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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마시는 말레이시아백작권병하(權炳河) 헤니권코퍼레이션 회장
김명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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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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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韓商)중에는 빈털터리로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드라마 같은 성공스토리를 일궈낸 인물들이 많다. 권병하(59, 權炳河) 헤니권코퍼레이션 회장 역시 26년 전 혈혈단신 그야말로 알몸뚱이로 말레이시아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버스덕트’라는 전기부품으로 연 매출 1억6000만 달러를 올리는 거상이 됐다. 2006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말레이시아에서의 사회공헌을 인정받아 그 나라 국왕으로부터 백작(Dato) 작위를 부여받았다.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말레이시아백작 권 회장의 인생스토리를 들었다. [편집위원=金明信]


장사에 눈 뜬 시골샌님

경상도 외진 시골에서 갓 상경한 고대생(高大生). 대중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리고, 대학생이라면 한 번씩은 다 쳐 본 당구는 커녕 한 곡조 뽑는 재주도 없었다. 말이 좋아 순박한 시골청년이지 그야말로 샌님이었다. 오직 한가지 장기라면 막걸리 마시기. 어려서부터 부모님 따라 김매고 논질하며 익힌 장기(?)였다.

“남들 한 잔 마실 때 석 잔 마셨고 자리는 끝까지 지켰어요. 촌놈의 오기랄까요. 그러면서 리더십을 키웠던 것이죠. 허허”

청년 권병하는 평범했다. 1973년 시작한 첫 사회생활. 여느 동창들처럼 졸업반 때 취업을 하여 첫 월급은 시골에 계신 어머니 내복 사드리고 부양금으로 부쳐드렸다. 그런데 첫 직장으로 무역회사 국제상사에 들어가면서부터 평범하던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의 업무는 목공기계나 발동기 같은 일본 기계류를 수입해서 국내에 팔거나 동남아 등지로 수출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에서 기계류 같은 현물이 무더기로 들어오던 시기. 하룻밤 자고나면 공장이 새로 생겨났을 정도였으니 수요는 넘쳐났다.

“수입품이라면 무조건 팔리는 시대였죠.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보수할 부품이 없어 고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원자재 부품이 절대부족이었어요. 그래서 남대문이나 청계천 판매상들이 기계부품을 수입한다고 하면 수입가의 30%를 선불금으로 대 줬습니다.”

1970년대는 맘만 먹으면 돈 한 푼 없이도 장사할 수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국제상사에서 기획부와 무역부, 기계부를 거치며 소위 ‘돈 버는 방법’을 섭렵했다. 기계류를 보는 안목에다 프로젝트 기획력, 외환거래 방법까지 아는 그에게는 두려운 게 없었다. 6년간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오퍼상을 차렸다. 예상대로 사업은 탄탄대로... 돈이 잘 벌리니까 어느 순간부터 시골청년의 공명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시 중구반공연맹지부장에서 중구 청년회의소(JC) 간부, 모 정당 대의원 등 얼굴 서는 자리라면 거리낌이 없었다. 1981년 총선 때는 서울 성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의원 뱃지까지 노렸다.

“그러다보니 재산은 탕진했죠. 국회의원에는 떨어졌죠,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보증 섰던 사람까지 부도 나 돈까지 물어주게 생겼어요. 이만하면 수업료는 톡톡히 치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600달러 들고 떠난 말레이시아

그 때 나이 32세.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 있는 돈 없는 돈 싹싹 긁어모으니 200만원과 여비 1600달러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 앞에 200만원 내려놓고 “이 돈이 전부다. 3년만 기다려라”고 폭탄선언을 하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무작정 비행기 값이 가장 싼 홍콩으로 갔다. 호기는 있었다. 정주영 현대 회장도 쉽게 못 들어간다던 호주행 비행기를 갈아탔다. 역시나 기다리는 건 입국불허, 홍콩으로 강제 송환되고 말았다. 공항 한켠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자니 말레이시아가 손짓을 한다. 상사시절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말레이시아는 영어가 통하고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돼 있는 곳이란 인상을 받았던 곳. 권병하의 말레이시아 인생은 절벽 위에 선 채로 그렇게 시작됐다.

   
사글세 방 한 칸 얻고 그 이튿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쿠알라룸프루지점을 찾아갔다. 현지 회사 카탈로그라도 구해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코트라 주재원들과 밥 먹으며 말레이시아에서 팔리는 제품이 무엇이냐 캐묻고, 수시로 쿠알라룸푸르 시내 기계시장을 돌아다니며 시장 조사를 했다. 그러던 중 권병하의 눈을 사로잡는 물건이 나왔다.

용접용 노즐. 당시 말레이시아는 용접기를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했다. 자전거수리점이나 철공소 등 동네 구석구석에서 쓰는 걸 지켜보니, 노즐은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국에 용접용 노즐 생산회사를 수소문해 샘플을 구해다 현지 판매상에게 보여주며 협상을 했다. 첫 오더 1만3600달러, 커미션으로 10%인 1360달러를 받았다.

“그 때 국내 업체가 ‘사상 첫 수출’이라며 감격한 나머지 비행기 특송으로 노즐을 보내온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제 한달 생활비가 50불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입니까. 첫 아이템치곤 대박이었죠.”

그가 가진 밑천이라곤 한국에서의 무역경험과 배짱뿐이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수완 좋고 신뢰 가는 어엿한 외국인 사업가지만, 속은 텅 빈 빈대떡 신사였다. 대학 다닐 때 막걸리 마시며 상사에서 갈고 닦은 배짱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 덕에 중고자동차 판매상을 찾아가 3000달러 짜리 차를 500달러만 내고 나머지는 자기 얼굴을 담보로 2년 할부로 사는 가 하면, 국내 대기업 지사를 찾아가 테이블 하나 빌려 비서까지 둔 어엿한 사무실도 차렸다.

축구장에서 꽂힌 하이네켄(Heineken)

권병하는 본격적인 회사 창업에 돌입했다. 한창 준비하던 어느 날 메르데카컵에 출전한 한국축구팀을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았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기념해 열리는 메르데카컵은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던 국제축구대회였다. 그 때 유독 그의 눈을 사로잡는 광고판이 있었는 데 네덜란드 맥주브랜드 하이네켄(Heineken).

사연은 이랬다. 외국인이 말레이시아에서 창업할 때는 2명의 현지인이 주주로 포함돼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어렵사리 당국으로부터 소개받은 헨리(Henry)라우라는 중국인과 닉(Nick)모하마시라는 말레이시아인,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기(Kwon)까지 3명의 이름을 조합하면 글로벌 브랜드로 손색없는 발음에 자신의 정체성까지 나타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각자의 이름을 조합해 회사명을 ‘헤니권(Henikwon)코퍼레이션’이라고 지었다. 회사명에는 헤니권을 훗날 하이네켄처럼 유명한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권병하의 다짐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장기를 십분 살린 한상(韓商)이다.
“상술(商術)로 치면 중국인이 낫고, 영어로 치면 현지인들이 훨씬 낫잖아요. 제가 그들하고 경쟁해 이길 건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어요. 그 사람들보다 뛰어난 건 무역경험뿐이더라고요. 그 나라에 없는 물건이 무엇인 지 찾아내고 남보다 먼저 가져다 파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관심사는 용접용 노즐처럼 한국에서 만든 물건을 말레이시아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수입이지만 모국인 한국입장에서는 수출이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짭짤한 수익을 거뒀던 아이템을 꼽자면 자동펌프를 빼놓을 수 없다. 당대 한국 최고의 인기제품은 한일자동펌프. 가수 서수남 하청일의 CM송까지 히트했던 한일자동펌프였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일본의 산요제품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의 한일전기로 찾아가 펌프수입 계약을 맺고 현지 판매에 들어갔다. 품질은 같으면서도 가격이 30% 이상 저렴하니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펌프 수입이 중단되고 말았다. 산요 측에서 기술제휴 관계였던 한일전기에 계약위반 문제를 제기하면서, 수출입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이 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우리 대한민국은 수출로 살아가는 나라 아닙니까. 해외동포로서 외국에서 국산제품을 수입하다가 그 길이 막혔습니다. 일본 기업이 우리 한국기업에 불이익 조항을 걸어 수출까지 막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주일쯤 지난 무렵 청와대로부터 “조치를 하겠다”는 회신이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펌프 수입은 재개되었다. 자동펌프 제조사인 한일전기는 재일동포 1세 실업가 김상호(金相浩) 씨가 모국에 투자해 설립한 회사,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때의 펌프수출입은 재일-재말레이시아 해외 한상간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버스덕트 한가지로 세계 재패

현재 헤니권의 주력제품인 버스덕트(Busduct)가 탄생한 사연도 유별나다. 버스덕트는 건물 내에 쓰는 전기케이블로, 주로 고압 전류가 필요한 대형 빌딩이나 공장, 발전소 등에서 쓰이는 제품이다.

   
▲ 다토(Dato) 백작 작위를 부여받은 권병하 회장 가족이 말레이시아 국왕 내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기제품 수만가지 중에 핵심부품을 찾다가 버스덕트를 발견했습니다. 지구상에는 전기가 부족한 나라가 태반입니다. 아시아로만 좁혀 봐도 한국, 일본 정도만 빼면 거의 모든 나라가 전기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나마 산업화가 정착단계라는 중국만 해도 1주일에 1번 이상 정전되지 않습니까. 전기 수요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합니다.”

공장이나 호텔을 지을 때 필수적인 전기 공급, 이를 위한 필수부품이 바로 버스덕트인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저 물건을 떼다가 말레이시아에 팔 요량으로 해당 업체를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공장을 가보니 ‘저 정도 물건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업체 직원이 기업비밀이라며 촬영을 제지하자 “말레이시아에서 당신 회사 물건을 팔려면 현지용 제품 카달로그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둘러댔다. 때로는 한국 엔지니어를 데려가서 제품 특징과 크기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 후 권병하는 자신이 찍은 제품사진과 엔지니어의 눈대중을 기반으로 버스덕트 시장에 뛰어들었다. 비서 한 명 두고 시작했던 외국인 오퍼상에서 제조업체 경영자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주류 제조사였던 지멘스(siemens)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제품을 본 딴 카피(copy)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했다.

비록 “비행기 엔진은 아니어도 날개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호기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고품질의 제품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헤니권이 싱가포르 창기공항과 홍콩 신공항, 영국 히드로공항 제2청사의 전기 설비를 맡았을 정도니 지금은 세계적으로 전기분야에서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연매출 규모 1억6000만 달러, 단일 부품 수출로는 상당한 실적이다. 헤니권 버스덕트는 말레이시아 내수로 소비되는 5%정도를 제외한 전량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높다. 아시아에서 60%, 글로벌 점유율 30%대에 달하니까 권병하는 자타공인 세계 전기시장을 주름잡는 사업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말레이시아백작 다토(Dato)가 되다

   
권병하는 돈만 쫓는 사업가가 아니다. 말레이시아 현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외국인이다. 무엇보다 사회 환원활동에 적극적이다. 150만 달러를 쾌척해 경찰청 직원 자녀 35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말레이국립대학의 한국어학과 학생 전원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장학금 기탁식에는 단 한번 얼굴을 비치지 않는 ‘불개입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총리나 경제관료들은 투자 유치단을 꾸려 해외순방을 나갈 때면 어김없이 그를 호출한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투자유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지난 2006년에는 말레이시아 국왕으로부터 사회 환원 활동 및 국가발전 기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토(Dato)라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작위를 받았으니 말레이시아에서는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제게 말레이시아는 참으로 감사한 나라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동창 한 명 없음에도 사업의 성공을 일궈낸 터전이잖아요. 그만큼 기업환경 좋고 많은 분들로부터 배려받았던 겁니다. 그러니 말레이시아와 지역주민들에게 재산을 환원하는 건 당연한 것이죠.”

권병하는 말레이시아가 외국인 투자가의 재산반출입 자유가 보장된 나라, 관공서의 간섭이나 내외국인 차별이 없는 나라라며 자랑한다. 헤니권을 26년간 경영하면서 관할 세무서가 어디에 있는 지 직원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라고 했다. 이제는 자동차 차창과 명함에까지 국왕이 수여한 ‘다토(Dato)’마크를 붙이고 다니니 ‘오리지널 말레이시아인’이라 불러도 과언은 아닐 터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인터뷰를 마칠 무렵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대학시절 갓 상경한 시골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줍은 듯 순박했고 겸손한 느낌마저 줬다.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6.25동란 때 갓난아기인 저를 등에 업고 피란을 다니셨어요. 전쟁통에도 제삿날이 되면 새벽에 마을로 내려가 상을 차렸답니다. 제게 늘상 하시는 말씀이 ‘어른 공경해라’ ‘손님 오면 정성껏 대하라’는 것이에요. 거지가 오면 밥 한 그릇이라도 먹여서 보내라고 하셨으니까요.”

권병하는 어머니로부터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훗날 본인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말레이시아로 가서 회사 오너가 되어 보니 어머니가 평소 하던 말이 경영철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고객이 왕이다’며 고객 우대를 외치는 비즈니스 기법과 “상대에게 베풀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그토록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었다.

“저는 사는 곳은 말레이시아, 본적은 대한민국입니다. 시집 간 딸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그저 잘 사는 것 뿐. 외국에 떠나 온 저도 이 나라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습니다. 떠날 때는 서러움에 고개 숙였지만 이젠 당당하게 한국인으로 살 수 있게 됐습니다. 해외동포들이 한국의 자부심과 포부를 맘껏 펼치는 그날까지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 권병하와 헤니권코퍼레이션은?
- 1949년 3월 7일 경상북도 예천 生
-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현 헤니권코퍼레이션 주식회사 회장
- 말레이시아 한인회장
- 말레이시아한국투자협의회회장(현)
- 제8차 세계한상대회 리딩CEO 간사(현)
- 건국60년 기념사업 재외동포 명예위원(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남아시아 협의회장(현)


헤니권코퍼레이션
◦ 설립년도 : 1983년
◦ 직원 수 : 250여 명
◦ 주요품목 : 산업용 중전기 제품, 대표제품 ‘버스덕트’
◦ 주요거래국 : 아시아, 유럽, 중동 40여 개국
◦ 연 매출액 : 1억6천만 달러
◦ 해외지사 및 영업소 : 26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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