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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다시 오르다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불러 소유하려는 중국 의도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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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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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백두산을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오전 7시 식사 후 바로 출발했다. 벌써 여섯 번째 백두산행이다. 전날 예약했던 승용차에 이제현 피디, 촬영감독, 동포인 운전수와 안내자, 5명이 타고 출발했다. 백두산으로 가는 도로 중에 안도(安圖) 방향을 택했다. 연길시를 벗어나니 만산의 붉은 단풍들이 자기 자랑이 한창이었다. 이미 추수한 논에는 벼 짚단을 열십자 형태로 쌓아두었으며, 아직도 추수 안한 논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40분이 지나 안도 고개를 지나니 좌우 낙엽수림 가운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다. 곧 안도현의 식수원인 명월호(明月湖)가 보인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니 나무들도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나무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백산 유람 관광휴게소를 지나서 제법 큰 대교(大橋) 마을에 도착하니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났다.

금화(金化) 마을이 지나고 만보진의 홍기(洪旗) 민속촌 마을이 나타났다. 이 민속촌 마을은 모국의 농협협동조합과 자매결연을 했다고 했다. 이곳에서 백두산 지역의 지도를 1000원에 구했다. 이제 백두 산맥의 능선으로 들어왔는지 도로 옆으로 맑은 계곡물이 나타났다. 이 물은 오도백하(五道白河), 세칭 토문강에서 흘려온 물로 보인다. 깊은 산 속의 가을 냇물의 시원한 기운이 매우 상쾌했다. 좌우에는 약 10년생 정도의 전나무와 아름드리 전나무도 보였다.

이윽고 평원에 세우진 영경(永慶) 마을이 나타났다. 지난 1993년 흑룡강대학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후 백두산 유람차 가던 길에 들른 마을이다. 옥수수와 아이스크림도 사먹은 추억들이 생각났다. 홍원 마을을 지나니 바로 송강진(松江鎭)이다. 연길에서 출발한지 세 시간이 지나 도착한 셈이다. 백두산 일대에 이도백하진과 더불어 가장 번성한 도회지다. 우리의 읍 소재지 규모의 도시다. 도로 포장이 되어 있는 송강진의 발전 속도는 예전의 송강진 마을이 아니었다.

이젠 자작나무 군락이 보이기 시작하고 숲 속의 공동묘지도 보인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삼림방화(森林防火)’ 팻말도 보인다. 미끈하게 생긴 장백송(별칭 미인송)의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송강진에서 출발한지 20분만에 이도백하진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안내자의 지인이 운영하는 ‘장백산 여행경제개발구’의 광택빈관(廣澤賓館)에 짐을 풀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이도백화진의 발전은 눈부신 속도다. 배추 야채국이 나오는 한식의 식사를 한 후 12시 40분에 촬영 기구를 들고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이미 백두산의 정상 모습은 눈이 제법 왔는지 하얗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10월부터 눈이 내리기도 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마련이다. 두꺼운 붉은 색 등산복을 입었다. 이윽고 우리 일행은 백두폭포에 도착했다. 폭포수 일대는 모두 얼어붙은 형태인데도 가운데로 폭포수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솟아나는 더운 물 탓이라고 보인다. 철계단인 송원교(松源橋)와 폭포전망대를 지나 시멘트 계단으로 된 동굴형태의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평편한 시내물이 졸졸 내려오고 있었다. 천지의 달문에서 500미터 거리의 시냇물은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쉬지도 않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를 승사하(乘槎河)라 부르며 이를 따라 걸으니 달문(闥門)에 도착했다.

   
 

8월에는 달문까지 이 길 좌우에는 노란 꽃의 이름 모를 자생화들이 반겨주던 곳이었는데, 지금 10월의 풍경은 크고 작은 검은 색의 현무암 바위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현무암이 백두산 천지를 호위하는 병사들로 착각할 정도로 달라 보였다.

천지 달문에 도착하기 전 인터뷰를 하면서 걷기도 했다. 천지 물가에는 이미 천지에 서식하는 열목어 회를 파는 집을 발견했다. 여기까지 상술이 파고 들 줄이야 생각도 못한 광경이었다. 따라서 천지 물도 오염되지 않았을까 염려됐다. 본래 천지에는 물이 너무 깨끗해 물고기가 살지 않은 칼데라 호수였는데 북한에서 시험 삼아 열목어를 천지에 넣어보았더니 살아났다고 했다.

달문 부근의 물은 잔잔한 반면 중앙의 천지 호수 물은 너울너울 파도치고 있었다. 물 아래의 조약돌이 보이는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백두산 정상의 봉우리는 얇은 눈으로 덮여 있고 천지 물은 짙은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백두산 최고봉인 황중봉(黃中峰, 장군봉 2749.6m)의 멋진 자태는 햇볕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다. 머지않아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차일봉들이 햇볕을 막아 천지의 물도 검푸른 빛으로 변할 것이다. 칼데라 호인 천지(天池)는 대택(大澤), 용왕담, 용궁지, 달문지 등 무수한 별칭을 가진 천상의 호수이며 호수물의 3분의 2가 지하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물이다. 나머지 물은 비와 눈이다.

이 천지를 둘러싼 백두산 12개의 봉우리 명칭은 1776년 조엄과 함께 등정한 서명응이 지었다. 당시의 대학자이며 관료인 서명응과 조엄이 함께 백두산을 등정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를 자아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1776년 영조는 홍문관 부제학인 서명응에게 ‘홍문관록’을 주관토록 했지만 두 번이나 서명응은 사양하니 화가 난 영조는 서명응을 갑산으로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영조는 조엄을 서명응의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조엄 역시 영조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그를 삼수로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지인 삼수갑산으로 귀양을 가면서 이 두 사람은 백두산 유람을 계획했으며 서명응이 제안하고 조엄이 이에 호응해 이뤄졌다. 이들은 6월 10일 경에 백두산 산행을 약속하고 삼수와 갑산의 부사인 조한기와 민원이 동행했으며 서명응과 조엄의 손님인 최우흥, 홍이복과 조엄의 손님인 이민수와 민원의 아들 민정항이 동행했는데 그 일행이 100여 명이라고 했다. 이들의 유람은 1766년 6월 10일 시작해 17일까지 8일간의 일정이었으며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니 이미 귀양이 풀렸다고 했다. 이들은 귀양살이하기도 전에 왕이 귀양을 풀었던 것이다.

서명응의 호는 보만재(保晩齋)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영조, 정조시기의 문신으로 북학파의 시조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그의 학문은 아들, 손자에게 전해졌으며, 손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이와 같은 실학자적인 서명응의 학문적 태도가 백두산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기록한 배경이 됐다. 그가 지은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는 그의 문집인 ‘보만재집’에 ‘백두산등행도’와 함께 실려 있었다. 서명응은 백두산 등산 도중에 ‘삼지연’의 세 섬의 명칭도 자신이 지었다고 ‘유백두산기’에서 밝혔다. 서명응이 화원에게 그리게 한 ‘천지지도’와 ‘백두산등행도’는 자신의 문집에 딸린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이종학씨의 서제에서 필자도 ‘백두산등행도’를 처음 보았다.

서명응은 지남침의 12지간(十二支干)의 위치에 따라 백두산의 형세, 천문, 주역 등을 참조해 12봉의 명칭을 지었다. 천지를 대일택(大一澤)이라 명명하고 동남의 세 봉우리를 ‘정황석산’으로 짓고 가장 빼어난 봉우리를 ‘황중봉(黃中峰)이라고 했다. 북쪽(子)에 시작한 12봉의 이름은 현명봉, 오갈봉, 대각봉, 청양봉, 포덕봉, 예악봉, 주명봉, 황종봉, 실침봉, 총장봉, 신창봉, 일성봉(북서쪽, 亥)에 끝난다.

이렇게 보면 백두산은 12봉이 아닌 14봉이 되며 현재 봉우리명과 비교해보면 황중봉은 장군봉, 장황석산은 삼기봉, 현명봉은 천문봉, 오갈봉은 자하봉, 대각봉은 자암봉, 청양봉은 쌍무지개봉, 포덕봉은 망천후, 예악봉은 해발봉, 주명봉은 제비봉, 황종봉은 와호봉, 실침봉은 낙원봉, 총장봉은 청석봉, 신창봉은 백운봉, 일성봉은 녹명봉에 해당한다.

그러나 백두산 주변 봉우리 명칭에 대한 중국 기록은 1908년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志略)’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중국이 지칭하는 장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다. 백두산과 장백산은 엄연히 다른 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르기를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그들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장백산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두산 주변 봉우리 명칭은 이제부터라도 당연히 서명응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으로 통일해야 할 것이다.

천지(天池)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달문(闥門)에는 3중 8각 형식으로 99칸의 방이 딸린 팔각형의 종덕사(宗德寺)가 세웠졌다. 1906년 대종교에 의해서 1928년 최시현의 건립설이 있다. 조선 중기 신경준(1712-1782)의 고지도에 종덕사가 표기된 것으로 볼 때 이미 오래 전에 세웠다는 설도 있다. 종덕사의 건립 배경으로 “일제침략으로 민족의 생존이 우려되자 백두산 천지에 종덕사를 건립해 천출위인(天出偉人)이 출현해줄 것을 기도드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 천지에 하늘의 옥황상제의 정기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에 오래 전부터 신당을 만들어 놓고 심신을 수도(修道)하면서 더불어 나라의 융성함을 기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따라서 백두산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일 뿐만 아니라 민족 신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천지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에 의거 북한(54.5%)과 중국(45.5%)에게 양분됐지만 실제로 전체 백두산지역의 3분지 2는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이 조약은 40여년이 지나도록 공개하지 않았던 밀약이다. 이 때 이들이 맺은 국경선은 간도영유권 분쟁의 기원이 되는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무시하고 압록강-천지-홍토수-두만강으로 이어진다. 이 조약에 대해 중국의 6.25 참전대가설, 중국의 양보설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비밀조약으로 한 것은 밀약이 국내외에 알려진다면 한국의 거센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6.25 동란에 개입해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 천지 영유권마저 북한에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천지의 분할에 타협해 체결된 것이 1962년 ‘조중변계조약’이다. 우리 일행은 천지에서 한 시간 정도 머물면서 백두산 최고봉인 ‘황중봉(黃中峰) 일대 및 천지 전경의 사진을 찍고 승사하(乘槎河)를 따라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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