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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천1호분과 국동대혈을 답사하다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한민족의 예술적 우월함 느껴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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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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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오늘 답사일정은 장천1호 고분과 국도대혈 및 환도산성 일대이다. 버스를 타고 장천1호 고분으로 향하였다. 사과 과수원 밭으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사과가 덜 익은 채로 달려있었다. 장천1호분은 1993년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개최 때에 답사한 적이 있었다. 비탈진 능선인 과수원을 지나 고분 앞에 도달하니 이미 육중한 철문은 열려있었다. 장천1호분은 고구려시기 5세기에 조성되었으며, 봉토 주위 길이는 143미터이고 높이는 6미터이다. 1970년대에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전·후실로 구성돼 있으며, 주인공의 석관은 후실에 위치하였다. 4면에는 채색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이 됐지만 우리 한민족의 살아있는 역사이며 자랑이다. 더구나 고대사의 문헌들이 불태워지고 산실(散失)된 오늘날 고구려의 구분벽화에 담겨진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묘사 수준은 세계 최고이다. 중국에도 그들의 벽화를 모아둔 ‘고분박물관’이 있지만, 그들의 벽화 수준은 고구려 벽화 수준을 따라올 수 없다. 중국 고분 벽화들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화공들을 데리고 가서 그린 벽화라고 하였다. 1991년 처음으로 집안에 와서 국고구려 고분벽화를 보았던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당시 고구려의 벽화를 보는 순간 우리의 회화와 벽화의 예술이 중국보다 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젖은 우리나라의 미술가와 고고학자들은 우리의 모든 회화와 벽화는 중국의 영향과 모방으로 발전하였다고 기술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식민사학자들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실제로 보지도 않고 우리의 예술을 폄하시키고 있었다. 그 외에 우리의 고대사마저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의해 조작돼 왜곡당한지 70여년이 넘어서도 이를 바로 잡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장천1호분의 입구에는 전통적인 고구려 의상인 점무늬 옷을 입고 모자를 쓴 고구려인 두 사람이 두 손을 모은 채 좌우에 서 있었다. 고분 내부의 벽화는 연꽃장식과 고구려인의 생활상, 수렵도, 비천과 보살상, 사신도, 불상예배도 등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연화화생’의 벽화도 천장 고임 모서리에 있었다. 전실 동쪽 벽의 천정의 중앙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불을 올리는 주인공 부부도 보인다. 좌우 벽의 천정에는 네 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다. 그 주위에는 연화문과 비천들로 장식되어 주인공 부부가 동경하는 평화로운 불국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유일한 예불도이다.

전실 북쪽 벽에는 여러 가지 고구려의 풍속화를 그렸다. 큰 나무 밑동 동굴에는 곰 형상의 동물도 보이며, 왼편 위에는 거문고를 타며 춤을 추는 장면이 두 곳에서 나타나며, 두 사내가 씨름하는 장면도 있다. 활 맞은 멧돼지, 쫒는 사냥개, 호랑이, 사슴에 활을 쏘는 사냥하는 모습이 아래 부분을 대부분 장식하였다. 매로 사냥하는 모습도 있으며, 공 던지기 곡예 장면도 보인다.

전실인 널방의 천정에는 해와 달 및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다. 고구려 벽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 그림은 ‘북두칠성’의 그림이다. 아마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민족인가 보다. 매우 오래된 고인돌에서도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바위 홈들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북두칠성을 숭모하는 민간 신앙의 발생은 매우 오래된 전통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은 장천1호분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압록강 변을 따라 국동대혈로 향했다. 압록강의 강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강의 양안에 험준한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까지 십칠 리의 거리다. 버스를 정류장에 세워두고 1km 가량 등산을 하였다. 국동대혈은 2001년에 답사한 바가 있었는데, 7년 만의 이번 답사에서 중국 측이 종전의 역사적 사실을 조작·왜곡시켰음을 발견하였다. 2002년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공식화한 후에 벌어진 일임을 알 수 있었다.

20분쯤 오르니 국동대혈의 입구인 관리소가 나타났다. 입장권을 구입 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솔길 양 편으로 밭이 이어지고 경사진 언덕에 이십년 가량 자란 잣나무가 우거진 곳이 나타났다. 가까운 산 중턱에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다가가니 작고 협소한 동굴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 큰 동굴은 크기가 심상찮다.

제법 큰 동굴이 세 개가 있었는데, 첫째 동굴은 중국 도교 형식의 도인의 모습도 아닌 이상한 인물이 세워져 있었다. 두 번째 동굴은 불교의 관음상 모습의 여인 모습이다. 셋째 동굴 역시 이상한 모습의 신선이 자리 잡았는지 흥미가 없어져서 입구에서 보고 국동대혈로 향했다. 7년 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지난 1차 답사 때에는 이 작은 동굴 안의 모습은 자연 그대로 어색하지 않은 광경이었는데, 이제는 고구려적 분위기를 모두 조작해 변질시켜 놓았다.

당시 첫 동굴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이자 하백(河伯)의 딸로 일컫는 유화(柳花)부인의 초상 그림과 신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국동대혈 중 유화부인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보였다. 동굴의 입구는 동남으로 향하고, 북서쪽은 막혀있다. 높이는 10미터, 폭은 25미터, 깊이가 20미터, 면적이 약 30×20평방미터이며 백여명을 수용 가능한 곳이다. 둘째, 셋째 동굴에도 불교의 미륵불 비슷한 민간신앙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래 유화부인은 동명왕 14년(B. C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돌아가시므로, 부여왕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그 후 태조왕이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 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반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은 대무신왕 3년(20년)에 세웠다는 기록과 후대의 여러 왕들인 신대왕,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고국원왕,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이 졸본의 시조 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볼 때 이곳이 거리상 먼 부여의 태후 묘를 대신하는 유화사당임이 확실하다.

이윽고 약 100미터를 올라가니 바위산 정상에 앞뒤로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다. 일행들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을 보니 압록강물이 보이고 강 건너편에 보이는 북한지역의 첨예한 필봉들이 이곳을 향해 굴신하는 모습은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바위산으로 앞뒤로 뚫려있는 것도 흔치 않다. 동굴의 입구는 서남 방향이고, 동굴이 동북방향으로 서로 통해 뚫려 있다. 연결된 깊이는 16미터, 폭은 20미터, 높이는 6미터, 동굴의 바닥은 평탄하고 동굴의 천장은 활 모양으로 둥글고 마치 무지개 형상이다. 동굴 안에는 백 수십 인이 들어갈 정도로 넓다.

일반 백성들은 이곳을 ‘하늘로 통한다는 동굴’의 뜻인 ‘통천동(通天洞)이라 불렸다. 고구려왕은 이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수혈(隧穴)‘이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고, 왕과 대소신하 모두가 이곳에 행차하여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 동굴 안에는 왕과 대신들이 가져온 제물을 놓는 단이 자연석으로 구분되어 있고, 동편 상단에 움푹 패인 바위 안에 ’수신지위(隧神之位)‘라고 쓴 위패가 놓여 있다.

적황색의 나무로 보이기도 하고 동판 같기도 하다. 위가 삼각형이며, 원형의 태극무늬가 세로로 푸른색과 노란 색으로 각인 되어 있고 ’수신지위(隧神之位)‘의 글씨체는 예서체가 아닌 광개토대왕비체임이 틀림없다. ’수신(隧神)‘ 두 자는 세로의 큰 글씨로, ’지위(之位)’ 두 자는 좌우의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위패 앞에는 무늬가 있는 청동 향로가 놓여 있어 피우다 만 향이 꽂혀 있다.

‘집안현 문물지’에 의하면 1983년 5월에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발견하였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고구려가 이곳 국내성으로 도읍한 시기는 유리왕 22년(A. D 3년)이며,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김부식의 삼국사 기록은 있지만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조작으로 보인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일제가 조작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다. 그렇다면 집안과 환인에 존재하는 3만기의 적석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미련이다.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고구려의 역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와 부여는 초기에는 선거에 의해 왕이 선출되었으며, 특히 고구려는 왕권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 고국천왕(서기 179-196) 시기에 동·서·남·북·중이라는 이름의 5부가 성립되었다. 이곳도 5부 중의 하나로 행세하였을 것이다. 통구와 환인의 수몰된 수만의 적석총이 이를 말해 준다. 실재로 지난 1차 답사 때 국동대혈 바위산 주위를 답사했더니, ‘영웅개세(英雄蓋世)’ ‘오도장군(伍道將軍)’ ‘노파두지위(老把頭之位)’ ‘오선신위(五仙神位)‘ ’개소문(蓋蘇文)‘ 등의 나무 위패가 바위틈에 끼어 있었음을 볼 때, 이 지역 주민들이 신성스레 여긴 국동대혈이 연개소문 집안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김부식의 삼국사조차 조작한 일제식민사관으로 인해 고구려사의 진실은 오리무중임이 틀림없다. 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성이 집안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인지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해마다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이, 해마다 동맹이라는 국가의 축제행사를 겸한 연무대회에서 뽑힌 신진 기예들을 대동하여 여기 신성스러운 국동대혈에 올라 국가의 부강과 안전을 기원하며 천제를 지냈다는 기록의 진부(眞否)를 떠나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민족은 산을 숭배하는 숭산민족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런 곳에 올라 심신을 닦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국동대혈을 나와 동쪽 능선을 타고 조금 가니 큰 바위 두 개가 맞물려 있다. 마치 두 바위가 남녀가 입맞춤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지난 1차 답사 때에 없었던 광경이 보인다. 이 바위들을 장상애(長相愛)라고 적어놓았다. 신성스런 국동대혈을 이와 같이 중국 측은 세속화시키듯 고구려적 문화 요소들을 없애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천 수백 년, 유적지는 변함없는데 주인은 간 곳 없다. 못난 후손만이 찾아와 옛 영광을 그리워하고 가슴아파하곤 한다. 모두들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하였다. 차창밖엔 푸른 압록강물이 나그네의 비통함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 답사 때 읊조렸던 한시를 적어본다.

鴨水粼粼歸去洋
峰巒巍巍停雲藏
英雄蓋世何離處
大穴仙洞獨執疆
肅氣神堂千載息
竇巖卓立萬年崇
本邦卒斬幾流邁
\孰四溟平一統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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