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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헌신한 안중근 의사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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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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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철/ 칼럼니스트 ·본지 객원논설위원

   
 

안중군 의사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계몽 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사상가,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배웠다. 또한 그는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를 처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일본 관동도독부의 뤼순감 옥에 수감되고 여순 일본관동법원에서 6차의 공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사형집행을 통해 순국하였다.

   
▲ 안중근 의사 순국 당시의 뤼순감옥.

안중근 의사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했다가 국내에서 실력양성이 중요하다는 선교사의 충고로 귀국했다. 그는 돈의학교, 삼흥학교와 지정여학교를 설립하고, 연해주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각종 모임을 만들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으로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 안중근 의사 순국 장소인 다롄의 뤼순감옥 터에 건립된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박물관.

안중근 의사와 관련한 연구, 논문, 책, 드라마, 뮤지컬, 그와 관련한 각종 단체가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안중근의 혈족 가운데 15명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 집안이다. 물론 안중근 의사 순국 뒤 이산과 유랑을 거듭했던 가족들의 행적을 보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처럼 민족반역자로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안중근 의사의 교육관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양반가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문에 능했을 뿐 아니라 서예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뤼순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기면서 넷째 손가락이 잘린 자신의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낙관 삼아 찍었는데, 이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국가지정유산 보물 제569-2호인 유묵(遺墨)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글(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이다. 현재 이것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안중근 의사가 쓴 유묵.

이 유묵은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일괄 지정된 이 작품들은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장렬한 최후를 눈앞에 둔 독립투사가 우리 후손들에게 공부를 해야 강해진다는 충혼을 담은 말로 평가되고 있다. ‘구중형극’은 조선시대 초학 교재 추구(推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추구’는 어린이가 읽을 수 있도록 지은 한 구가 다섯 글자,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시다. 예를 들면, ‘천고일월명(天高日月明) 지후초목생(地厚草木生)’, 즉 ‘하늘이 높으니 해와 달이 밝고 땅이 두터우니 풀과 나무가 자라도다’ 식의 글이다. 이 책은 역대의 한시(漢詩)에서 좋은 시구를 가려 뽑고 그것을 엮었기 때문에 ‘추구(抽句)’라고도 한다.

안중근 의사의 또 다른 교육 사업에 큰 관심을 갖는 부분이 있다. 1900년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 설립된 진남포 천주교회(본당)는 1897년 진남포의 개항과 함께 빌렘 신부가 설치한 공소(公所)에서 발전하였다.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 선교사 포리(Faurie) 신부가 본당 설립과 동시에 초등교육 기관으로 돈의학교를 부설로 운영했다. 1905년을 전후하여 안중근은 중국 상해에서 르각(Le Gac) 신부로부터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듣고, 교육을 통한 구국계몽(救國啓蒙) 활동에 투신할 뜻으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였다. 1906년 3월 안중근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집단 이주하면서, 곧바로 가산(家産)을 기울여 진남포 지역의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안중근은 돈의학교와 야학교였던 삼흥학교(三興學校)의 주요한 교무를 전담하면서 경비를 부담해 두 학교는 다시 활로를 찾았고, 돈의학교는 사실상 재설립되었다. 안중근 교장은 교사를 증축하고 교원을 증원하는 한편 생도를 널리 뽑아 특히 목총과 나팔과 북 등을 사용하면서 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교련(敎鍊) 과목을 중점적으로 이수하게 했다. 그 결과 1908년 9월 15일 개최된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 도(道)의 80여 개 학교에서 온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운동회에서 3등을 차지하는 우수한 성과를 올렸다. 안중근 형제들은 돈의학교를 증축하여 보다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여 재학생만 약3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를 신설하여 진남포 지역 여성교육을 시작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르각(Le Gac) 신부.

이와 같은 학교설립을 통합 교육 사업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가지 중 교육과 관련한 사항은 여덟째와 열 번째로 각각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와 한국청년들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 설립목적을 ‘국흥(國興)' '민흥(民興)' '사흥(士興)'으로 정하고 교육구국을 위해 헌신했다. 이 중 사흥(士興)은 선비를 흥성케 하자는 것이다. 그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고, 학자·지식인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향상을 위해 학교 교육과 사회계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2012년 삼흥학교를 방문했을 때 이 학교 교명은 남흥중학으로 변경했지만 학교 연혁에 제1대 교장에 안중근이라고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교육계몽 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 사상가, 평화주의자로 살아온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업적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할 무궁무진한 자산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책, 영화, 춤, 뮤지컬, 방송 등 문화가 훨씬 더 안중근 의사를 이해하기 쉽게 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는 이와 같은 문화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교육적인 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요인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 안중근 의사의 교육 사상 및 업적과 관련한 내용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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