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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경제난에 아시안 차별까지… 이중고 겪는 이탈리아 한인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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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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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의 연기학교에서 연습 중인 예다 김(27). 1990년대 유학생 부모가 공부했던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와 피렌체 사투리를 유쾌하게 구사하는 원어민이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이유 없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달갑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탈리아와 한국을 잇는 문화의 가교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노력 중이다. [사진가 필리포 만치니]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뒤 카를라 안(Carla An·46)은 그의 ‘두 번째 조국’인 이탈리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여러 번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남아야 할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발견하곤 했다.

팬데믹은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앞으로도 오래 과거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강제로 고립되는 상황이 오래가면서 재정적, 심리적, 사회적 문제가 잇따랐지만, 원래 조국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려면 더 큰 어려움을 견뎌내야 한다.

로마 한국학교 교장인 안씨는 이탈리아를 제2의 조국으로 선택한, 작지만 번영하는 한국인 커뮤니티의 일부이다.

이탈리아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1월 1일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4000명이 조금 안 된다. 지방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더하면 5000명쯤으로 추산된다.

   
 

1997년 오페라 성악가가 될 공부를 하러 처음 로마에 왔던 안 교장에게도 지난 한 해는 힘에 부쳤다. 그는 “2020년 봄 첫 코로나 봉쇄 때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겼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이탈리아와 한국의 가족 걱정이 커졌다”고 했다. 학교는 안 교장이 이탈리아에 남기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막 교장으로 재선된 터라 학교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됐지만 여러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많은 학생이 가족과 떠나면서,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야 할지도 결정해야 했다. 안 교장은 “유럽의 다른 한국 학교와 상의해 온라인 수업을 결정했다. 돌이켜보니 좋은 결정이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속 이탈리아에 머물기로 결심한 또 다른 이유는 가족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이탈리아 초등학교에 다니고 딸은 로마의 대학에 다닌다.

대부분 유럽인들에게 모든 아시아인이 국적과 상관없이 비슷해 보인다는 것도 문제였다. 팬데믹 이후 많은 비중국인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모욕당하거나 불쾌한 상황에 처했다. 안 교장의 딸도 그랬다. “사람들이 딸을 멀리했어요. 한번은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뒤로 저는 딸에게 태극기가 그려진 작은 배지를 달고 다니게 했어요!”

피렌체의 연기학교 학생 예다 김(27)에게도 코로나 사태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그의 부모는 1990년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왔고, 그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와 피렌체의 사투리가 유쾌하게 섞인 이탈리아어를 쓰는 ‘원어민’이다. 부모의 나라 한국에 연기 유학을 다녀온 뒤, 이제 연기학교 3학년. 그는 “끔찍했던 지난 1년을 정의할 말을 찾는다면, 아마도 ‘진이 다 빠졌다’일 것”이라고 했다. “온라인 수업이 있긴 하지만, 제가 배우는 건 연기예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활동이죠.”

김씨는 요즘 코로나 봉쇄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려 애쓴다. “스스로를 더 소중히 돌보기 시작했어요. 이탈리아에 사는 아시아계 여성으로서의 경험에 관한 1인극 극본도 쓰기 시작했고요. 언젠가 제 이야기를 무대에서 공연하겠다는 꿈을 이룰 거예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또 나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역시 팬데믹 이후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걸 느꼈다. 사람들과 멀어지면서 그녀는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어요. 모든 게 다 내 탓 같았죠. 머리로는 ‘너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몸은 다르게 반응했어요.” 코로나 신속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뒤, 정식 검사에서 음성으로 판정받기까지 사흘은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3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인이자 한국인인 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두 나라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에 유용하게 쓰기를 희망한다. “두 나라를 잇는 문화적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이탈리아에서 경력을 쌓아 두 나라 사이의 더 강력한 연결 고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밀라노 인근에서 물류 회사를 경영하는 이탈리아 한인회 회장 문흥철(61)씨.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61세인 문흥출씨는 이탈리아 내 한인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1998년 북부 항구도시 라 스페치아에 항구 관리인으로 일하러 온 그는 지난 2017년 밀라노에서 몇 ㎞ 떨어진 곳에 물류 회사를 설립했다. 이탈리아 한인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대면 미팅이 사라지면서 출퇴근이 무척 간단해졌다. 사무실로 가고, 집으로 오는 것뿐”이라며 웃었다. 그는 “화물 운송료가 오르면서 생긴 부담을 고객에게 지울 수 없어 수익은 줄었지만, 매출은 줄지 않았다”며 “이탈리아 정부의 기업 지원책이 매출만을 기준으로 책정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회사 경영보다 이탈리아 한인회장 역할이 더 어려웠다. 코로나 마스크 분배는 물류업으로 익힌 기술도 시험에 빠뜨렸다. 밀라노 총영사관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한국인들의 귀국 항공편을 조정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는 한국인 커뮤니티를 대표해 이탈리아 정부에 호소한다. “정부가 이탈리아인과 외국인 거주자를 차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백신 접종을 포함해 동등한 대우를 받기 바랍니다.”

   
▲ 번역가 겸 통역자로 일하며 가족의 한식당 운영을 돕는 로마 태생 정하나(24)씨.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로마에서 만난 한인 2세 정하나(24)씨.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로마 사람 특유의 억양으로 완벽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 그의 가족은 1992년 아버지의 오페라 유학길에 함께 이탈리아로 왔다. 정씨는 번역가 겸 통역사로 일하면서, 2005년부터 가족이 운영해온 한식당 일도 돕는다. “온 세계가 같은 비극을 겪고 있고, 단지 한국이나 이탈리아만의 문제가 아니죠.” 갓 끓인 한국 차를 마시던 그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뒤, 고개를 돌려 식당을 바라봤다. 그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 조치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오후 6시에 레스토랑을 닫는다고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더 필요합니다.” 그는 자영업자 지원책에 감사하지만, 손실을 메꾸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덧붙였다. “정부 지원 신청 절차가 복잡하고 정해진 시간표도 없어요. 신청하고 기다리고, 묻고, 또 기다리고, 또 묻고….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그게 이탈리아가 돌아가는 방식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 선택할 수 있다면, 한국과 이탈리아 중 어딜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정씨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지금 당장이라면, 아마 한국에 있는 걸 선택할 것 같아요.”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前 마이니치 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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