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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신뢰, 2% 용서'라는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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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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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저속 가열, 저속 냉각의 나라 일본
빨리빨리 속도 내려는 한국과 달라
'매직'은 없고, 차곡차곡 간극 메워야

#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멘토였던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의 대표작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는 30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는 건 "진짜 친한 상대라도 100% 신뢰해선 안 된다. 98%로 해두라"는 대목. 그럼 나머지 2%는 뭘까. 불신일까. 아니다. 용서란다. 인간은 상대방을 완벽하게 신뢰할수록 상대방의 '잘못'에 더 크게 화나고 배신감을 느끼는 법.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상대방을 용서할 여지 2%를 남겨두라는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요즘 일본의 대미 외교가 이와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일본과 미국이 손잡고 만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깨고 나가도, TPP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도태평양 경제협의체(IPEF)를 바이든이 만들어도 일본은 그저 용서한다. 비난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그 안에 플레이어로 들어간다. 용서의 힘 2%는 신뢰의 힘 98%보다 더 강력해 보인다.

   
▲ 왼쪽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월 취임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부터)이 지난 5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 행사에서 참여국 정상의 발언을 듣고 있는 모습. [사진=중앙포토, AFP]

# 지난 주말 커트 캠벨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줌 대화에서 "30년 넘게 일본을 지켜봤지만, 요즘처럼 일본이 적극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이니셔티브를 행사하며 '접착제(glue)' 역할을 해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실제 일본 외교력은 경제력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인다. 중국에 경제력을 빼앗긴 대신 중국을 견제하는 외교력이 생겨났으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다만 이런 외교력이 한·일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좀 예외라는 게 문제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기시다 총리의 첫 만남 직후 일 외무성의 발표자료는 특이했다. "스페인 국왕 주최 만찬에서 기시다 총리는 슬로바키아 대통령과 단시간 인사를 나눴다(중략). 호주 총리와 단시간 인사를 나눴다(중략). 윤석열 한국 대통령과는 극히 단시간,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중략)." '단시간'과 '극히 단시간', '인사'와 '간단한 인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속 보이는 표현을 쓰는 게 과연 진짜 외교력일까, 신뢰나 용서의 마음이 담겨나 있을까.

# 우리도 일본만 탓할 일은 못 된다. 대일외교의 틀이 정치하지 못하다. 국립해양조사원의 독도 해양조사,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 모두 외교당국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뒷수습에 매달렸다. 그러다 한미일 공동기자회견이 '취소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미처 몰랐다"고 설명해도 일본은 믿질 않는다. 공격의 빌미를 준 셈이다. 대통령실이 됐건, 외교부가 됐건 이런 디테일을 통합 관리할 컨트롤타워가 절실하다. 인원도 확충해야 한다. 민감한 대일 외교를 불과 10명 내외의 외교부 아태 1과 외교관이 모두 떠맡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또 지금같이 사법부·행정부 따로 노는 헐렁한 시스템에선 언제 또다시 한·일 관계의 제2의, 제3의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 일본은 느리다.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 사장은 취임 후 67명의 상전(고문·상담역)을 정리하는 데만 무려 10년을 들였다. 창업가의 장손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런 나라다. 한국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자, 일본을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 들어섰으니 빨리빨리 속도 내며 바꿔보자"고 무작정 들이대도 저속가열, 저속냉각의 나라 일본 앞에서 우리의 실망치, 분노치만 높아질 뿐이다. 우리 혼자 서두른다고 한·일 관계가 획기적으로 뒤바뀔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한국 사람 만나선 "빨리 잘해보자"고 해 놓고, 뒤돌아선 "일본이 한 발짝도 양보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일본인이 아직은 대세란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매직은 없다'다. 서로의 간극을 메워나가는 다방면의 노력을 차곡차곡, 끊이지 말고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한·일 모두 서로에게 '98% 신뢰, 2% 용서'의 나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한미일 3국 정상이 지난달 29일 오후(현지 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이페마(IFEMA) 국제회의장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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