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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의 정체성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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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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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신조어는 언제나 생겨나지만 오늘날은 더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그냥 문맥으로만 짐작하고 넘어갔는데, 언젠가부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찾아본다. 그렇게 알게 된 단어가 ‘리즈 시절’이다. 지나가 버린 전성기를 일컫는단다. 그렇다면 ‘리즈 시절’은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용어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굽히고 들어가지 않은 것을 고구려의 패망 원인으로 드는 학자들이 있다. 흔히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는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당나라와 고구려 관계가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당나라 태조 이연은 건국 후 고구려와 대등하게 공존하는 정책을 취했다. 수나라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결국 패망한 일을 기억한 탓이다. 하지만 이연에 이어 즉위한 당 태종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626년 즉위 직후부터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 최종적 목표는 고구려였다. 당 태종이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처음 공격한 것이 645년인데, 이미 630년 초부터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뻣뻣하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국력에서 당나라가 앞섰다. 고구려는 전쟁을 피하려 했다. 여러 차례 사신도 보내고 당나라와 잘 지내려 노력했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가 당나라에 가까워지기 위해 했던 것처럼은 할 수 없었다. 국가적 생존을 위해 신라는 100년 넘게 써온 자국 연호를 폐기하고 당나라 연호를 썼고, 당나라 관복을 수입해 입었다. 장차 왕이 될 사람이 당나라 관직을 받았다. 자발적으로 당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가 했던 행동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에 앞선 약 20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 때문이다. 고구려가 600년 이상 이어온 나라라면, 당나라는 막 건국된 신생국이었다. 5~6세기에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중국 전체는 서너 개 지역 강국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병존했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를 지배했는데, 중국의 강력한 지역 강국들과 대등한 존재였다. 200년이나 광활한 지역의 패권을 유지했기에 고구려가 이를 자국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다. 더구나 고구려는 강력한 통일제국 수나라의 총공격을 서너 차례나 힘으로 막아냈다. 이런 경험을 가진 고구려가 신라가 당나라에 하듯이 굴종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중국과 일본의 행동도 자신들의 ‘리즈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이후 1945년 패전까지 ‘리즈 시절’을 보냈다. 채 100년이 안 되는 기간이고, 세계적인 수준의 ‘리즈 시절’도 아니지만, 충분히 긍지를 느낄 만한 경험이다. 그 영광은 1964년 올림픽 이후 1990년 무렵까지 이어진 일본의 ‘융성’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중국 역시 ‘제국’으로서의 자국에 대한 집단 정체성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대국’ 운운할 때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가만 아니라 개인, 집단 및 조직에도 ‘리즈 시절’이 있다. 이미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잘나갔던 현역 시절의 직책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리즈 시절’에는 큰 부작용이 있다. 개인이나 국가나 특정 시기를 ‘리즈 시절’로 삼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춰 선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상의 시간은 일정하게 흐르고 쉼이 없다. 개인이나 국가나 발전하고 융성하는 시기가 있다면, 부진하고 쇠락하는 시기도 있기 마련이다. 일단,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리즈 시절’과 세상 시간 사이의 차이를 줄일 수 있다. 알고 있어도 그 마법 같은 시간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여당과 야당이 바뀌었다. 각자는 어떤 ‘리즈 시절’을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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