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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산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인재양성에 전 생애를 바쳐 온 재단법인 수림재단·수림문화재단 이사장 김희수 이사장의 고언(苦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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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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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한민국이 일제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지 100년이 되는 해이며,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이 땅에 동족상잔의 피
   
▲ 지난 해 6월 18일, 동경한국문화원 개원식.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왼쪽), 김희수 이사장]
비린내가 진동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35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받았던 고통과 3년이나 이어진 6·25전쟁 기간 동안 우리 국민이 당했던 아픔의 그 쓰라린 상처는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아직 채 아물지를 않았다.
20세기를 반추해 보면 100년 전 시퍼렇게 눈을 뜬 채로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그만큼 못 배우고 무지했기 때문이며, 60년 전 온 국토가 핏빛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그만큼 제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쓰라린 아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금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주리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배움의 결과이다.
평생 온갖 고생을 다해 모은 재산을 조국의 인재 양성과 교육 사업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으며 가난의 한, 배고픈 한, 차별 받은 한, 업신여김 받은 한, 조롱 받은 한, 마음대로 공부하지 못한 한, 나라를 잃은 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을 푸는 데 일생을 바쳐 온 전 중앙대 재단 이사장이자 현 수림재단?수림문화재단 김희수 이사장에게 그런 의미에서 금년 한 해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를 만나 조국과 역사와 교육에 관한 그의 고견을 들었다.

남에게 신세지지 말고 피해를 끼치지 말라

1924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셨는데 이사장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할아버지는 한학에 밝았던 강직한 분으로 조선 말기에 벼슬을 하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실직하신 상태였죠. 할머니는 개신교 초창기에 예수를 믿었어요. 마을에 유일한 교회였던 진동교회를 다니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셨어요. 어머니는 집안 살림밖에 모르는 그저 평범한 분이셨고요.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고생을 참 많이 하셨어요.

숙부님과 아버지께서 일본으로 가시게 된 이유는 뭔가요?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었으니까…… 그나마 가진 땅을 다 빼앗겼으니 겨우 군답 몇 마지기 빌려서 농사를 지어 봐야 어디 남는 게 있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자식들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 생각을 하신 거지요. 그래서 아직 혼인하지 않은 숙부님을 먼저 일본으로 공부하러 보내신 거예요. 그 뒤 아버지도 숙부님 뒤를 따라 일본으로 가셨지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가셨는데 떠날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할아버지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거예요. 저도 힘들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저를 부산까지 데려다 주셨고, 시모노세키까지 배는 저 혼자서 타고 갔습니다. 이별의 정이 참 대단했지요. 당장 내일부터 할아버지를 못 뵙게 된다고 하는 슬픔이 너무너무 컸어요.

할아버지께서 일본으로 혼자 떠나는 손자에게 특별히 해주신 말씀이 있었나요?
어딜 가든지 항상 남에게 신세지지 말고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평소에 늘 하시던 말씀이었죠. 아주 철저하셨어요.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렇게 나라 없는 백성, 식민지 신세가 된 것이 다 무지해서 그렇다, 배우지 못해 무식하니까 이런 꼴이 된 거다 하시면서 어찌됐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 배워야 산다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야만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가 나온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어려운 시절에도 숙부님이나 아버지, 형님, 저와 동생 모두를 공부시키신 거예요.

정말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살아 왔지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학교를 들어가셨나요?
물론이죠. 동경전기학교 전기과를 들어가서 배선, 송전, 발전 등 전기공학에 필요한 공부를 했어요. 졸업 후
   
에는 이런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다시 전기공업전문학교를 들어갔죠. 그러다가 나중에 동경전기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이런 저런 이유로 휴학을 참 많이 했었지요.

일본에서 해방을 맞으셨죠?
그렇지요.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으니 기쁜 마음이야 한이 없었지만 일본의 현실은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어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고, 또 연합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전쟁은 끝났지만 난리는 한동안 이어졌어요. 서로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아이고 뭐 혼란의 연속이었으니까……. 정말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살아 왔지요.

일제 말기에 이르러 강제징병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어떻게 피하셨나요?
일본에서 해방되기 전 해에 징병검사를 받았어요. 그 결과 제2을종 판정을 받았지요. 꼼짝없이 징병에 끌려갈 처지가 된 겁니다. 당시에는 이미 부산진에 있는 고사포 사령부로 입대하라는 징집영장까지 나와 있었어요. 아마 일주일만 늦게 해방이 되었어도 꼼짝없이 징병을 갔을 거예요. 그런데 해방이 되는 바람에 징병을 가지 않게 된 것이지요.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할 수 있어요. 형님은 전혀 관계가 없었어요. 나이가 많아서 징병대상이 아니었거든요.

해방되고 나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기운이 일었지요?
그래서 제가 건국추진위원회에 가서 한 1년 정도 일을 했었어요. 귀환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니까 그걸 질서를 잡고 통제하고 하는 일이 필요했거든요. 시모노세키 항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드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전부 배를 기다리면서 노숙을 하고, 길바닥에 마구 용변을 보고, 엉망이었지요. 배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배를 타려고 난리를 쳤어요. 기다리다 못해 작은 돛단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려던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파도에 배가 부서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 먼 바닷길을 작은 돛단배를 타고 건넌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무책임해요. 자기들 때문에 억지로 일본으로 건너와 살다가 겨우 해방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국 사람들을 일절 나 몰라라 했으니까 말이요.

거짓말 안 하는 정직한 한국인으로 살아 온 게 성공의 비결

그 무렵에 금정양품점을 시작하셨나요?

동경 시내 최고 번화가인 유락조(有樂町) 역 앞에서 스웨터나 블라우스, 셔츠, 바지, 양말, 스타킹 등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필요한 패션 용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도매로 가져다가 소매로 파는 일이었죠. 처음에는 종업원 두 명을 두고 시작을 했어요.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양품점 일을 했으니 굉장히 고단했지만 기쁨도 컸던 시절이었지요.

그 즈음에 한국에서는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조국에 전쟁이 났으니 빨리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중에 좀 안정이 되면 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아무튼……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일본으로서는 일대 호기였지요?
패전을 하고 모든 게 엉망이었던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6·25전쟁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모든 게 특수가 일어났으니까요. 미국의 군수품을 일본이 다 담당했거든요. 그걸 가지고서 비로소 일본 경제가 살아난 것이지요.

동경전기대학을 졸업하신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하셨죠?
형님이 전공을 살려서 어군탐지기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에 거기서 4~5년 정도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저는 제강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양품점 운영은 동생에게 맡겼지요. 전후에 복구사업이 본격화 되면 철강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은 지진이 많이 나는 나라라 내진 설계를 해서 건물을 지으니까 철강이 더 많이 들어가죠. 그런데 제강사업은 오래 하지를 못했고, 조금 하다가 매각한 다음 그 돈으로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많은 업종 중에 특별히 부동산사업에 진출하신 이유는 뭔가요?
부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물품들처럼 재생산을 할 수 없는 거지요. 전쟁으로 모든 것이 다 불타고 부서지고 망가졌으니 새로 건물을 짓고 학교를 짓고 회사도 만들어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건축을 해야 하니까 부동산사업이 전망이 밝다고 본 거예요.

1961년 긴자에 처음으로 금정빌딩을 세우셨지요?
긴자(銀座)는 동경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요지지요. 동경의 한 중심이에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금정 제1빌딩은 지하 2층 지상 6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죠. 어렵사리 지은 건물인데 처음에는 임대가 잘 되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어요.

그러면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른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시부야(澁谷)에 금정 제2빌딩을 지었는데 그게 인기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경험도 적고 해서 고전을 많이 했지만 제2빌딩부터는 아주 잘 됐지요.

다른 빌딩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유독 이사장님 빌딩들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관리가 철저했기 때문이죠. 그때는 여러 가지가 다 부족하던 시절이라 물이 안 나올 때도 있고, 전기가 끊어질 때도 있고, 가스가 안 통할 때도 있고, 냉난방이 제 때 공급이 안 될 때도 있었어요. 다른 빌딩에서는 그걸 고치려면 이틀이나 사흘 정도가 걸렸는데, 우리 빌딩에서는 사고가 나면 기술자들이 즉각 출동해서 바로 고쳤습니다. 입주자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신속하게 고장 난 부분을 고쳐 주니까 우리 빌딩에 입주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그때 저는 기술자들을 다 데리고 있었거든요.

이사장님께서 소유하셨던 빌딩이 전부 몇 개인가요?
중앙대학교를 인수하기 이전에는 스무 개 정도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대학을 인수한 이후에는 국내외 경제 여건과 사업 변화로 인해 다소 처분을 했습니다. 한창 사업이 번창할 때는 긴자, 시부야, 아사쿠사(浅草), 신주쿠(新宿) 등에 제 빌딩들이 다 들어서 있었지요. 전부 동경에서 가장 번화한 요지들이었어요. 그 많은 빌딩들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회사만 해도 다섯 개나 됐었으니까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크게 성공을 하셨는데 그 비결이 있다면 뭔가요?
거짓말 안 하는 겁니다. 엽전이라고 아시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불렀어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지요. ‘그래 나는 거짓말 안 하는 엽전이다’라고 말이에요. 거짓말을 안 하는 정직한 한국인이라는 말이죠. 이게 제 성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의 교육을 일으켜야 한다는 애국심과 사명감 하나로

사업이 승승장구하던 1987년에 중앙대를 인수하셨는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학교를 인수하기 1년 전쯤에 당시 임철순 재단 이사장이 동경으로 저를 찾아 왔어요. 그분은 중앙대 설립자인 임영신 여사의 조카였지요. 학교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때 중앙대가 안고 있던 부채가 700억 원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전부 다 합치면 1200억 원인가 그랬어요. 그걸 감당할 길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사채업자에게 학교를 담보로 해서 돈을 가져다 썼지요. 그러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학교를 처분하기로 마음먹고 저를 찾아왔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학교를 인수하셨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있었습니까?
군사정권 시절이라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벌이고…… 노조도 대단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유수한 역사를 가진 중앙대가 파산을 한다면 나라가 어찌 되겠나 싶었지요.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교육에 대한 꿈을 한번 펼쳐볼 때라고 생각하고 학교 인수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물론 저보다 더 훌륭하고 돈도 많은 기업이나 사업가들이 계셨지만 그때 누가 그 어렵고 힘든 대학 운영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아무도 나서질 않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학교 빚을 다 갚아 주셨나요?
물론이지요. 이게 학교 운영에 쓴 돈이냐, 아니면 개인적으로 쓴 돈이냐 정확하게 확인해서 지불을 했다면 돈이 훨씬 적게 나갔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냥 다 지불을 해줬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국의 교육을 일으켜야 한다는 애국심과 사명감만 있었지 한국의 교육 현실과 교육계의 풍토, 대학의 실제 상황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던 셈이지요.

22년 동안 대학을 운영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겠지만 기쁜 일도 많으셨지요?
그렇고말고요. 늘 괴롭기만 했다면 어떻게 그 긴 세월 학교를 운영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연구에 매진하는 교수들, 100년 가까이 된 학교의 저력, 나를 이해해 주는 동문들과 직원들…… 뭐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냈습니다.

학교 인수 이전과 지금의 중앙대학교를 비교해 보신다면 어떻습니까?
참으로 많이 달라졌지요. 병원도 지었고. 제가 조금 늦어졌기는 했지만 취임할 때 학생들에게 약속한 거는 다 지킨 셈이에요. 중앙대에 대한 사회의 평가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우리 민족이 온 인류를 환하게 비추는 위대한 빛이 될 것을 꿈꾸며

2년 전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나고자 결심하신 이유는 뭡니까?
중앙대에서 1년에 약 5000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됩니다. 저는 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열과 성을 다해 교육에 힘쓰면 언젠가는 그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반드시 나오리라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10년이 넘어도, 20년이 넘어도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대학 운영이라는 게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1980년대처럼 학교가 혼란스럽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더 많은 돈을 쏟아 붓고 학교를 발전시켜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는 그런 큰 기업이 학교 운영을 맞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마침 육영의지가 있는 대기업인 두산그룹으로 학교 운영을 넘기게 되었던 겁니다.

두산그룹으로 학교 재단을 넘기실 때 조건은 뭐였나요?
아무 조건이 없었어요. 부채도 없고 병원까지 다 지은 상태에서 넘겼으니까. 신문을 보니까 뭔가 다른 조건이 있는 것처럼 쓰고 있던데, 전혀 그런 게 없어요. 제가 운영하는 수림재단에 장학금으로 1200억 원을 출연한 게 전부에요. 수림재단은 공익성을 띤 장학 사업을 하는 곳이니까 제 개인에게 돈을 준 게 아닙니다. 저는 평생 모은 제 개인 재원을 다 쏟아 부어 학교를 발전시켰지만 물러날 때는 개인적으로 한 푼도 받지 않고 물러난 겁니다.

앞으로 이사장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수림재단과 수림문화재단을 통해 철저하게 연구에만 목적을 가진 사람을 지원하고 싶어요. 특히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적으로 도울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시오. 지도상을 봐서도 우리나라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사는 조그마한 나라 아닙니까? 사람 몸으로 비유하자면 맹장 정도나 될까요? 그런 존재 아니오? 그런 나라가 자기 글자를 가지고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우면서 몇 천 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참 대단한 저력을 가진 민족이에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그렇게 이어받은 우리의 정신이나 저력을 잊지 말고 발휘해야죠. 무지해서 당한 슬픈 역사가 잊지 않소?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배워야 해요. 교육밖에 없어요. 인재를 키워야 삽니다.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어요? 인재는 교육 아니오?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그런 불씨들이 하나 둘씩 모여 우리 민족을 일으키는 커다란 광채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는 우리 민족이 온 인류를 환하게 비추는 위대한 빛이 될 것을 꿈꾸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들이 아무리 강요를 했어도 절대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 것이지요.

작은 키에 흰 머리, 갸름한 눈매, 거칠고 뭉툭한 손, 느릿느릿한 말투, 그리고 오래된 양복. 그는 전철이나 길거리 어디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인이었다. 작지만 당당한 이 시대의 거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고난으로 점철된 한반도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고목의 태처럼 겹겹이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오래된 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조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 역사 앞에 겸손한 젊은이, 땀의 소중함을 느끼며 사는 청춘들이 바로 그가 피워낸 새싹과 꽃들이다.

그의 근검절약은 한국과 일본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중앙대 재단 이사장 시절에도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손수 가방을 들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할머니가 된 아내는 아직도 파출부나 가정부를 두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다. 지금도 일본 집에 가면 아내가 직접 끓여 준 된장찌개 한 그릇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넌지시 짓궂은 질문을 한번 던져 봤다. 그렇게 고생해서 돈을 모아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셨는데, 이제는 좀 비싼 것도 드시고, 좋은 옷도 사 입으시고, 마음껏 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보셨느냐고. 조용하지만 거침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절대 낭비는 안 하지요.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것은 뭐든지 실용적으로 삽니다. 좀 비싸도 좋은 것을 사서 오래도록 쓰는 게 곧 절약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은 형편없이 낭비가 심해요. 그래서 상대하기가 싫어요.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글/유승준 출판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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