들은 이곳을 ‘하늘로 통한다는 동굴’의 뜻인 통천동(通天洞)이라 불렸다. 고구려 왕은 이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맞이해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수혈(隧穴)’이라 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고, 왕과 대소신하 모두가 이곳에 행차해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 동굴 안에는 왕과 대신들이 가져온 제물을 놓는 단이 자연석으로 구분돼 있고, 동편 상단에 움푹 패인 바위 안에 ‘수신지위(隧神之位)’라고 쓴 위패가 놓여 있다.

적황색의 나무로 보이기도 하고 동판 같기도 하다. 위가 삼각형이며, 원형의 태극무늬가 세로로 푸른색과 노란 색으로 각인 돼 있고 ‘수신지위(隧神之位)’의 글씨체는 예서체가 아닌 광개토대왕비체임이 틀림없다. ‘수신(隧神)’ 두 자는 세로의 큰 글씨로, ‘지위(之位)’ 두 자는 좌우의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위패 앞에는 무늬가 있는 청동 향로가 놓여 있어 피운다 만 향이 꽂혀 있다.

집안현 문물지에 의하면 1983년 5월에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발견했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일행들은 자기 자신이 고구려의 왕이 된 것처럼 모두 흥분해 기념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고구려가 이곳 국내성으로 도읍한 시기는 유리왕 22년(A. D 3년)이며,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있지만 일제식민사관의 조작으로 보인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일제가 조작한 사실임이 임증되고 있다. 그렇다면 집안과 환인에 존재하는 3만기의 적석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미련이다.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고구려의 역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와 부여는 초기에는 선거에 의해 왕이 선출됐으며, 특히 고구려는 왕권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고 했다. 또한 고국천왕(서기 179-196년) 시기에 동ㆍ서ㆍ남ㆍ북ㆍ중이라는 이름의 5부가 성립됐다. 따라서 환인과 집안 지역은 자연히 5부 중에서도 동부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적석총은 고구려 동부 귀족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후기에 조부 이후 대대로를 역임한 동부대인 연개소문 일가의 동부 귀족의 권한이 막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동대혈 바위산 주위를 답사하니, ‘영웅개세(英雄蓋世)’, ‘오도장군(伍道將軍)’, ‘노파두지위(老把頭之位)’, ‘오선신위(五仙神位)’, ‘개소문(蓋蘇文)’ 등의 나무 위패가 바위틈에 끼어 있었음을 볼 때, 이 지역 주민들이 신성스레 여긴 국동대혈이 동부대인 연개소문 집안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김부식의 삼국사조차 조작한 일제식민사관으로 인해 고구려사의 진실은 오리무중임이 틀림없다. 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성이 집안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인지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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