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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그들의 현주소
정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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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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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원 / 브라질이민사 편찬위원장 ]


대한민국 땅에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올해로 57년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온 전화(戰禍)의 상처가 지상에는 말끔히 가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전쟁의 상처가 발견되는 곳은 지하에 폭발물이 아직까지 묻혀 있어 인근 주민을 긴장시키는 정도다. 폭발물들도 수명이 다 되 폭발위험이 낮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가장 큰 변화는 경제성장이다. 휴전협정이 성립되던 1953년을 지나 1960년 초만 해도 국민소득(GNP)이 82달러였다. 그때 지금의 가난한 국가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방글라데시가 320달러, 북한이 300달러였으며 식모수출국으로 전락한 필리핀이 800달러였다.
이러한 한국의 GNP가 2만 달러를 넘어섰고 몇 년 내로 3만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선진국인 G20의장국으로까지 위상이 상승해 온 세계가 선망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그 이름도 생소한 반공포로 발생에 대해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이 있었다. 휴전협정이 되기 전 반공포로를 먼저 석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이승만대통령이 기지를 발휘하여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조인이 있었다. 그들 중에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도 있었다. 이민국 76명과 중공군 12명이 그들이며 그들은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에 의해서 중립국 송환위원회(인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의 범위내의 국가를 선택하게 되어 결국 중립국을 택한 반공포로들은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들이 제3국을 택한 것은 남한 땅에는 연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인척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국군이 북한 땅에 밀고 들어갔다가 후퇴할 때 남한 땅에 부모형제들이 하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취한결단이었다. 항간에 이런 말들이 있다. 진정 반공이라면 남한 땅에 남아야지 반공포로가 제삼국을 택한 것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공산당이 싫고 공산정권이 싫어서였다. 부모 형제가 없는 남한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공포’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하는 오기심이 발동하는 20대 초반의 그들이 만들어낸 중립국 선택이었다. 그들은 1954년 2월 8일 인도군과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동월 22일 인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도에 있는 동안 UN으로부터 한 달에 50루피의 생활급(당시 인도 최저 임금의 2배)을 지급 받으며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스위스 등지로 가기를 희망했으나 가지 못하고 멕시코와 브라질이 그들을 받아 주기로 했던 것이다. 멕시코에서는 수속이 늦어져 브라질로 오게 됐다. 반공포로 88명중 2명은 북한으로 돌아갔으나 총살을 당했다. 나머지 86명중 55명이 브라질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그 56명 중에는 중공군 출신이 5명 있었다.

그들이 뉴델리를 출발한 것이 1956년 2월 4일 카이로와 런던을 경유, 브라질 히오데자네리로에 2월 6일 도착해 신분을 표시하는 ‘무국적’ 증명서를 발급받고 그들이 머물 ‘일랴다스폴로레스(섬)’수용소에 배치됐다. 그해 2월 7일 ‘빼울리스따’ 신문은 ‘북한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이 히오에 도착하므로 앞으로 고려인회가 강화될 것이다.’라는 예측기사가 나왔다.

그들이 브라질에 도착하기까지 그들은 무국적자로서의 삶과 반공포로가 되기까지의 선택과정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택했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북파 포로들이 반공포로들을 하루 저녁에도 몇 명씩을 죽여 내무반에 땅을 파고 묻어 버리는 잔혹한 살인사건이 연일 발생했다. 친북파 포로들이 수적으로 워낙 많기 때문에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들도 수용소 안에 들어가 거닐 수도 없이 수용소 말기의 협상은 무법천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반공포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담보로한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런 그들의 현주소는 너무나 비참하다. 한국의 원호규정에는 적군이라도 귀순한 사람은 원호대상이 될 수가 있어도 반공포로는 원호대상이 되지 않는다. 규정에는 반공포로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필자가 직접 목격한 일이다. ‘아시아 태평양 회의’ 참석차 페루에 오게 된 이명박 대통령이 브라질에 들렸을 때 교포만찬회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반공포로 모임의 회장이며 독립유공자 가족인 임관택옹이 대통령 자리에 합석해 있다가 반공포로자들의 애로사항을 적은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쪽지를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법규에 해당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위정자들의 무성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혀 반응이 없다. 반공포로 출신들은 거의가 팔순을 넘겨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로 원호대상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기름이 다한 꺼져가는 생명이 일각에 있으면서 바라는 원호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의 고생뿐만이 아니라 브라질 땅에 와 있을 때 동족으로 부터도 소외(疏外)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62년 처음으로 문화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앞장서 안내를 맡아 브라질 이민을 도왔으며 일차 단체이민이 63년 도착 했을 때도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뽈뚜게스 통역을 그들이 해 주었다. 많은 도움을 준 그들이 소외당한 것은 다름 아닌 불이익을 당할까 해서다. 서슬이 퍼런 군부정권이라 반공포로들과 가까우면 사상을 의심받을까봐 도움을 받으면서도 될 수 있는 한 멀리했다. 한마디로 동족으로 끼워 주지를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대부분 외국 여인과 결혼을 했다. 결혼대상은 일본인 이민자와 브라질 여인이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실가지락(室家之樂)’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들은 서로 간 연락을 취할 뿐 별다른 모임 같은 것이 없이 지내오다가 1992년 중남미평통지역협의회(회장 박태순)가 주축이 되어 MBC, 국정원의 협력을 얻어 한국전 인민군포로 중 중립국을 선택하여 인도 등 세계 각국에 거주하는 반공포로 출신 32명의 고국 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후 동아일보 브라질 지사장 박태순의 주선으로 2006년 2월 6일 프린스타워호텔에서 브라질 한인회 회장 직무대행 (고광순)과 평통남미지역회장(주영호), 상파울로총영사(권영욱), 전한인회 이사장(김창득), 노인회장(이병학), 크리스천 복지회장(김정한)등 내빈 50여명이 참석했다. 반공포로 브라질 정착 50주년 기념식장에는 반공포로 출신 가족 친지들을 모두 불러 만찬을 베풀었다. 이들은 5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작고한분들과 생존한 분들을 확인하고 있다.

이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30여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 졌으나 하루가 다르게 돌아가시고 있어 오늘 현재로는 정확한 숫자가 못 된다. 또 이 중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많아 연락이 되는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하다. 연락이 되는 사람도 기동이 불편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겨우 십여 명 정도만 참석한다. 필자는 2010년 4월 상파울로 리벨다지에 있는 갈봉부예노 식당에서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식대는 올림픽사장 김정한이 지불하는 반공포로 가족초청 오찬에 참석해 현실을 목격했다. 반공포로 출신 참석자 10명중 생활극빈자가 아닌 사람은 너덧 사람뿐이라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극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지병을 앓고 있으며 노구에 생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과연 이들이 개개인의 중한 죄가 있어 천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만든 비극에 희생의 제물이 그들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정한 불현 부당한 일이다. 시대의 죄상 앞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한국 땅에는 전화의 상징이 말끔히 가시어 수십 층의 고층빌딩과 쭉쭉 뻗은 도로와 각종 인프라시설은 언제 이 땅에 전쟁이 있었느냐하는데 지구 반대편 머나먼 타국 땅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반공을 택한 우리들에게 단 몇 달이라도 좋으니 국가 전쟁 유공자 명단에 넣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일루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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