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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현장과 두만강가 ‘사이섬’으로 가다홍범도 사령관 주도한 전투지역 방문…폭파된 사이섬 비석에 씁쓸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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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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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협회 회장]

우리는 박창욱 교수와 면담을 한 후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유명한 봉오동 전투지역으로 떠났다. 봉오동 마을 입구에 도착해 농부에게 물어가며 봉오동 계곡으로 올라갔다.

   
▲ 봉오저수지. ⓒ자료사진

거대한 저수지가 나타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저수지 둑에 서서 저수지 건너편을 바라보며 홍범도(洪範圖) 사령관이 85년 전 포위 작전을 펼쳐 일본군에 대승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하고 내려왔다.

   
 

봉오동 전투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켰다. 실재 전투지역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저수지가 방해를 한 셈이다. 며칠 후 답사할 청산리 전투지역에 기대를 걸기로 했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의 인물과 당시 북만주 일대에서 일어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항일독립전쟁의 배경과 항일독립군과 일본군의 대치현황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홍범도의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1858년 8월 27일 평양의 빈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숙모 집에서 자랐다. 1883년부터 약 4년간 평양진위대 신호병으로 근무했으며, 1988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군 총연촌의 제지공장에서 5년간 근무했다. 1894년 철원으로 도망쳐 300명의 의병들과 부대를 조직해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투쟁을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하다가 1904년 북청에서 체포돼 반년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탈출했다.

이후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본수비대를 습격했다. 특히 동북수비대의 토벌대를 중평장 전투에서 패주시켰으며, 일제의 갑산수비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일제는 1909년 호남대토벌작전으로 시작으로 전국적인 의병토벌을 감행하자 1913년 연해주로 부득이 이동했다.

홍범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에는 중국 마적과 백계 러시아군과 전투를 계속했다. 1919년 9월에 북간도로 이동해 ‘대한국민회’와 연합부대를 형성해 1500명의 대부대로 성장했으며,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최초로 대파했다.

홍범도부대는 안무·최진동·김좌진부대와 연합해 청산리전투에서도 대전과를 올리게 돼 홍범도 부대의 명성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홍범도는 대표적인 항일투쟁가로서 활동했다. 그 후 러시아 공산당원(볼세비키)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부터 연금생활을 한 불우한 혁명가였다.

봉오동(鳳梧洞) 전투는 1920년 6월 4일 항일독립군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종성군 광양동의 일본군 헌병순찰 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하자,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가 두만강을 넘어 간도 한인을 학살하고 간도 삼둔자로 철수한 항일독립군을 계속 추격했다. 이에 항일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에 잠복해 일본군을 섬멸한 전투를 말한다.

이것이 삼둔자 전투이며, 이에 일본군(19사단)은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화룡현 봉오동까지 추격해 왔다. 이미 항일독립군 측은 간도의 대한국민회의 요청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安武)의 국민회군은 연합해 홍범도의 지휘 하에 정일제1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를 편성했다. 또한 1920년 5월 28일 경에 최진동이 인솔하는 군무도독부와 합해 대한북로독군부로 형성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부장(府長) 최진동이었고, 부관(副官)은 안무, 북로제1군사령부부장에 홍범도가 맡았다.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전투를 지휘하는 군사령관인 셈이었다. 최진동은 최고 책임자인 독군부장이었다.

1920년 6월 7일 새벽에 일본군 월강추격대대의 전위중대가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서 항일독립군 이화일 분대에 참패했으며 오후 1시경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일본군 주력을 섬멸해 패주시켰는데,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고 참패했다. 항일독립군의 피해는 경미했지만 일본군은 봉오동에 남아있던 민간인 16명을 학살하고 돌아갔다.

이 항일독립군은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 회전’이라 불렀다.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의 참패에 충격을 받고 간도지역의 항일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해 중국 동삼성의 장작림과 3차의 ‘봉천회의’를 열기도 했다.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항일독립군 토벌에 장작림을 압박하자 이에 굴복해 중국군도 항일독립군을 토벌한다고 해 항일독립군 근거지의 대이동의 결과를 초래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에 근거지를 안도현 부근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인 9월 21일에 화룡현 2도구, 어량촌 부근에 도착했다.

한편 일본은 세칭 만주 마적단 300명이 훈춘성을 습격해 일본 경찰관 일가와 한국인 2명 등 10명을 살해하고 시가지를 약탈 후 퇴각한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이 훈춘 사건은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실현하기 위한 공작으로, 점동·만순 등이 지휘하는 마적단으로 하여금 1920년 10월 2일 훈춘을 습격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10월 7일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에 의거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군의 간도출병 승낙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군의 합법적인 간도출병이 거부되자 일본은 중국 내의 항일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 14일 군사작전을 위한 ‘간도출병’을 선언하고, 10월 17일 간도에서 항일독립군 토벌의 군사행동을 감행했는데, 동원한 일본군의 규모는 육군 5개 사단의 2만5000명과 관동군의 일부가 지원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북간도의 항일독립군 부대 전체를 포위하는 작전으로, 3개 지대인 훈춘지대, 백초구지대, 용정·국자가 지대로 나눠 항일독립군 부대를 섬멸하려는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 계획에 따라 출동했으며 이후 일본군과 벌어지는 청산리항일전쟁은 일본군 보병 73·74연대로 구성된 東지대가 3도구와 2도구 일대의 항일 독립군 부대를 포위 섬멸하려고 시도하자 항일독립군이 반격해 일어난 전투였다.

우리 일행은 승용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개산둔지의 선구촌 마을로 향했다.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은 8년 전이나 변함없었다. 강 너머 북한산은 나무 없는 빈둥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윽고 선구촌 부근의 ‘사이섬’ 비석이 세워진 곳에 도착하니 비석은 온데간데없고, 이미 폭파돼 깨어진 바위로 변해 있었다.

이 사이섬 비석은 2000년 연변 향토사학자와 재중 동포지식인이 건립했다. 흰색 화강암 자연석으로 좌측에 ‘間島’라고 한자로 작게 쓰고 ‘사이섬’이라고 크게 새겼으며 뒷면에 사이섬의 개간을 위해 두만강을 왕래하던 애환의 노래인 ‘월강곡’을 새긴 것이다. 당시 2001년 11월 중국당정부가 다이너마이트로 이 비석을 폭파시켰다.

이 사이섬 비석을 건립하고 유지하려는 제중국 동포들의 마음속에는, 이 사이섬은 물론 간도 전체가 과거 우리 영토였다는 역사를 남기기 위한 증거를 삼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사이섬 비석의 폭파는 과거 한·중간 미해결된 한국의 간도영유권 문제 제기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오만한 태도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태도는 2004년 8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로 방한한 중국 외교부 차관인 우다웨이(武大偉)의 미공개 발언으로 분명해졌다. 당시 우다웨이는 한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한국이 간도지역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고구려가 중원의 변방약소민족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 자신들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이 ‘간도영유권의 확보’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사이섬은 두만강의 회령과 종성 사이에 있는 개산둔 부근의 선구촌 지역에 있는 삼각주 형태의 섬을 말한다. 사이섬의 면적은 133만 평방미터로 조선인 처음으로 개간하기 시작한 곳으로 ‘간도’의 발상지인 셈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 ‘사이섬’ 비석을 자주 방문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 비석을 파괴했던 것이다.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등 만주일대 즉 간도영유권의 문제로 인해 한·중 간 예민한 시기였다.

이 사이섬은 간도라는 지명을 탄생시킨 섬이기도 했다. 1869년과 1870년에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대흉년으로 인해 생활이 곤궁해지자 심야에 강을 건너 월강 이주자가 증가했다. 당시 회령부사 홍남주(洪南周)는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금지했던 월강 개간을 허용해 개간을 하려고 하는 자는 월간원서(越墾願書)를 제출토록 했다.

다음해 봄 이웃 군민도 같은 보조를 취해 수만명의 농민이 월강 개간에 착수했고 점점 넓은 땅을 개간하게 됐다. 이에 관청에서는 양전관(量田官)을 파견해 토지대장과 야초(野草 : 지세명기장)를 작성하고, 이를 ‘간도토지대장’이라 했다. ‘간도’ 지명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왔다. 홍남주 부사의 혜안으로 두만강 북쪽의 황무지가 대거 개간되자 이를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고 불렸다.

우리 일행은 깨어진 사이섬 비석의 현장을 뒤로 두고 씁쓸한 마음으로 두만강을 따라 다시 연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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