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기자 

과거사에 일본보다는
우리 반성 담은
매우 짧은 3.1절 기념사
국민 공감 부를
내러티브 부족하지 않나

▲ 기념사 하는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1328자.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중 첫 3·1절 기념사 분량이다. 유례없이 짧다. 작년 8·15 광복절 경축사의 3분의 1을 조금 웃도는 분량이다. 짧아도 핵심만 담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핵심만 담아도 된다고 생각해 짧게 쓴 거라면 아쉽다. 이번 3.1절 기념사에는 사람들 사이에 내러티브가 될 만한 이야깃거리가 빠진 게 아닌가 싶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글을 썼다. “인간은 무릇 이야기꾼이다. 언제나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에 둘러싸여 살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런 이야기를 통해 본다. 때문에, 자기 삶조차 그 삶을 이야기하듯이 살아가려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분량을 늘리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세상을 해석할 창이 될 만한 내러티브 거리를 넣는 노력을 해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 김인수 기자

이번 기념사의 또 다른 특징은 과거사 언급 부분이다. 통상 3·1절 기념사는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빠졌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자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사실 구한말 중국 중심의 사고에 빠져 세계의 격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와중에 내부 권력 다툼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라를 잃은 일차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이에 대한 언급 없이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은 건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이 그렇게 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백번 옳은 얘기이기는 하다. 한일 간 과거사 다툼에 현재와 미래가 심각하게 발목 잡힌 게 사실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은 수출 규제로 보복했다. 양국 관계 악화로 중국의 패권 위협과 북핵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어렵다.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양국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대통령의 의중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내러티브가 3·1절 기념사에 충분히 있느냐는 것이다. 굳이 찾는다고 하면 다음 두 대목 정도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옳은 얘기다. 동의한다. 하지만 국민들의 두뇌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판단과 행동과 영향을 줄 만한 내러티브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공황이 최악이던 1933년 미국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유명한 취임사가 기억이 난다. “먼저, 저의 확고한 믿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이름도 없고, 비합리적이며, 후퇴를 전진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키는 근거 없는 공포 말입니다.” 그는 이후 유명한 노변담화에서 “국민 여러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소문과 의혹에 선동되어 은행으로 달려가지 마십시오. 모두가 합심하여 공포를 떨쳐냅시다”라고 했다. 그의 연설은 국민 사이에 내러티브가 되면서 대공황 극복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됐다.

국민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행동을 바꾸고 싶다면 대통령은 내러티브가 될 이야깃거리를 창조해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외교 전문가들 사이의 소통이라면 핵심만 담은 짧은 글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국민은 그 이상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