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해마다 이맘때면 신문사 문화부는 낯선 전화벨 소리로 화들짝 깨곤 한다. 신춘문예 마감철이면 쏟아지는 걱정과 간절함을 담은 전화들 때문이다. 위세가 줄었다고 해도 해마다 1000편이 넘는 시·소설들이 신문사 문을 두드린다. 신춘문예를 통해 ‘글’은 표현을 넘어 어떤 통과의 문으로 기능한다. 수화기 너머 떠듬떠듬 건너오는 목소리들을 듣다보면 놀라움과 함께 ‘짠’한 마음이 들곤 한다.

글을 다룬 지 스물다섯 해를 꼬박 채워간다. 그럼에도 아직 글을 한 줄이라도 쓸라치면 체기라도 든 듯 가슴부터 답답하다. 무수한 작가들의 넋두리를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도대체 글을 쓰는 건 왜 그렇게 힘겹고 어려울까. 그리고 ‘글의 힘’은 뭘까.

글은 일단 불친절하고 냉정하다. 한번도 글이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 적은 없다. 머리칼 사이로 양손을 넣고 커서만 깜박이던 화면을 노려보던 게 한두 번인가. 어쩌다 글줄 몇 마디가 머릿속을 총알처럼 스쳐갈 때는 왜 매번 버스 안이나 침대처럼 엉뚱한 곳인지. 그럴 때마다 한 글자라도 놓칠까 얼마나 조바심치고, 결국 다 돌아오지 않는 기억에 마음속으로 머리를 짓찧었던가.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초인(?)’이야 “글로 쓴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피를 짜내듯 쓴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작가의 심장에는 피 대신 “얼음조각이 있다”.(그레이엄 그린·소설가)

더구나 글은 만족을 모른다. ‘글은 마감이 쓴다’고도 하지만, 마감이 아니라면 글은 절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쓰고, 쓰고, 또 고쳐 써도 만족하는 글은 잘 없다. 오스카 와일드조차 “아침나절 내내 시 한 편을 교정하느라 끙끙대다가 겨우 쉼표 하나를 지웠다. 그런데 오후에 다시 그 쉼표를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고 한다.

또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단다. ‘문장론’ 교과서나 글 좀 쓴다는 이치고 이를 강조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읽히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쓰면서 나밖에 줄 수 없는 ‘신박’함과 ‘재미’를 담는다는 게…. 그러다 보면 다 쓰고 나서도 시시한 것 같은 걱정과 망설임에 맥빠진 마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무엇보다 외로운 일이다. “투수를 내리듯 소설가를 내릴 순 없다. 소설가는 9이닝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그를 죽일지라도”(어니스트 헤밍웨이)라는 토로처럼 누가 도와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그냥 ‘나 몰라’라 도망가는 거면 몰라도. 순전히 머릿속에 있는 것으로, 순정한 그의 표현과 내용을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절이거나 쓸모없는 글이다. 그래서 가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혼을 팔 수도 있는 인종”(시오노 나나미)이다.

그렇게 써도 ‘가성비’는 터무니없이 낮다. 과거에도 글 써서 먹고살기란 힘겨웠지만, 글보다 신나는 것들이 많은 지금은 점점 불가능한 일이 돼가고 있다. 미국 소설가 엘렌 길크리스트는 “작가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다른 수입원을 찾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글이 귀한 것은 그만큼 정의롭고 용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귀천과 빈부로 높낮이를 정하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인로)이다. 오직 자기 내면의 무게로만 증명하기에 빈부·귀천이 끼어들 틈이 없다.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에 따르면 글을 쓰는 데 유일한 도덕적 의무는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는 권력과 영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니 ‘글’이 좀 더 귀해졌으면 한다. 마음이 아닌 욕망이 그득한 글 아닌 글들이 넘치는 요즘이라 더 그렇다. 문장 한 줄도 가벼이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읽고 온몸으로 느꼈으면 싶다. 쓰는 이도 읽는 이도. 그리고 이렇게 한 해의 끝에서 모두 ‘글’을 써봤으면 좋겠다. 고통 속에서 키워낸 마음들을 새겨 넣듯 써봤으면 좋겠다. 편지도 좋고 엽서도 좋다. 메모 같은 몇 줄이라도 좋겠다.

한바탕 토로하고 나니 후련하다. 그래 현실은 현실로 인정하자. 나처럼 재능 부족한 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글을 쓰기가 어디 마음 같겠나. 그래도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 홈런을 칠 때도 있을 않을까. 신춘문예 부문별 작품 박스마다 홈런 한 편씩은 있지 않은가. 이번에 안 돼도 내년엔 홈런을 꼭 칠거라는 기대를 또 차곡차곡 가슴에 포개두지 않는가.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희망’ 같은 걸 새기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