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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靑島)시의 도교(道敎) 명승지인 노산(嶗山)을 오르다2천년 역사의 도교(道敎)의 본산 태청궁(太淸宮)을 가다
이일걸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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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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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우리 일행은 맹묘(孟廟)에서 저녁 7시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시간에 출발하여 제남(濟南) 행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30분 후 휴게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한 시간 만에 출발하였다. 내일의 일정이 도교(道敎)의 명승지인 노산(嶗山)을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숙박지로는 제남시 보다는 청도(靑島)시가 적당하다는 의견에 따라 청도시를 향해 달린 승용차는 3시간 후 12시 30분에 청도의 작은 규모의 호텔에 도착하였다.

청도시는 중국 5대 항구 중의 하나이며 인구는 700만여 명이다. 철도, 도로망이 밀집되고 중국 내지와 서부를 관통하는 산동성 최대의 상업도시이다. 은(殷) 이전에는 동이족이 살았으며, 주(周) 시기에는 제(濟)의 영토였다. 한(漢)나라 시기에 도교의 성지가 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노산을 중심으로 수많은 도교 궁관이 건립되었다.

   
 

1891년 청(淸) 시기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포대와 요새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1897년 교주만은 독일군에 점령당하여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1930~1945년에는 일본이 통치하였다. 외국 세력의 많은 침입을 받았지만 부근의 노산은 여전히 도교의 명승지이다. 도교가 가장 번성한 시기에는 구궁팔관72암(九宮八觀七十二庵)과 수천 명의 도사가 있었다.

이튿날 8시에 식사 후 9시에 출발하여 40분 만에 노산의 태청삭도(索道·케이블카) 부근에 도착하여 주택가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태청삭도 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니 동쪽의 바다인 황해와 바위산인 노산의 전경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노산의 중간 삭도 승강장 입구에는 좌우 12구의 글씨를 두 개의 석주(石柱·돌기둥)에 새겨 넣은 상태였다. 중앙 석주에는 천지를 순박하고 온화하게 만든다는 의미인 천지순화(天地淳和)가 새겨져 있었다. 좌측 글귀는 도교의 정신이 전해지고 있음을 말하고, 우측 글귀는 노산의 독창적인 절경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발 650m에서 하차하여 명하동(明霞洞)을 견학하고 선동(仙洞)까지 올랐다가 하산하였다. 일정상 정상인 거봉(巨峰)까지는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태평궁(太平宮)을 둘러보았다.

노산은 청도시 동쪽의 산으로 웅장하고 험준한 바위 봉우리 및 인접한 바다와 더불어 그림 같은 경치로 인하여 “태산(泰山)이 구름 위에 솟았지만 동해의 노산만 못하더라”는 옛말이 전해오는 유명한 산이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할 목적으로 노산에 사절단을 자주 파견하였는데, 이때마다 백성들의 노고가 많아 산 이름에 노(崂)자가 들어 있다고 한다. 노산의 주봉은 거봉으로 해발 1133m이며, 길이 1만8000km의 중국 해안선에서 최고의 산봉이다. 기암 기봉들이 바다를 이루고 산, 바다, 산림, 하늘이 함께 어우러져 ‘해상명산제일노산(海上名山第一崂山)’으로 알려진다. 저명한 도교 성지이며 국가 중점 명승지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이 노산을 ‘신선의 저택’이라고 불렀다. 노산 주변의 해안선은 87km이며, 해변 주위의 섬들은 모두 18개로 도교명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송·원나라 시기에 사원을 많이 만들어 도교의 명산이 되었다. 노산은 도교의 총본산인 태청궁(太淸宮)을 비롯하여 상청궁(上淸宮), 태평궁(太平宮), 화엄사(華嚴寺) 등 명소를 볼 수 있다. 태청궁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도교의 수련장으로 노자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태청궁 일대의 경관은 보주산(寶珠山)을 끼고 있다. 보주산의 7개 산봉우리는 동·서·북쪽에서 태청만의 바다를 감싸고 있다. 주봉인 노군봉(老君峰)은 왼쪽으로 도원봉(桃園峰), 망해봉(望海峰), 동화봉(東華峰)을 거느리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중양봉(重陽峰), 반도봉(蟠桃峰), 서왕봉(西王峰)을 거느리고 있다. 이 7개의 봉우리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준다. 남쪽의 바다를 태청만이라 하는데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태청만에서 불어와서 아열대성 기후가 유지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환경으로 이곳을 노산의 소강남(小江南)이라 부른다.

노산의 여러 도교사원 가운데 태청궁은 기록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도교의 본산이다. 태청궁은 약 2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도교를 무시할 수 없었던 역대 왕조는 수시로 이곳을 보수하여 노산에서 가장 큰 도교사원으로 만들었다. 태청궁은 하청궁(下淸宮)이라고도 하며, 현지인들은 하궁(下宮)이라 한다. 총면적은 약 908평이며 건축면적은 약 656평이다. 삼관전(三官殿), 삼청전(三淸殿), 삼황전(三皇殿)이 주전(主殿)이며 그 부근에 관우(關羽)와 악비(岳飛)를 모신 관악사(關岳祠), 동서객당(東西客堂), 신도원(坤道院) 등으로 구성된 150여 간의 건물이 있다.

태청궁에는 바위에 새겨진 ‘도교전진천하제2총림(道敎全眞天下第二叢林)’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대전 앞에는 모두 산문(山門)이 있으며 푸른 숲에 묻힌 청색 벽돌과 회색 기와의 건물은 송대의 건축양식으로 매우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바닷가와 노산의 특색을 살린 은자(隱者)의 거처로 적합했다. 태청궁에는 710년 된 능소화와 2000년이 넘은 나무들도 있다. 태청궁의 좁은 공간에는 서왕모전, 삼청전, 동화제군전 등 고색창연한 건물이 몇 개씩 이어져 있다.

계단으로 내려오는 데 이(離)문이 보였다. 노산(崂山)의 등산로에는 태극의 8괘를 따라 문의 명칭을 정한 것 같다. 즉, 건(乾)·곤(坤)·진(震)·손(巽)·감(堪)·이(二)·간(艮)·태(兌)로 문의 이름을 정한 듯 했다.

태청궁지에 따르면 태청궁의 역사는 서기전 140년인 한무제의 건원(建元) 원년에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락현(高樂縣) 사람인 장렴부(張廉夫)가 삼관묘(三官廟)를 처음 지으면서 시작됐다. 장렴부는 자가 정여(靜如), 호는 낙산(樂山)으로 한문제 9년에 출생했다. 관직은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지만 사직을 하고 도를 닦았다. 현자(玄字)를 깊이 연구하여 제남산(濟南山)에 들어가 도교를 열었고 노산 남쪽의 해변에 초옥을 짓고 삼관대제(三官大帝)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그는 2년 후인 건원 3년에 다시 삼청신(三淸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삼청신은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 상청영보천존(上淸靈寶天尊), 태청도덕천존(太淸道德天尊)을 가리킨다. 태청궁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당대(唐代)의 이철현(李哲玄)이 동쪽으로 여행을 하다가 노산에 이르러 삼황제(三皇帝)의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삼황암(三皇庵)이라 불렀다. 태청궁은 이로서 처음으로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오대시대 후당(後唐)의 동광(同光) 2년인 924년에는 구호암(驅虎庵)을 짓고 노자상(老子像)을 모셨다. 송태조 건륭(乾隆) 원년인 960년에는 유약졸이 태청궁의 대전을 중수할 때 새로 삼관전을 짓고 삼황전을 중수하였다. 태청궁의 현 모습은 이 때 이미 완성되었다.

태청궁은 나중에 전진도의 수산파(隨山派)가 차지했다. 전진도 북칠진 가운데 한 사람인 유처현(劉處玄)이 금(金)의 명창(明昌) 원년인 1195년에 노산의 태청궁에서 도교의 경전을 강론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청궁에서 개종을 하게 되면서 북칠진이 수산파의 조묘(祖廟)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수많은 도사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와 이곳에 은거하며 수련을 했고 저서를 남겼다. 서복양(徐復陽), 장삼풍(張三豊), 제지(齊持), 왕량휘(王良輝), 한겸양(韓謙讓) 등이 차례로 태청궁의 주지가 되었으며 태청궁은 노산에서 가장 유명한 도교의 사원이 되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노산을 바라보니 붉은색의 글귀를 하얀 화강암에 새겨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복(福)자나 수(壽)자 등이다. 붉게 새긴 글자군이 햇볕에 반사되어 더욱 신비스런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노산 아래로 내려오는데 약 45분이 소요되었다. 승용차를 타고 오는데 시골 시장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오늘 시골장이 서는 날인가보다 내심 생각하였다. 차를 세우고 우리 일행은 시골 시장 내의 과일전, 어물전, 육류전, 개, 고양이, 토끼 등이 나와 있는 현장을 30분 간 견학하였다.

그리고 청도에서 산둥 반도의 아래 해안선을 따라 가다가 ‘산동고속도로’를 만나 겨우 진입할 수 있었다. 오후 2시 경에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한 시간 후에 석도(石島)항에 도착하였으며 출국 수속을 밟아 승선할 수 있었다. 내일 오전 10시이면 5박 6일의 중원 답사 여행을 끝내고 인천항에 도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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