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경 / 도쿄 가쿠게이대학 교수 ]
 

(1) 한일을 이어주는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기원

▲ 일본 단가 시인 손호연 여사

2005년 3월 역사교과서 문제와 독도 문제 때문에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일본의 ‘한일 우정의 해’도 시종 가라앉은 분위기였으며, 한일관계는 그야말로 험악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1일, 서울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실질적인 회담의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하네다(羽田)와 김포간의 비행기를 기존의 4편에서 8편으로 증편한다는 약속과 함께, 한국에서 단가(短歌: 5ㆍ7ㆍ5ㆍ7ㆍ7의 5구 31음으로 읊는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애호하여 즐겨 읊은 인물이 소개되어 주목을 받았다. 한ㆍ일정상회담 후 이루어진 기자회견에서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수상은 한ㆍ일 양국의 우호 증진을 기원하는 단가 한 수를 소개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切実な 望みが-つ吾れにあり 諍いのなき 国と国なれ”
(절실한 바람이 하나 내게 있으니 싸움이 없는 나라와 나라 되기를)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한류문화조차도 부정적인 비판론이 드리우는 가운데 일본과의 역사문제에 이견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어떻게든 조율해 보려는 고이즈미 수상이 한ㆍ일 양국의 분쟁 없는 미래를 제한하는 메시지로서 이 ‘단가’를 소개한 것이다. 이 시를 읊은 이는 매년 1월에 일본 왕궁에서 열리는 우타카이 하지메(歌會始 : 1998년 1월 14일에 개최된 신녀 궁중 단가 낭송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배청자로 초대된 손호연(孫戶姸)이었다. 천성적으로 풍부한 감성을 지니며 단가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인 그녀는 1955년 이래 작품집으로 『歌集(가집) 무궁화』(講談社) 제5집까지 발간했다.
또, 일본의 저명한 단가 시인들만이 수록되는 작품집으로 유명한 『쇼와(昭和)만요슈(万葉集)』에도 5수가 수록될 정도로 그 작품성은 ‘단가’세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이면서 단가를 애호하고 일본 왕실의 연례 의식까지 참석하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래 일본에 대한 역사 청산과 자성을 촉구하는 한국 땅에서 살아온 그녀가 ‘단가’를 읊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민족이나 역사적 관점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을 뛰어넘어 인간관계와 뼈아픈 전쟁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 갖는 공통된 인식으로,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그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1자의 짧은 어구 속에 삼라만상을 포현하며 살아 있는 것의 소중함을 노래하고자 한 평화에의 간절한 마음을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손호연과 ‘단가’
손호연은 1923년 10월 15일, 와세다(早稻田) 대학의 법과에 유학 중이던 아버지 손홍구(孫洪九)와 어머니 장복순(張福順)의 장녀로서 도쿄의 와세다 대학교 근처에서 태어났다. ‘호연(戶姸)’이란 이름은 도쿄의 중심을 흐르는 에도가와 강과 관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당시 혹독한 식민지 시대였던 상황을 생각했을 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유가 있었던 가계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친과 함께 귀국한 손호연은 중일 전쟁의 이듬해인 1938년에 진명여학교에 진학한다. 재학 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총력전에 돌입하고, 조선어 금지, 조선의 민간지 폐간, 창씨개명, 군대 징용과 학도병 출진을 강요한다. 그러나 같은 조선 안에서도 소위 ‘가진 자’의 부류에 속해 있던 손호연은 17세 때 이방자 여사의 장학금을 받아서 일본의 제국여자 전문학교(현재 사가미(相模)여자 대학의 전신)에 유학하게 된다. 그리고 고우키료(鴻嬉寮 : 조선 왕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조선의 여자 유학생 기숙사)에서 맨 처음 스승이 될 마스토미 테루코(升富照子)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마스토미 테루코는 후쿠오카에이와 여학원의 영어학과를 졸업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바로 전라북도 김제에서 마스토미 농장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립 오산(吳山)학교(현, 고창 중고등학교)의 설립에 힘을 기울인 마스토미 인자에몬이다.

그런 한국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손호연과 만남은 전쟁 후에도 계속되었고, 손호연의 단가 스승의 한 사람인 마스토미 테루코를 한ㆍ일 정상화를 반대하는 반일 데모가 계속되는 1964년에 한국으로 초대한다. 1944년 일본의 총력전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농장에서 철수했던 까닭에, 남편의 마스토미 인자에몬의 생전에는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스토미 농장은 그녀가 가슴 한쪽에 계속 품고 있던 추억의 장소였다. 당시로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도 서울을 출발하여 고창까지 안내하는 등 그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인연의 끈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3) 만남과 ‘단가’의 생애
손호연에게는 생애 ‘단가’의 스승이 세 사람 있었다. 맨 처음 스승은 마스토미 테루코였다. 그녀는 ‘단가’의 매력과 함께 인간적인 따뜻함으로 대해 주었던 유학시대의 귀중한 만남이기도 했다.
그리고 1943년 12월 24일 마스토미 테루코의 ‘단가’의 스승이면서 제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信綱)와의 만남으로 두 번째 스승을 얻게 된다. 당시 ‘단가’세계에서 최고봉이었던 사사키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손호연은 본격적인 가도(歌道)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스승이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 : 현재 교토시립미술대 총장, 나라현립 만요 문화관 관장)이다. 나카니시는 일본에 남아 있는 만요슈 중 많은 노래가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며, 손호연에게 백제의 후예로서 열심히 단가를 짓도록 격려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나카니시를 통해서 단가 세계에서의 인맥을 넓힐 수 있었다. 손호연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카니시를 포함한 많은 일본의 관계자들이 2005년 9월 13일의 ‘손호연 다큐멘터리 시사회’에 참석하여 그녀의 생애를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1997년 6월 1일에는 일본 북쪽 지방의 아오모리켄(靑森縣) 롯카쇼무라에 손호연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한국과 아오모리켄의 민간인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손호연은 2003년에 80세의 생애를 마쳤지만, 정부는 그녀의 평화를 위한 노력과 문화적 공로를 인정하여 ‘화관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외무대신으로부터 표창을 받아 한ㆍ일 양국에서 손호연의 문화 교류를 기렸다. 그녀가 60년을 통해 읊은 노래는 약 2,000수에 이른다.

심한 반일 운동에도 굴하지 않고 양국의 평화를 기원한 자신의 뜻을 ‘단가’에 함축시키며 미래를 향한 메시지로 승화시켰던 손호연의 자세는 일부 매스컴이나 정치가의 선정적인 구호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운 우리들에게 시사 한 바가 크다.
한ㆍ일 친선이나 세계평화를 읊은 많은 노래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게 비춰 줄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