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7.3 금 17:23
재외선거, 의료보험
> 독자기고
[도쿄통신] 6.25 70주년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일본과 끝나지 않은 극일
이강희 도쿄 통신원  |  oktimes@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6.2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오는 6월 25일은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남북간 최초의 정상회담과 “남북 화해의 상징” 이라 평가 되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였기에 금년도 6.25 전쟁 70주년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매우 뜻 깊은 해인지도 모른다.

남북 모두에게 있어 식민지의 고통을 극복하는 극일(克日)은 민족적 과제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남한은 농업을 북한에는 공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였기에 광복 이후 남북의 경제력의 차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출발점의 차이” 였을 것이다.

북한보다 경제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남한은 “피보다 달러가 소중하다”는 지상과제 아래 김종필- 오오히라 메모를 통해 졸속 처리 비판을 받았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며, 미국의 어떠한 동맹국도 꺼려했던 브라운 각서를 배경으로 한 베트남 전투병 파병 그리고 너무나 가혹한 노동시장이었기에 현지인들조차 기피했던 광산노동자와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하였다.

상대적으로 공업기반이 갖추어진 북한은 6.25이후 노동력 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때 북한이 새로운 노동 자원으로서 눈을 돌린 곳은 일본 이다. 혹자는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인권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정책으로 북송사업을 보고 있다. 일례로 당시 북한의 국가계획위원회 박창옥 위원장은 주 북한 소련 대사관 S.P. 라자레흐 참사관에게 숙련노동자와 기술력의 부족을 언급하며 재일조선인 북송운동 추진의 배경을 설명한바 있다. 물론 소련과 중국같은 그 어떠한 공산권 국가도 일본에서 조총련 같은 단체가 없기에 선전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부족한 노동력의 확충은 북한의 전쟁복구 사업의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6.25를 전후하여 서로에게 앙숙인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은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로 경제개발 몇 개년 계획과 같은 경제 정책과 국내 정치 기반 강화를 위한 “정보기관 설치”이다.

북한은 소련 군정시절인 1945년 “보안대”를 조직하고 지휘관으로 김일성이 직접 취임한다. 또한 조선 임시위원회는 46년 2월 보안국을 설치하고 산하로 정보처를 설치(11월)한다. 1948년 9월 건국당시에는 인민위원회 밑으로 내무성이 조직되고 내무성에는 사회안전국, 정치보위국, 대외정보국등이 설치 되었으며 민족 보위성, 정찰국등이 설치된다.

남한에서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이 기존의 미국과의 정보 교환 역할에만 국한 되었던 이후락의 군번으로 부터 이름을 딴 “10097부대”를 폐지하고 이를 흡수하여 한국중앙정보부(KCIA)를 설립한다. 또한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이 기관은 미국의 FBI와 CIA그리고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을 섞은 형태의 초법적인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남북이 이러한 정보기관에 의해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권리를 얼마나 침해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기회로 미룬다.

필자는 남북이 극일 방안으로서 남한은 피보다 소중한 달러(외자유치)를 통한 경제개발을 북한은 굶주린 인민생활보다 소중한 핵개발을 통한 국방증진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남북의 이러한 차이를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냉전 승리와 같은 국제정치의 요소를 빼고는 설명할수 없을 것이다. 다만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남한의 “경제” 와 북한의 “핵”은 모두 극일이라는 양국 국민의 공통적 인식의 산물 일 것이다.

다만 6.25 전쟁으로 부터 70주년을 맞는 지금 남북이 진정한 극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 평양 옥류관의 주방장이 대통령을 모욕하고 한국의 탈북 시민단체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내용의 삐라를 보내는 것이 전후 70주년을 맞이한 남북의 극일 자세가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북 화해의 상징이었던 개성남북공동 연락사무소는 폭파 되었으며 북한은 1200만장의 대남 삐라를 준비하였다는 기사가 이곳 도쿄에도 연일 보도 되고 있다. 그런 와중 지난 22일 일본의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은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었던 6.25당시 일본인의 참전 사실을 탐사 보도 하였다. 이날 보도는 미국이 일본인 남성 60여명을 데려갔으며 이중 18명이 실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2명이 전사하였다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 보도에서는 GHQ(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로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서 항만 업무나 기뢰 제거 업무도 담당 하였다고 한다.

   
▲ 美 극비문서 "한국전쟁 때 일본 민간인 18명 전투에 참가"

이러한 보도에 대하여 일본 방위성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대답할 입장이 아니라고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자세는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최근 전 세계 최고의 화두의 책인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전보좌관의 저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있어 주변국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개입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역사를 엄밀히 재평가 한다면 7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부터의 6.25 기념식에서는 물자지원국뿐만이 아닌 전투부대지원국 깃발에 일장기가 추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평양이 1200만장의 삐라를 서울에 뿌려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몸에 배인 서울 시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서울을 불바다 혹은 피바다로 만든다 해도 더 이상 이를 두려워할 서울시민은 없을 것이다. 전후 70년간 계속된 북한의 폭언이 더 이상 무섭게도 두렵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년 반복되는 워딩에 지루함을 느낄 뿐이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남북이 전후 70년을 맞는 지금, 진정한 극일을 이루기 위해 경제와 핵 이라는 기존의 아이템이 아닌 이를 융합하는 새로운 민족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어떨까.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