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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북방 할머니 이야기
안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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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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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4년 전 청진항을 떠나 사할린에 거주하며 애달프고 가슴 아픈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한 한인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한 사할린 하바로브스크 한인소식지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 편집자 주 )


청진항을 떠난 64년의 세월, 한 맺힌 사할린 한인 할머니 이야기

   
▲ 김복례 할머니
김복례 할머니는 1928년 경북 달성군(현 대구시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성순이, 1895년생)는 상주에서 시집을 왔고, 달성에서 단란하게 살았던 아버지(김운오, 1885년생)는 사업 확장으로 1933년 청진에 이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그칠 줄 모르고 순항을 탔다. 아버지는 주로 들기름, 참기름을 짜서 한국, 일본, 중국으로 보내며 청진에서 기름집 김영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중국 산지에서 가져온 재료는 청진 공장에서 가공되어 기름으로 만들어졌고 기름은 조선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팔려나갔다.

공장 안은 기계소리가 요란했고 수증기가 자욱한 실내 안은 사람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막 기계에서 나온 뜨끈한 깨는 고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깨는 동물사료로도 쓰였고, 완성품 기름은 손이 모자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때 태어난 할머니는 복을 타고 났다하여 이름을 복례라고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업은 할머니가 태어나고서부터 더욱 잘 풀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4살 되던 해 달성의 가족들은 공장이 있는 북한 청진으로 향했다. 청진에서 단란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던 가족은 어느 날 아버지의 고향 사람이 다녀간 후로 어머니가 앓기 시작했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사연인즉 그 고향사람에게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차용증 없이 빌려주었는데, 그 사람은 일본군과 소련군의 전쟁을 틈타 가족까지 버리고 남한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어머니는 돈을 빌려 간 아버지의 고향 사람에게 돈을 돌려받으러 갔다가 ‘돈을 빌려간 적이 없었다.’고 잡아떼는 그의 말에 화병이 났고 급기야 혈관이 터지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팔도와 중국 등 내로라하는 의사들까지 왕진해 치료를 했지만 병은 고치지지 안았다. 결국 12칸의 기와집과 집안의 재산은 풍진박산이 나게 되었다.

1945년 소련군의 진입으로 일본인을 쫒아내는 사변 속에 가족들은 토굴로 대비하였지만 온전치 못한 어머니는 집을 지키겠다며 조카와 남게 되었다. 결국 소련군은 어머니의 횡성설수에 일본인 줄 알고 총을 쏘아 죽였다. 총알이 왼쪽 젖가슴을 가르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관통했는데, 한쪽 젖가슴은 흔적도 없이 날아 가버렸다.

1948년 북한정권이 들어서자 소련으로 가고자 하는 북한 파견근로자는 줄을 이었다. 김복례 할머니역시 1947년에 남편 박정섭(작고, 91세)을 따라 사할린에 왔다. 물론 김복례 할머니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북한정부의 정식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파견됐던 것이다.

애초 할머니 가족들은 광복이후 남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소련군의 진출과 6.25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와 가족들은 고향에 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가세가 기우는 집안을 일으키고, 남편의 도박벽을 고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런 연유로 할머니는 남편을 설득해 사할린으로 따라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혹여 라도 사할린에 가면 남편의 도박벽이 고쳐질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1947년 사할린 파견근로자로 등록되어 오늘까지 사할린 비찌리치에 살고 있다. 최초 북한 파견근로자는 1946년부터이며 할머니는 그 다음해 파견되었다.

홈스크에 첫발을 디딘 날, 어업기지에는 아직도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 일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인과 일본인이 어울리며 바다에 나가 대구와 청어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홈스크는 글자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해산물은 또 어찌나 많은지 해안가로 가서 곰보, 미역 등을 건져 반찬에 사용했고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1947년 청진항에서 출발해 사할린 네벨스크 항에 도착해 홈스크로 남편과 배속되었다. 홈스크에서 4년 정도 어업기지에 종사하다 비찌리치 브란스끼 목재소에 옮겨와 오늘까지 행정구역인 홈스크 비찌리치(27인 한인 피살지 근처) 마을에서 살고 있다.

브란스끼 산판(벌목공의 일터)에서의 생활은 전쟁터와 같았다. 그곳은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와 대륙에서 온 한인들도 있었고 사할린한인들도 부대끼며 살았다. 산판까지는 마을에서 70리 거리에 있었고 중간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산 속을 걸어서 산판에 도달하게 되었다.

가다가 오르면 예사로 곰을 목격하기도 하고 이틀을 꼬박 걸어서 갔다. 대부분 벌목공들인 한인들은 월급날이면 막걸리와 도박에 매달렸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귀한 시기이어서 한인들은 일상의 전부를 일과 잠깐의 노름에 의존하기 일쑤였다.

남편은 홈스크 함바(노동자 숙소)에서 노름에 손을 댔다. 사할린에 오면 그나마 고쳐질 줄 알았던 손버릇은 이곳까지 와서도 고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노름으로 평생을 보냈다.

산판에서 내려온 할머니는 1951년 비찌리치에다 살림살이와 집을 마련했다. 노름꾼인 남편은 돈이 떨어지면 술에 취해 집으로 귀가하곤 했다. 가끔 보는 남편은 손버릇에다 술주정까지 심해 그가 집에 오는 날이면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술에 취한 남편은 손찌검과 잠을 자지 않고 투덜대는 버릇이 있어 아예 남편의 목소리가 동구에서 들려오면 아이들을 들쳐 입고 밖으로 대피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남편이 다녀가기만 하면 임신되었다. 자연히 아이들은 늘어났고 살기는 더욱 힘들었다. 한해마다 줄줄이 아이들이 생겨났다. 두 아이는 낙태하고 나머지 육남매는 무럭무럭 자랐다. 육남매 중 5남 2녀가 남편이 없는 자리를 메우며 밭일이며 가축 일까지 도맡으며 일손을 거들었다.

그런 가운데 할머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981년도 사할린 도시의 대부분이 홍수를 맞았다. 유주노사할린스크 근교 마을인 아니봐는 집이 떠내려가고 홈스크를 비롯해 많은 마을이 홍수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비찌리치 마을에 속하는 할머니 집은 천만다행으로 피해가 없었다. 당연히 홍수피해로 농작물이 귀했다. 그해 할머니는 감자농사 외에도 오이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풍작을 거두었고 농산물을 사려는 업자들이 줄을 섰다. 소매상뿐 아니라 도매상들이 앞 다투어 오이를 사갔다.

오이를 판 돈은 소련공산권 시절에는 인민들이 좀체 만져보긴 힘든 거액에 달했다. 갑작스레 할머니는 돈을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이에 마을사람들은 이상한 소문까지 내기 시작할 정도이었다. 저녁이면 돈을 잃을까 베게 밑에다 창고 구들장에다 묻었다.

그 돈으로 할머니는 생존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자동차를 선물했다. 홈스크 시내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죽자고 고생한 끝에, 한 많고 기구한 삶 속에서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타조와 말, 소, 돼지, 토끼 등 많은 가축과 농사 일로 잠깐 부를 이룬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가슴에 묻은 아들 삼남매 이야기가 있다. 장손과 차례로 둘을 잃은 할머니는 1951년 북한정부의 복귀통보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북녘 가족 품도 중요하지만 이미 자식들이 생겼고 고향이 남한이었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 북한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모국방문으로 4번을 다녀왔다. 당시 북한정부의 복귀통보로 파견근로자들이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인민의 천국인 조국으로’라며 북한정부는 근로자들을 불러들였고 대학진학에서 생활보장까지 한다며 선동했다.

당시는 무국적자가 많았고 이래저래 살기 힘든 상황에서 대학진학이란 꿈같은 이야기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선 이후에도 한차례 더 사할린 한인들을 마구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 꾐에 속아 많은 사할린 한인 젊은이들이 북한으로 귀향했다.

북한행을 결심한 가족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인민의 천국이 아니고 지옥에 사는 형제들을 보러가는 모국방문 길에는 선물과 생필품 등을 한보따리씩 짊어지고 달러를 가지고 가야만 했다.

결국 두 자식 때문에 가지 못한 할머니는 남편의 버림과 도박벽이 더 무서웠어도 소박하지만 농사짓고 아이들과 살길 원했다. 남편은 북한으로 가겠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장남(1949년생)을 위해 사할린에 남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할머니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입할 당시 어머니를 잃었고 공산당 지배 속에 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사는 것이 마음이 더 편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좋은 세상이 돌아오면 큰아들 손잡고 태어난 고향이라도 가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할머니 생각은 만 가지 잡념에 사로잡혔다. 북에 남은 형제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싶어 형제와 아이들을 두고 저울질하기도 했다.

사할린 생활은 한편의 드라마보다 더 슬프고 애달픈 것이었다. 장남은 효가 남달랐으며 늘 엄마 곁에서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다했다. 허나 17세 접어든 시기 심장병으로 요절했다. 둘째도 19세 나이에 사할린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머리 동상으로 먼저 보냈다.

그리고 셋째는 그런 형들을 기억하다 우울증으로 마약에 손을 대었고 같은 중독자에게서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분심에 총에 맞아 죽었다. 우울증과 마약을 제외하고는 유독 심성이 착한 셋째는 할머니에게 특히 장한 아들로 기억되었다. 물론 집안일이며 대소사 일을 다 맡으며 어머니를 보살폈는데 아이 둘 낳고부터 우울증이 오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셋째는 힘이 장사이여서 운동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동네에서뿐 아니라 홈스크에서도 그를 초빙할 정도로 이름난 장사이어서 지역 마피아도 그를 건들지 못했다. 그런 그가 총에 맞아 죽을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은 친구가 셋째 아들이 잠든 사이 이마에 총을 쏜 것이다.

그도 가장 친구이었는데 마약을 투여한 상태였다. 당시는 마피아가 성행한 시절이었다. 특히 러시아마피아에게 걸려들면 예사로 목숨을 잃었다. 주변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불량한 한인들이 사라지곤 했다. 바로 보복성 살인 때문이었다.

셋째를 죽인 한인 부모는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할머니는 또다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이웃인 부모를 용서하고 화해했다. 35살에 죽은 셋째아들을 가슴에 묻고 할머니는 풀밭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노름꾼인 남편을 따라 사할린에 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살아왔는데 멀쩡한 세 자식까지 가슴에 묻었다. 소(少) 시절 적에는 동네사람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고 고향의 향수를 읊어 줄 노래 가락을 주문할 정도로 소리가 뛰어났고, 온 동네 초상을 부탁해도 싫은 내색 없이 도맡아 의사로 칭할 만큼 인기가 좋았던 인심 풍족한 할머니였다.

할머니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한인 및 파견근로자들이 산판에서 내려오면 할머니 집에서 망향의 한을 달래는 안식처이었다. 할머니가 지어준 막걸리 한 사발과 국수로 허기를 채웠고 서러움을 달랬다.

사할린의 삶은 남편의 세월과 견딜 수 없는 인고의 세월과 같았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자식들과 북에 두고 온 형제들 때문이다. 남한을 가지 못하고 죽은 부모님과 살아있을 형제들이 아른거려서 영주귀국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직도 소련국적을 받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아있는 할머니의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현재 사할린에 있는 1세한인들 중에는 지방으로 갈수록 무국적자가 많다. 영주귀국이 시작되던 처음 해는 무국적자도 영주귀국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영주귀국을 하지 않은 한인1세 대부분이 이 케이스로 주저앉은 경우이다. 변방의 1세 노인들은 가난할지라도 자식과 함께 남기를 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효와 자식사랑의 지극정성이 특별하다.

요즘 할머니에게도 고민이 많다. 팔십을 넘기고는 북녘 형제들의 안부가 항상 궁금하다. “마음대로 소식을 전할 수도 없고 보지도 못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남쪽 고향이나 한번 가 볼 걸”하는 후회도 있지만, “죽을 때 다되어서 남쪽에 간들 무슨 소용이겠냐”며 가슴에 묻은 자식과 북에 있는 형제들이 보고 싶어 밤잠을 설치며 눈물을 훔친다. “무국적자라도 한국으로의 모국방문은 가능할 텐데…….”하며 속삭이는 할머니의 속마음이 애처롭다.


[ 글 : 안톤 조 (조성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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