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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팀과 토문강·두만강 원류 탐사를 떠나다백두산, 장백산 엄연히 다른 산…중국, 백두산 야욕 차지 위해 왜곡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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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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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2005년 9월 초에 KBS 역사스페셜 담당 PD로 부터 토문강·두만강 원류탐사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시기는 10월 17일부터 26일까지 9박 10일이었다. 일정을 보니 후반기 2일은 봉성(鳳城)시 일대의 변문 마을과 고려문역 및 본계시의 가장 오래된 조선족 마을인 박가촌 마을, 심양의 청 고궁, 누루하치 무덤의 촬영이었다.

   
 

필자는 일정상 후반기 2일을 뺀 23일까지만 동행하고 24일 귀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0월 17일 김PD 촬영 감독과 함께 아침 비행기로 연길에 도착했다. 같은 비행기에는 KBS 역사스페셜의 발해팀 3명도 타고 있었다. 발해팀과 같이 연길의 개원호텔(開元酒店)에 짐을 풀었다.

연길에서 첫 일정은 전 연변대학 박창욱(朴昌昱, 75세)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다. 김 PD의 계획은 한중국경선의 분쟁지역에 대해서 옛 간도지역인 연변의 동포학자의 견해를 먼저 들어보려는 의도였다. 박 교수는 1989년에 연변대학에서 주최했던 제1회 조선학국제학술회의 때부터 친히 알고 지내던 동포 교수다.

박 교수는 조선족 1세대의 민족사관계 역사학자로 근현대사 연구에 정통해, 간도와 만주의 조선인 역사와 조선족 만주 이주사에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는 △간도역사의 연구 △재만 조선인의 친일행적 △연변에서 본 분당 △중국 조선족사 연구 등이 있다.

연길 시내에 있는 박 교수의 2층 아파트를 찾아가니 친구이신 권립(權立, 1928년 생, 78세, 연변대학 연변역사연구소 소장) 소장과 함께 계셨다. 서민 아파트인지라 실내 온도가 낮아 보였다. 권립 소장은 우리 민족 역사를 연구하시는 ‘민족역사연구원’이라고 하셨다. 김 PD와 나는 두 분과의 대화를 통해 인터뷰가 이뤄졌다.

먼저 권립 소장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대구 출신으로 1944년에 만주(중국)로 왔다고 했다. 항일투쟁기였던 당시 한국인들이 만주로 이주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의 변화, 즉 일제에 농토를 빼앗겨 생존차원의 경우, 항일투쟁의 수단, 친인척의 권유 등의 이유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권 소장은 만주로 이주했던 당시의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자신이 모국인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불편함을 먼저 끄집어냈다. 첫째로 언어 소통의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말의 소통 중에 외래어와 외국어의 사용이 너무 많아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얼은 우리말과 글, 문화인데 우리의 고유어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래어를 남용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KBS는 일상 방송시에 우리 고유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통적인 우리의 고유 언어를 사랑해달라고 당부했다.

권 소장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외래어와 외국어를 남발하는 KBS는 물론 우리나라의 방송 매체의 언어 사용 체제에 대한 시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둘째로 권 소장은 백두산과 국경문제는 국가 간의 중요문제이니 좀 더 신중하게 처리해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청계중일한 관계사료’에 의하면 을유감계 때 이중화와 어윤중이 토문강이 두만강이라 했으며, 비변사에서도 ‘중국의 장백산은 토문강을 경계로 하는데 토문강은 두만강이다’라고 주장했다.

권립 소장의 발언을 듣고 보고, 백두산과 토문강에 대한 두 차례의 을유·정해년의 ‘조·청국경감계’ 담판 때 주장한 일방적인 청의 주장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권 소장은 백두산과 장백산이 동일한 산으로 간주하는 중국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어서 마음이 씁쓸했다. 중국이 같은 산이라 주장하는 장백산과 백두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저들이 백두산을 차지하기 위해 ‘장백산이 백두산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710년에 프랑스 선교사를 초청해 1716년까지 중국 전국을 측량해 1718년에 만든 ‘황여전람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 아니었다. 즉 봉금지역을 무인지대로 표시하고 평안(PING-NGAN)이라는 영문표시를 해 조선령으로 인정했으며, 백두산을 비롯해 압록강·두만강의 모든 지류를 포함해 조선령으로 표시했다. 즉 흑산령 산맥 - 보타산 - 압록강 상류의 두도구 ~ 십이도구의 하천 -동가강(혼강)과 봉황성의 중간에 그려진 선이 봉금지역의 남방한계선이었다.

청(淸)의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에는 ‘조선의 변경이 심양 ~ 길림에 접했다’고 했으며, 통문관지(通文館志)는 봉황성 부근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했다. 이와 같이 중국 측이 주장하는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이라는 ‘동일설’과 백두산과 장백산이 같은 산이라는 주장도 허구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백두산 = 장백산’이론의 허구에 대한 비판은 백두산 답사 기록에 후술하기로 하겠다.

권립 소장의 발언 후 바로 76세인 박창욱 교수와 인터뷰가 이어졌다. 박창욱 교수께 ‘간도와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한 박창욱 교수의 초기 간도의 역사부터 정묘· 병자호란 및 1962년 조·중 변계조약 체결 때까지의 역사와 최근 밝혀진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장황한 두 시간의 답변이 이어졌다. 대강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07년 1월 8일에 ‘간도임시파출소’를 개설하기 위해 50여 명의 일본 군인이 들어왔으며, ‘간도소속의 미속론’을 근거로 ‘간도 한인 보호론’을 제기했다. 본래 간도는 봉금시대에 ‘사이섬’에서 개간함으로써 시작됐으며, 도랑을 파다보니 섬이 됐다. 한족들은 ‘사이섬(간도)’을 가짜 섬이라 주장한다. 1902년 간도시찰사로 부임한 이범윤은 1904년 간도는 한국 땅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용정에 파견하는 ‘간도임시파출소’ 대원들에게 ‘간도는 한국 소속 영토’라는 입장을 견지하라고 당부했다.

일본은 1905년 일본의 주권선을 조선으로 봤기에 조선과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을 시도했으며, 이익선을 연변 즉 만주로 간주함에 따라 일본은 두만강ㆍ압록강에서 러시아와 가상 전쟁을 준비했다. 1907년 일본은 러시아와 비밀조약을 체결해, 만주를 남만주와 북만주로 나누어 북만주의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인정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척살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러시아와 만주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협상하기 위해서 하얼빈을 방문하던 중 죽음을 당했다.

박창욱 교수는 을유·정해년 감계문제와 백두산정계비 설치 과정을 설명하던 중에 ‘해란강이 국경선이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1887년 정해감계 담판 시는 이중하가 두만강으로 국경을 승인했으며, 정묘·병자호란시기에는 포로 중 몇 만 명이 8기병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본계시에는 15대에 걸쳐 족보가 있는 박 씨 가문이 있다고 했다.

박창욱 교수는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답변으로 이외의 지도를 끄집어냈다. 본래 토문강은 휘발하 상류에 있던 토문하를 백두산의 ‘오도백하’로 옮겨 지명을 토문강으로 개칭했지 않았느냐? 질문에 박창욱 교수는 1887년에는 해란강을 토문강으로 추측하기도 했으며, 1962년 조·중 변계조약 체결 시에도 이와 비슷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어 박창욱 교수는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가 2002년 5월 5일 발간한 지도를 제시했다. 일본이 1940년 시기에 만든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지류인 해란강, 포이합통하, 조양하, 알하하, 왕청하 등이 표기된 지도를 설명하면서 토문강(土門江)이 알하하(嘎呀河)라고 주장했다. 이 알하하(嘎呀河)는 왕청 지역의 왕청하를 백초구에서 합수해, 하알(蝦嘎)지역에서 해란하(海蘭河)와 만나 짧은 거리에 한 물로 형성해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박창욱 교수의 토문강이 알하하(嘎呀河)라는 주장에 필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우리 답사팀의 인터뷰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박창욱 교수의 토문강(土門江)이 알하하(嘎呀河)라는 주장은 허구이며, 단순히 지도에 표기했다는 것으로 근거를 삼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2002년 공식화했던 ‘동북공정’의 후유증이 우리 동포의 노학자에까지 미쳤다는 점이 서글펐다.

'토문하' 라는 지명은 중국 지도에 몇 군데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일본 대륙론자들이 밀정을 파견해 1890년대의 여러 지도들, ‘일청한삼국지도(日淸韓三國地圖)’(1894)에는 휘발하 상류에 ‘토문하(土門河)’라고 표시했다. 이 휘발하 상류의 ‘토문하’ 라는 지명이 서양고지도의 같은 지역에도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37년에 그린 당빌 지도와 1771년에 그린 본느지도에는 '휘발하 상류 지점에 ‘Tumen"으로 표기돼 있다. 즉 서양선교사들이 측량한 후, 1718년 제작한 ’황여전람도‘ 동판에 근거해 그린 지도이다.

우리 답사팀은 박창욱 교수와 인터뷰를 끝내고 두만강가의 ‘사이섬’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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