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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키위 - 50년을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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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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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 / 재뉴질랜드 칼럼니스트

   
 

생활 26년차인 지금도 나는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인(Korean in New Zealand)’ 인가? 아니면 ‘한국계 뉴질랜드인(Korean New Zealander)’ 인가? 에 대한 물음표를 달고 살아간다. 나이 50이 넘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한국의 반대편에 있는 뉴질랜드에 와서 뿌리를 다시 내린다는 것이 쉬울 리는 없을 것이다, 10년 정도 지나면 영어 하나는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민 초창기의 실력에서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 우리의 2세, 3세들은 이민 와서 2-3년만 지나도 입과 귀가 풀려 현지화가 진행되는데 말이다.

   
 

뉴질랜드의 한인 사회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이를 정확히 단정 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뉴질랜드로 본격적인 한국인의 이민 역사는 1991년부터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1991년에 드디어 재뉴 한인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고(체류자 및 원양어선 선원 포함) 동년 11월에 뉴질랜드 정부의 점수제 일반 이민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되었다. 이는 1992년부터 획기적으로 한인 사회가 팽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웰링턴에서 결성된 뉴질랜드 전체 한인을 대표하는 재뉴 한인회가 끝나고 지역한인회 시대로 재출발한 것도 1991년부터이다. 오클랜드한인회, 크라이스트처치한인회, 웰링턴한인회의 역사를 30년으로 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이다.

1991년에서 20년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1971년 7월에 주뉴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때이다. 1948년 8월에 한국정부가 수립되자 뉴질랜드 정부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해주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뉴질랜드 정부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1962년 3월에는 한-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무역, 경제, 기술 협력을 증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콜롬보 플랜에 의한 한국 유학생들이 뉴질랜드 정부의 전액 장학금 지급으로 낙농, 원예, 임업 분야의 생산과 마케팅 공부를 하고 돌아갔으며 한국의 영어 교사들을 연수시켰다. 1968년 9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고 10월에는 Holyoake 뉴질랜드 총리가 한국을 답방하였다. 박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인회는 물론 한국의 공관도 없어 어떻게 환영 절차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콜롬보 유학생과 한-뉴 비즈니스 관계자들이 수고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1968년 10월에 한-뉴 협회가 결성되고 민간외교 역할을 수행했다.

대사관이 개설되던 1971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1971년 1월에 외교관계에 관한 빈(Wein) 협약이 한국에 대하여도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6월에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이 개설되고 7월에는 주뉴 한국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당시 뉴질랜드 한인 사회는 어떠했을까? 1960년부터 한국의 원양어선 선원들이 단기 체류로 뉴질랜드를 드나들었고 콜롬보 플랜에 의한 유학생들이 장·단기 체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 이민에 의한 정착 자는 손꼽을 정도였다. 1962년에 입양되어 온 김성미 양(당시 15세, 웰링턴 거주), 1968년에 참전 용사와 결혼 해 오클랜드에 정착한 Mrs. Morton, 1969년에 크라이스트처치 링컨 칼리지 연구원으로 취업해 온 정재훈 박사 가족, 1969년에 오클랜드에 정착한 김영이 씨 가족 등이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대사관이 개설되자 소수의 한인 사회이지만 대사관을 중심으로 구심점이 형성되고 그 후 유입되는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에는 오클랜드 한국무역관이 개설되어 양국 간에 상품교역이 활발하게 움직일 계기를 마련했다. 뉴질랜드 녹용 산업은 한국인에 의하여 개척되다시피 되었다. 대사관, 무역관 직원과 그 가족 및 원양어선 선원, 유학생 등 장·단기 체류 자를 포함하여 한인의 수가 70여 명으로 늘어나자 한인회의 창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74년 10월에 당시 강춘희 대사관저에서 ‘재 뉴질랜드 한인회’ 창립 모임이 열리고 박홍섭 씨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2007년 7월, 『뉴질랜드 한인사』 편찬을 마무리할 즈음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때 1971년 7월1일(약칭 7171)을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원년으로 제정하자는 동의가 형성되었다. 1971년으로부터 기산할 때 2021년은 50주년이 된다. 해외 다른 교민 사회와 비교할 때 연륜이 짧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연륜이 짧다고 해서 지난 역사를 무시하고 지내다 보면 앞으로 500년이 지나더라도 축적된 한인 사회의 자산이 없을 것이다.

뉴질랜드 한인 사회는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0.7% 남짓한 규모이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1.5세대, 2세대들의 성취도는 인구 비례로 볼 때 탁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업 면에서 전체 수석을, 골프로 상위랭킹을 휩쓰는 주니어들, 음악/미술 분야의 준재들, 속속 배출되는 전문직 종사자들은 현지 사회에 커다란 화제 거리를 제공하며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리디아 고 (한국 명 高.甫炅) 선수는 세계적인 골퍼로서 뉴질랜드를 빛내주고 있다. 멜리사 리 의원은 해외 한인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으로서 5선을 연임하고 있다. 뉴질랜드 한인 팀은 세계 한민족 체육대회에서 두 번이나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뉴질랜드는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세계 제일의 청정국가, 안전국가, 평화스러운 국가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러한 나라에 와서 한민족의 삶의 터전을 넓혀가고 있는 우리 코리안 키위들인 만큼 높고 멀리 날아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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