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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장난 외교 레이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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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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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 워싱턴 특파원]

미국의 대러 제재에 동참한 동맹국 32곳이 다 받은 ‘수출 통제 면제’를 한국만 못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달 28일,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허둥대는 꼴은 태평양 건너에서 보기에도 딱할 만큼 한심했다. 외교부는 “대러 전략 물자 수출을 차단한다”는 뒷북 제재를 무슨 중대 결심처럼 발표했다. 뒤늦게 미국에 와서 면제를 졸라봐야 할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방위적 대미 협의”를 “본격 추진”하겠다는 보도 자료를 냈다.

이번 뒷북 제재를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미국의 대러 수출 통제가 처음부터 한국이 동참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뤄졌다는 데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8일(현지 시각) “상무부가 휴대전화, 랩톱, 냉장고, 세탁기 등 소비재 가전의 대러 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며 미국 정부가 대러 수출 통제를 검토 중이란 사실을 처음 알렸다. 당시 이 신문은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산 반도체나 소프트웨어를 쓰는 유럽, 한국, 다른 외국의 제조사들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한국’을 명시해 보도했다. 애초부터 미국은 이번 대러 수출통제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외교부 전경.

FDPR은 미국의 기술·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만들었다면 미국 외 국가에서 생산한 제품이라도 미국 정부가 제3국 수출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규칙이다. 이를 적용하면 한국 정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 정부가 통제 대상으로 지정한 기술·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들은 무조건 미국의 통제를 받게 된다. 한국이 이란에서 수입한 원유 대금 70억달러를 지불하고 싶어도 미국의 대이란 제재가 해제되지 않는 이상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그 후 미국과 동맹국들 간의 대러 제재 협의가 있을 때마다 우리 정부가 참여 여부를 ‘고심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무엇을 고민하나’ 내심 의아했다. 남·북·러 간의 가스관·철도 연결을 꿈꾸며 미국의 대중·대북 제재에 냉담한 태도를 보여온 문재인 정부가 선뜻 대러 제재에 나설 리야 있겠냐만, 이번 수출 통제만큼은 한국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 제재가 발표되기 전에는 ‘참여 의사를 밝힌 나라나 안 밝힌 나라나 똑같이 수출 통제를 받을 테니, 굳이 러시아와 낯을 붉히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동참 의사를 밝힌 국가들은 미국의 수출 통제를 면제받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당연히 먼저 동참을 선언해 침략 행위에 반대한다는 ‘명분’과 우리 기업이 미국의 수출 허가 절차를 면제받는 ‘실리’를 다 챙겼어야 한다. 혹시 한국만 몰랐던 것일까? 국제사회 분위기를 읽는 외교의 ‘레이더’가 돌아가고는 있는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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