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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갈등, 책임론적 화해 넘어 포용론적 화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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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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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가해자 사죄와 피해자 용서라는 책임론적 화해는 수명 다해
세계 10대 강국 한국, 가해자 입장도 듣는 포용적 태도 필요
한국이 징용문제 해법 먼저 내놓고 ‘반일·혐한’ 악순환 끊어야
초당적 협의체 한일의원연맹이 문희상 법안 수정·통과시키길

최악의 한·일관계 풀어야 할 새 정부

   
 

실타래처럼 엉킨 한·일 역사 문제를 해결하고 파국 일보 직전에 도달했던 한·일 관계의 개선을 모색할 시점이다. 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석열 당선인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미래를 향해 희망적인 덕담을 나눈 두 사람이지만 문제는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 것인가이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로 악화한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국 측이 선제적인 해법을 제시하라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처럼 뜻을 모은 양국 간 협력이 실행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문재인 정부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윤석열 정부가 한국의 높아진 국격에 걸맞은 선제적 해법을 과감하게 제시하여 꽉 막힌 물꼬를 트고, 한·일 역사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확보하기를 기대한다. ‘포용론적 화해’는 그 해법의 철학적 토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일 과거사를 둘러싼 화해의 모색은 ‘책임론적 화해’에 근거하여 이루어져 왔다. 가해자의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책임론적 화해는 2차 대전 이후 유럽 국가 간의 화해를 위한 이론으로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럽에서는 이 방식을 통해 실제적 효과를 가져왔고, 유럽연합(EU)의 탄생과 더불어 이제는 유럽에서 과거사 문제로 인한 심각한 갈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책임론적 화해론, 서구 기독교와 관련

한편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역사 문제가 현안으로 부상했다. 유럽에 비해 역사 화해가 상당히 지체된 시점이었던 만큼 이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책임론적 화해론이 사용되었다. ‘일본의 사죄와 한국의 용서’를 통한 화해의 모색이 활발히 진행되어, 1993년 고노 담화, 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거쳐 마침내 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낙관적 전망은 교과서 왜곡, 영토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문제 등의 장애물에 부딪혔고 이후 역사 화해가 진전되기는커녕 오히려 퇴행과 역행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2018년 10월 강제 징용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버렸다. 이제 책임론적 화해론은 그 기능과 수명을 다한 듯하다.

원래 책임론적 화해론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종교적 화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기반을 둔 기독교적 화해는 자신의 죄에 대한 죄인의 깨달음, 죄의 고백과 회개, 용서받기, 그리고 죄인의 시정 노력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유럽의 국가 간 화해는 이러한 개인 차원에서의 화해 순서를 국가 간에 적용하여 가해국 독일이 피해국에 대해 사죄와 보상을 함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졌다.

유럽과는 달리 에도 시대로부터 메이지,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일본의 문화적 기반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나 가치관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들에게 책임론적 화해론에 근거한 ‘진정한’ 사죄를 요구한다고 해도 납득할 만한 응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비록 책임론적 화해론이 도덕적 측면에서 정당성을 가질지라도 현실의 정치 영역에서 실질적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새로운 화해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한·일 관계의 개선과 역사 화해를 위한 철학적 토대로서 기존의 책임론적 화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포용론적 화해론을 제시한다.

국격에 걸맞은 사고·행위 요청돼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군사력에서 세계 10대 선진 강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문화의 힘은 그보다 훨씬 눈부시게 분출하고 있다. 한국의 국격은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던 1965년이나, 파트너십 선언을 단행했던 98년과는 현격히 다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국격에 걸맞은 사고와 행위를 해야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무한 책임(피해자가 원하는 만큼의 책임)을 집요하게 추궁하기보다는, 가해자의 입장·견해·주장을 듣고 이해하며 그들의 상처와 아픔조차도 함께 치유해가는 포용적 관점으로 사고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코 가해자가 사죄하지 않으니 무조건 용서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포용은 사죄와 용서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화해의 방식이다.

책임을 추궁하는 주체에서 상대를 포용하는 주체로 자기의 정체성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책임론적 화해론에 근거하여 일본을 상대해왔던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책임론적 화해의 논리 구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가해자와 피해자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피해자 개념에는 피해 당사자, 피해자 지원단체, 피해 국민, 피해국 등 결을 달리하는 여러 층위가 있다. 게다가 피해 시점과 화해의 시점이 상당히 멀어져 피해의 상속이란 문제가 추가되면 더욱 복잡해진다. 한·일 역사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피해자 대신에 여러 층위를 포괄하는 의미로서 ‘피해자 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논리 구조를 정리해 보자.

토착왜구론 등 파생적 분노 도움 안돼

과거 어느 시점에서 ‘가해 당사자’의 부정의한 행위로 인해 ‘피해 당사자’의 분노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해자 쪽’이 사죄와 보상을 하고 ‘피해 당사자’가 용서함으로써 분노를 소멸시키고 정의를 회복한다. 이후 ‘피해자 쪽’과 ‘가해자 쪽’은 함께 과거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미래를 향한 교육에 매진한다.

90년대 이후 진행된 화해의 과정에서 가해자 쪽의 노력을 통해 ‘피해 당사자의 분노’(본원적 분노)는 해소될 기회가 있었고, 해소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에 대한 화해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피해자 쪽의 분노’(파생적 분노)가 커지는 역설적 현상이 발생했다. 가해자 쪽의 노력이 미진하다는 생각과 그 노력의 진정성에 대한 불신이 가해자 쪽의 책임을 더욱 추궁하게 되고(반일), 이러한 피해자 쪽의 동향이 가해자 쪽의 반발을 불러와(혐한), 이는 또다시 피해자 쪽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렇듯 분노를 증폭시키는 반일과 혐한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파생적 분노가 본원적 분노를 압도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파생적 분노를 증폭시키는 데는 민족주의, 국민 정서, 친일파 몰이(토착왜구론)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 파생적 분노를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저급한 정치, 책임 추궁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교조적 집단, 파생적 분노를 조장하는 무책임한 언론, 친일파 몰이에 휩싸이기를 꺼리는 방관적 지식인이 빚어내는 오해와 편견, 무지와 억지, 비겁과 침묵을 자양분으로 하여 파생적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져 버렸다.

나는 현시점의 역사 문제는 본원의 문제가 아닌 파생의 문제라고 본다. 본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일 간에 이미 많은 부분을 해결했고, 앞으로 남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오히려 파생의 문제가 본원 문제의 해결을 저해하고 있고 그에 따르는 손실은 너무 크고 아프다.

일방적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야

파생적 문제의 책임을 오로지 가해자 측에 전가할 수 있겠는가? 피해 당사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으로 피해자 측의 파생적 분노를 해소할 수 있겠는가? 나는 파생적 분노는 책임론적 화해로는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역사 화해의 철학적 토대를 포용론적 화해로 전환하자. 그리고 일방적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 높아진 국격에 걸맞게 상대를 포용하는 주체로 자기의 정체성을 정립하자. 포용론적 화해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무장하고 파생적 분노를 일시적으로 유보하자. 그리고 한국이 해법을 제시하라는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요청을 수용하여 징용자 문제에 대한 선제적 해법을 제시하자. 2019년 12월 문희상 국회의장을 대표로 하여 14명의 여야 의원이 공동발의했다가 회기 종료로 자동 폐지된 ‘문희상 법안’을 다시 추진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5월 10일 탄생하는 윤석열 정부 앞에는 국내외 난제가 산적해 있다. 험로를 개척하며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요구하는 바가 통합과 협치다. 그러나 절반으로 갈라진 국민의 마음과 현격히 비대칭적인 여소야대 상황에서 통합과 협치가 실현될지 많은 국민이 불안감과 의구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 154명이 소속된 한일의원연맹은 초당적 협의체인 만큼 진영 논리와 정당의 이해관계를 떠나 국익을 위한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다수의 여야 의원이 뜻을 모아 문희상 법안을 수정하여 통과시키길 기대한다. 윤석열 정부의 통합과 협치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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