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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선거는 ‘1994년 중간선거 닮은 꼴’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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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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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석 / KAVC(한인유권자센터) 상임이사 ]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에 이어서 아버지 부시가 백악관을 차지함으로써 미국 대통령의 자리는 아예, 공화당의 것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1992년 대선전을 앞두고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걸프전을 완벽한 승리로 이끈 인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백악관은 다시 공화당의 것이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민주당이 의회를 완전하게 주도하면서도 대통령직엔 연전연패하는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내질 못하고 있었다. 아칸소 주지사인 클린턴은 민주당내 소장파들을 민주지도자위원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로 모아서 당을 쇄신하면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72년의 ‘조지 맥거번’이 사람을 쇄신했다면 1992년 클린턴은 정책을 쇄신했다. 대선전의 유권자수는 중남부가 다수임을 겨냥해서 민주당의 리버럴한 이미지를 바꾼 것이다.

우파보다 더 우파의 정책을, 좌파보다 더 좌파의 정책을 오가면서 국민이 원하는 사안이라면 당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전략이었다. 클린턴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경쟁자인 아버지 부시를 전쟁영웅으로 추켜세우면서 동시에 ‘전쟁의 시대는 갔다’란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아버지 부시는 미국의 영웅이지만, 대통령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눈치 채지 못하게 유포시켰다. 클린턴은 경쟁자인 아버지 부시대통령을 명예롭게 퇴진시키고 대통령에 선출됐다. 명단에도 없었던 시골뜨기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배경이다.>

1992년, 백악관에 입성한 클린턴은 자신만만했다. 선거도, 여론조사도, 정책도, 인사도..., 모든 것을 주도했다. 그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은 한발 더 나갔다. 그녀는 대통령취임 초반의 막강한 권력으로 큰 것을 성사시키면 그 외의 사소한 아젠 다는 자동으로 굴러갈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녀는 큰 것으로 “의료개혁안”을 선택했다. 목숨 건 반대파가 있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크게 싸우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렇지만 성공하면 역사적인 성취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고 , 오히려 크게 싸울수록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정부의 목표는 전 국민의료보험이다’라고 선언하도록 했다. 그녀(힐러리 클린턴)는 의료개혁안을 홍보하기 위해서 홍보용 대형버스를 타고 전국일주에 나섰으며, 의회는 정부의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상하원 내 모든 계파는 덜 관료적이며 보다 자율적인 개혁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대통령도 영부인도 처음엔 이러한 분위기에 무척 고무 받았지만 논의가 활발해 질수록 정치계파들은 클린턴의 거대한 개혁안을 제각각의 입맛에 맞게 잘라내고 덧붙이면서 의료 개혁안을 둘러싼 분위기는 엉성하고 급한 거래가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었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감정반응을 자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이 갈수록 강경행보를 계속했다.

8월, 휴가를 맞아 의원들이 각기 지역에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때에 힐러리는 작정한 듯 공화당의 정치적 기회주의를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의료개혁안을 반대하는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선거전에서 반대파를 두 배로 부풀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9월26일에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인 조지 미첼은 공식적으로 ‘ 의료개혁안을 의회에 성정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빌 클린턴 정부의 목표인 의료개혁안이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백악관이 의료개혁안을 거의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동안 공화당의 전략가들은 그것이 멈추지 않도록 숨죽이면서 얌전한 캠페인을 유지했다. 공화당 전략가들은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빌 클린턴이 세금을 올려서 방만한 정부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군대에서 동성애를 허용하는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수준의 캠페인을 유지했다.

전통적인 공화당 정책에 충실함을 유지했다. 9월에 접어들어서야 공화당은 본격적인 캠페인에 돌입했다. 두 달 동안의 집중적인 전략 캠페인으로 의회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캠페인 책임자는 [퉁명하고 무뚝뚝한, 그렇지만 가장 솔직한 정치인] '뉴트 깅리치'였다. 그는 의사당 계단에서 그 유명한 소위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을 발표했다.

뉴트 깅리치가 고안한 이 계약은 균형예산 달성. 자본소득세 인하. 규제완화. 의원의 재선 횟수 제한 등을 비롯한 10가지 입법목표를 담고 있었다. 뉴트 깅리치의 이 ‘미국과의 계약’은 공화당계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참여를 자극했고 중간 선거를 반 클린턴 국민투표로 만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11월8일 워싱턴포스트지의 전면 토픽은 관저의 식당에 앉아서 TV로 우울한 선거결과를 지켜보는 클린턴 대통령부부의 사진이었다.

2010년. 7월을(워싱턴의 전반기) 마무리하는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는 11월의 중간선거전이다. 이번 선거는 ‘1994년 중간선거 재판’이란 이야기가 의원들의 합창이다. 민주당의 목표는 지면서 이기는 선거(의석을 잃어도 다수당을 유지하는 목표)이고 공화당의 확신은 “1994년 재현”이다.

민주당의 쇄신은 풀뿌리 조직인 ‘무브온’이 주도하지만 미약하다. 공화당의 선거는 ‘티파티’라는 조직이 공격적이지만 1994년의 전략에 비해서 지나치게 당파적이다. 만나는 의원이나 보좌관들은 지역민심(한인유권자)을 캐어 물어온다. 유권자센터 15년 중에 요즘처럼 신나본 적이 기억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전엔 만나기조차 거의 불가능했던 거물들이 아닌가? 통쾌하다고 하면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일까?

한인유권자센터 인턴들의 의회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40여명의 학생들이 지역의원 워싱턴 사무실을 방문했다. 선거철인 만큼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월요일이라 의회가 텅 비어있는 상황임에도 인턴학생들의 의사당 앞의 기자회견장에 현직거물이 달려 나왔다. 만 50여 일 동안 길거리에서 조사한 시민들의 현안을 의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매년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에 인턴학생들이 의원들에게 2007년 일본군위안부결의안 의회 통과 이후 일본은 아무런 대꾸가 없음을 직접 묻고 따졌다. 외교위내 양당의 의원들은 결의안 3년을 맞이해서 일본정부의 결의안 이행을 촉구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겠다고 학생들과 약속했다. 그제야 워싱턴 특파원들이 달려 나왔다. 민감하게 작동하는 미국의 풀뿌리(Grassroots) 정치력을 함께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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