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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시대 재외동포 네트워크 강화 시급하다국내외 환경변화 발맞춰 정책·제도·예산 등 보완·정비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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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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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닷새 전인 지난 1월 13일은 한인(韓人)의 미(美) 이민사가 공식 시작된 날이다.

이를 계기로 격동(激動)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 근세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이산)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는다. 또한 한민족(韓民族)의 끈질긴 생명력과 저력을 확인하면서 21세기 초연결사회(超連結社會)를 맞아 소중한 자산인 재외동포들의 인적네트워크를 강화, 활용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인력이 부족했던 하와이의 미국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대한제국을 통해 인력을 수급하기로 했다.

대한제국은 기근과 일본의 수탈로 어려워진 상황이었고, 당시 주한 미국공사 알렌(H.N. Allen)과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 W. Dechler)의 제안으로 이민을 결정하게 된다.

미국인 목사에 의한 서양 문물의 폭넓은 전파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수도권 지역 주민 121명이 이민을 신청, 인천 제물포항에서 일본 기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들러 신체검사를 받은 후 최종 109명이 미국 상선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1902년 12월 24일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마침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껏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이민자의 삶은 이역만리 외롭고 낯선 땅에서 열악한 환경과 맞서야 하는 고난의 나날이었다.

이후 재미 한인들의 개척적인 삶과 미국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높이 평가해 미국 연방의회가 2005년 12월, 이날(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 (The Korean-American day)'로 지정하게 된 배경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에서 1,033명의 한인이 멕시칸드림을 꿈구며 영국 선박 일포드호에 올랐다. 190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에 실린 노동자 구인광고를 보고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선박용 밧줄의 원료) 농장에서 새 삶을 개척키로 한 것이다. 이 가운데 300명은 이곳보다 근로조건이 좋다는 말에 꾀어 사탕수수 농장 취업을 위해 1921년 쿠바로 재이주하게 된다.

4년 계약으로 떠났지만 도착 직후 농장주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다시피 했다. 토굴 등에 살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굶고 채찍으로 맞았다.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사실상 일제 치하에 들어간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자 현지에 살면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고 군자금(軍資金)을 보냈다.

노예처럼 취급받던 멕시코 이민 1세들의 힘든 삶을 그린 영화 ‘애니깽’(1997년 개봉)은 김영하의 원작소설 ‘검은 꽃’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보다 앞서 시작된 러시아 한인 이주사(移住史)를 살펴보면, 약소국 국민의 고난(苦難)과 비애(悲哀)를 통감(痛感)하게 된다. 1860년대 연해주(沿海州)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0여 가구가 최초 정착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었다.

1900년대에는 교민의 수가 6만~7만 명에 이르렀고, 러시아 정부에서 한인의 집단 거주 구역을 설정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되었다. 이곳에서는 항일지사들이 모여 독립운동과 계몽운동 등을 위한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후 진행된 무장독립운동과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년 독립군부대와 러시아 赤軍·적군이 교전한 사건), 러시아 사회주의 노선의 다툼, 러, 중, 일의 갈등과 같은 격변은 점차 연해주 한인들에게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 결과 1937년 극동지방 한인 17만여 명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당했다. 6,000km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이와 노인 등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앙아시아에 자리한 한인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성으로 땅을 일구어 황무지를 옥토(沃土)로 가꾸었고 정착에 성공한 한인들은 고려신문과 고려극단이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 identity) 유지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연해주 이주를 시작한지 160여 년, 강제 이주를 당한지 90여 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와 그 주변국에는 50만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한인들의 이주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청(淸)나라는 봉금령(封禁令) 해제와 함께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면서 만주(滿洲)지역을 중심으로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일제에 국권(國權)을 빼앗긴 이후에는 몰락하였거나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만주 전역으로 이주했다. 한인들은 만주에서 황무지(荒蕪地)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보급한 주역이었다.

이들은 가난과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으며, 독립군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이곳의 황무지 개간 및 한인들의 지하활동 감시를 목적으로 한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해 매년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났다.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210만 명의 한인들이 거주했고, 이들 중 약 70만 명이 1945년 광복 후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소련이 간도(間島) 지역에 진출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간도 지역의 한인촌도 공산화되었다. 중국 정부는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한 한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1962년 9월 연변 조선민족자치구 성립을 허용했고, 1954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했다. 현재 중국에는 235만 여명(2021년 기준)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어 재외 한인동포 중 미국(263만여명)에 이어 두번쩨로 많은 수가 살고 있으며,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에서는 15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한인들의 일본 이주는 초기에 유학생들이 중심이었으나 이후 경제적인 이유로 농민, 노동자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계기로 많은 농민들이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일본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했다. 이들은 방직공, 광부, 벌목공, 토건공, 일용인부 등 단순노동에 종사하며 돈을 곧 귀국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군수물자 보급과 노동력 공급이 필요했던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강제로 한인들을 징용(徵用)해 72만명 이상이 일본 국내, 남사할린, 남양군도로 연행되어 탄광, 광산, 토목건축, 공장, 항만 농장으로 보내졌다.

해방이 되었지만 냉전체제로 들어선 세계정세 속에서 조국은 남과 북이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귀국이 시작되었다. 고국에 돌아와도 고향에 생활 기반이 없었던 재일한인들 중에는 귀국을 미루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고 결국 1946년 말 조국으로의 집단 귀국은 종료됐다. 현재 일본에는 약 81만 여명의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해방과 전쟁 이후 한인들의 해외 이민은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졌다. 1950년대에는 전쟁고아, 혼혈 아동, 미군과 결혼한 여성, 학생 등이 입양(入養),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주로 이주했다. 1962년 해외 이민법이 제정된 이후 취업이민이나 농업이민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이민의 길이 열렸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캐나다의 이민 문화개방과 가족 초청 등으로 전문분야 종사자들이 이민에 적극 참여했으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를 향한 농업이민이 이어졌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정부 주도로 독일 이민이 이루어져 광부 8천여 명, 간호 여성 1만여 명, 조선기술자 300여 명이 독일로 떠났다. 1980년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호주 등으로 사업, 취업 및 투자 이민이 진행되면서 해외 이민의 지역별 분포가 다양해졌다.

한민족의 해외이민사는 올해로 하와이 이민 119주년, 연해주 이민 159주년으로 보고 있다.

외교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1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재외동포는 전 세계 180개국에 732만 51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인구로 보면 남북한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또한 유대인 800만명이 이스라엘(600만)을 제외한 100여개 국가, 화교(華僑) 5000만명이 130여개 국가에 퍼져 사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재외동포 규모에서는 세 번째이지만, 가장 넓게 분포되어 있는 민족이 코리안(한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이산)는 조국을 떠난 해외 이주자, 난민(難民, refugee), 노동자, 소수민족 등을 포괄한다. 역사적 또는 정치·사회적 관점에 따라 정의를 달리할 수 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이주 원인만큼 특징이 다양하다. 전 세계 180개 나라에 분포하고, 미국·중국·일본 및 러시아 등 강대국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내는 증거다. 다른 민족에서는 전례(前例)를 찾기 어려운 분포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각종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버텨냈고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국(祖國)은 이들에게 버팀목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냄으로써 한민족의 놀라운 단합과 정체성을 과시해 왔다.

​이주(移住)는 인류의 역사다. 급속한 세계화와 기술 발달로 더 확산될 것이다. 떠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든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세계를 연결하는 가교(架橋)이자 소중한 자산(資産)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세대교체를 이루면서 정체성 유지에 갈등을 겪기도 하고 주류사회(主流社會) 편입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기도 한다.

세계 어디를 가도 차이나타운(China Town, 華僑村·화교촌)이 없는 곳이 없다. 약 5,000만 명의 화교(華僑)와 화상(華商) 네트워크는 현대 중국 성장의 밑거름이자, 막강한 저들의 위상(位相)을 보여준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또 어떤가. 화상 네트워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을 꼽으라면 단연 유대인을 떠올린다. 디아스포라의 원조(元祖) 격인 유대인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그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 곳이 없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1,400여만 명(이스라엘 포함)의 유대인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같은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했다. 미국 정치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이스라엘정치행동위원회’(AIPAC)의 조직과 활동이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미래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로벌시대에 재외동포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인적자산이자 미래다. 5대양(五大洋) 6대주(六大洲)에 ‘한민족 네트워크’를 엮어낼 첨병(尖兵)이자, 글로벌 코리아를 구축할 거점(據點)이 바로 그들이다.

이에 정부는 2007년,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고취하고, 한민족 공동체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10월 5일을 법정기념일인 ‘세계 한인의 날(World Korean Day)’로 제정했다.

하지만 아직도 재외동포에 관한 정책과 제도 재정지원 등 여러 측면에서 보완하고 정비해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재외동포(在外同胞)와 모국(母國)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재외동포기본법을 제정하고, 재외동포 관련 정책 개발과 관련 실무를 총괄할 전담기구인 ‘재외동포청’을 설립, 재외동포 인구 규모와 전략적 중요성에 걸맞는 보다 정교하고 합리적인 정책 대응을 할 때가 됐다.

1997년 설립된 현재의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은 국내외 재외동포 정책 업무 추진을 하는데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2009년부터 외교부와 별도로 장관급의 디아스포라 전담 부처를 운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스라엘 본드(bond)를 발행해 미국의 채권 매입자들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든든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기발하다는 평가다.

인구절벽(人口絶壁, Demographic Cliff) 시대와 민간외교·경제협력의 중요성 등 국내외 환경변화에 따라 정부 부처의 재외동포 정책 업무는 갈수록 증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관련 업무들은 분산되거나 중복되어 있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이를 조정, 심의할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조차 없는 형편이다.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동포들을 한민족의 정체성을 토대로 하나로 묶어 상부상조(相扶相助)하게 함으로써 상생발전(相生發展)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네트워크의 핵심은 신뢰이다. 이제는 서로 믿고 도와야만 초연결사회(超連結社會, Hyper-connected Society). 네트워크 시대에 다같이 살아남을 수 있고 상생(相生)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21세기는 네트워크의 사회이며 '민족(民族)'이라는 동질성과 정체성이 네트워킹(networking)에 커다란 위력(偉力)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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