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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과 환도산성 및 국내성을 답사하다장군총과 환도산성을 다녀오다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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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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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우리 일행은 국동대혈에서 하산하기 전에‘대전간도되찾기운동본부’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유화부인 사당 동굴에서 미리 준비한 지리산녹차소주’로 산신제를 올렸다.

우리나라의 안녕과 대전간도되찾기운동본부’발전 및 회원들의 안전, 행운이 충만하기를 기원했다. 화원들이‘지리산녹차소주’까지 준비하였으니 정성이 대단했다. 따라오던 중국 공안 2인도 늦게 합류했다.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집안 시내에 있는 '고향촌'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집안시의 남서향 산 능선에 위치하는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집안시에서 동포인 조선족학교 교사를 안내 가이드로 지원해주었다. 우리가 지나는 도로 옆에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었다. 보이는 민가 중에는 고구려식 저장창고인 ‘부경’이 보였다. 통구하 물은 매우 깨끗하여 푸른빛으로 주변 나무들과 잘 어울렸다, 환도산성은 통구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좁은 다리를 겨우 건너서 표지석 못 미쳐서 하차했다. 남문 입구에 환도산성(丸都山城)의 표지석이 있었다.

환도산성도 처음 답사했던 18년 전보다는 많이 변모하였다. 2002년 동북공정 추진을 공식화하더니 그들은 노골적으로 고구려의 특색을 하나둘 지우기 시작했다. 폐허처럼 방치하던 환도산성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성안의 두 줄기 물이 합수처 부근의 천지(天池, 蓮花池, 연못)을 메우고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한나라 요동태수가 침입하여 환도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진에 보내니 한나라 군사들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줄 알고 퇴각했다고 하였다. 이 환도산성이 이 기록의 산성이라는 주장은 재고의 문제가 있다. 요동 지역에 같은 이름의 환도산성의 존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방치했던 남문의 옹성을 복원했다. 점장대도 복원하여 목재로 계단까지 만들고 전망대까지 갖추어 놓았다. 당시 3개의 궁궐터도 말끔히 정리해서 주춧돌이 보였고, 주변에는 기왓장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서쪽의 온전히 남아 있는 성벽을 보기 위해 옥수수 밭을 지나 겨우 성벽을 보고 내려와서 점장대에 올랐다. 12미터 정도의 높이지만 남쪽의 출입문과 통구하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였으며, 좌측의 병영 터도 눈에 들어온다.

이곳 환도산성의 역사는 김부식 ‘三國史'를 통해 알 수 있다. 김부식 등이 편찬한 본래 책명은 ’三國史‘인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三國史記’로 왜곡시켰다. 식민사학에 물든 대부분의 우리 역사계의 사학자들은 김부식 ‘三國史'를 굳이 '三國史記’로 부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모든 학술논문의 인용 주(註)에는 ‘三國史’가 아닌 ‘三國史記’였다.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 외 10명이 ‘三國史’를 편찬하여 올린 글(表文)의 원본에는 ‘進三國史表’라고 하였다. 이 김부식의 ‘삼국사’를 1960년에 ‘완역 삼국사기’를 간행한 김종권은 1972년에는 ‘한국명저대전집’ 중의 하나로 ‘삼국사기’ 상·하 권을 내면서 “삼국사기의 개요”를 기술하였다. 서두에 ‘三國史'의 원본 사진을 게재함과 동시에 “三國史를 올리는 글”이라고 해석하면서도 번역서 책명은 ‘三國史記’였다. 원본 ‘三國史’의 사진의 책명과 다른 '三國史記’를 사용하는 우리 학계의 사학자들은 일제 식민사학자의 꼭두각시마냥 민족혼마저 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대부인 이병도 역시 1977년에 번역본 ‘삼국사기’를 출간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번역한 김종권마저 1988년 ‘신완역 삼국사기’를 출간하면서 이전의 바르게 번역한 김부식의 표문(表文)을 식민사관류의 “三國史記를 올리는 글”로 바꾸고 말았다.

김부식의 삼국사 기록에 의한 고구려의 국도를 옮기는 주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유리왕 22년(서기 3년) 10월에 국내성으로 천도(遷都)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상왕 2년(서기 198년)에 환도성을 쌓았으며 13년(서기 209년)에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 16년(서기 242년)에 서안평을 습격하였다. 21년(서기 247년)에 환도성이 지난해의 관구검의 침략으로 함락되어 복구가 불가능하자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본래 평양은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고국원왕 1년(서기 331년)에 국내성으로 이전했다. 4년(서기 334년)에 평양성을 중축하였으며, 12년(서기 342년)에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장수왕 15년(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위의 기사에서 용어상의 혼란이 있다. 즉 유리왕이 옮긴 위나암성이 환도성으로 알고 있지만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아 위나암성에서 천도한 것이 맞다. 동천왕은 관구검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환도성 대신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이 옮긴 평양과 장수왕이 옮긴 평양은 같은 지역인지는 연구할 과제이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지역의 평양은 대동강변의 평양은 결코 아니다. 또한 환도성은 ‘요사(遼史)’에는 위나암성으로부터 서남 200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서진정책은 환도성의 축성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환도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동천왕이 옮긴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이다. 평양이라는 지명을 가진 것은 여러 곳이다. 중국 산서성의 임분현 일대를 평양이라고 하였으며, 당서에는 봉황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이며, 그리고 봉황성을 평양으로 불리기도 한다면서 ‘평양’을 고조선 시대의 ‘도읍’을 나타내는 일반명사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또한 평양성은 환도성에서 100리 이내의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사(遼史)’에는 요양이 기자조선의 평양성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동천왕이 옮긴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이라는 기록도 일맥상통하다. 따라서 대동강의 평양은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후기 수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고구려 후기 수도의 평양 설은 일제가 조작한 반도사관의 한 예인 것이다.

중국의 문헌인 ‘수서(隋書)’나 ‘신·구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이 대동강의 평양성을 가리키는 기사가 한 건도 없다. 우리 학계에서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추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지만, 이 역시 중국 문헌에서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일제의 반도사관의 영향으로 인해 이에 호응하여 ‘허구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의 제자들이 이 이론을 계승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주소이다.

‘신당서’ 동이열전의 고구려조에 보면,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고 남쪽은 패수와 연해 있다. 강에는 소요(小遼)와 대요(大遼)가 있으며, 대요(大遼)는 말갈의 서북쪽 산에서 나와 남쪽의 안시성을 거쳐 흐른다.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으며 강을 천혜의 해자로 삼는다”

명나라 시기에 편찬한 ‘대명일통지’에는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검성으로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에 고연(高璉 : 장수왕)이 처음으로 이 성에 거하였다. 조선시기의 최부의 ‘표해록’에도 요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며, 동서남쪽은 산으로 둘러쌓이고 북쪽은 탁 트인 평야지대라고 했다.

위의 중국문헌에 나오는 ‘평양성’과 ‘압록강’의 위치가 중요하다. 식민사학자들은 이 압록강을 현재의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으로 해석했다. 14세기 이전에 지금의 압록강이 압록강으로 불렸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마자수’라 불렸다. 15세기 이전의 압록수(鴨綠水)나 압록강(鴨淥江)은 황하와 장강과 더불어 3대 강으로 표현되었으며, 강폭이 300보이며 600 여리를 배로 왕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명대 이전의 압록수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의 3대강으로 볼 수 있는 강은 요하(遼河)를 가리키고 있다. ‘자치통감’ 에는 “고려의 왕건이 국경 한계를 혼동강으로 정하여 지키게 하면서 혼동강 이서는 점유하지 못하였다. 혼동강은 곧 압록수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태조 왕건은 혼동강(압록수) 이동 곧 요동을 차지하고 요동의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압록수인 요하를 경계를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사료에 나오는 중국의 3대강으로 불리는 압록수(鴨綠水)나 압록강(鴨淥江)의 거대한 강이 현재의 작은 강인 압록강(鴨綠江)이 될 수 없다. 중국 고대 문헌에는 요양을 평양성, 동녕부, 서경으로 기록하였다. 동북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던 광개토대왕의 웅지를 계승한 장수왕이 더 큰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큰 평야와 도시 및 교통로가 되는 큰 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춘 도시를 요양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대동강변의 ‘평양’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조작·왜곡시킨 평양일 뿐이다.

우리가 답사한 이 성터의 이름도 본래 환도산성은 아닐 것이다. 부근의 산성자촌의 주민들은 이 환도산성을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 부른다. 해발 676m의 환도산의 동·서·북 반원 형태의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길이는 6951m이며, 남쪽에 화강암을 다듬어 옹성을 쌓고 옹성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는 쇠뇌를 세웠던 구멍으로 보인다. 동쪽과 북쪽 성벽에는 2개씩의 출입문이 있고 서쪽 성벽에는 문이 없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 승차하여 건너편 적석총 지대에 갔다. 본래 집안에는 2만 여 개의 적석총이 있었지만 부분적으로 허물어져서 이제는 1만 여개만 남아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산성자산성 아래의 ‘산성하무덤떼’의 적석총은 고구려시기의 무덤으로 일부는 복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잘 보존된 적석총이다.

우리 답사단 회원들은 네모난 적석총 위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나서 집안시내의 국내성터로 이동하였다. 국내성터는 종전에는 아파트와 민가들의 차지였는데 이들을 철거하고 성벽을 복원한 상태였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은 복원한 북쪽 성벽으로 남아있는 4~5단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국내성에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고국원왕은 서기 331년에 국내성으로 이전하였고 3년 뒤에 평양성을 중축하였으며, 서기 342년에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유리왕과 고국원왕이 이전한 국내성이 이곳 집안의 국내성인지는 의심이 간다. 장수왕 15년(서기 427년)에 천도한 지역은 대동강변의 평양이 아니고 요하 부근의 요양(遼陽)이었다는 요양설이 신빙이 가기 때문에 유리왕과 고국원왕이 천도한 국내성의 위치가 요양 부근의 요동지역에 있을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국내성이라 불리는 집안현성의 크기는 사각형으로 성벽은 동(554.7m), 서(664.6m), 남(751.2m), 북(715,2m)의 합한 길이가 2686m이다. 1975년 발굴 당시에 14개의 치(雉)가 있었으며, 3개의 네모난 각루(角樓)와 6개의 옹성문이 있었는데 1947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교전 때에 없어졌다고 하였다. 서쪽 성벽은 콘크리트로 하천 둑을 쌓아 집을 짓는 바람에 성벽이 모두 사라졌다. 1938년에 찍은 사진에는 1921년에 세운 서쪽문인 안무문(安武門)과 서쪽 성벽의 남부가 남아있었다.

우리 일행은 세칭 흘성골성(訖升骨城)이 있는 환인으로 출발하였다. 중국인들은 ‘오녀산성’이라고 부른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려서 환인에 도착하였으며, ‘고려성’ 식당에서 식사 후 ‘가일호텔’에 숙박하였다. 내일 답사는 거대한 흘성골성(訖升骨城)을 오르는 것으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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