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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연구소'에 빠져든 김주연 사장 이야기-한인 롤 모델만들기에 나선 세계 액세서리사업의 거상 김주연 코스타 사장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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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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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로서 한인연구소의 매력에 빠지다

한민족이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전쟁 영웅’ 고(故) 김영옥 대령과 액세서리 도매전문업체 코스타(COSTAR) 김주연 사장과의 만남. 언뜻 ‘무슨 인연이 있을까’하는 궁금함이 김 회장과의 만남을 더욱 기다려지게 만들었다.

김 사장이 최근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R: Univ. of California, Riverside)에 설립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미화 25만 달러(약 3억 원)를 기부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무역인 사업가로서도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됐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불확실한 현실에서는 거금 지출은 더더욱 망설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김영옥 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처럼 보인다. 미국에 이민을 간지 30여 년 동안 사업의 길을 걸어왔기에 인문·사회 쪽 연구소와는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다.

2009년 가을 어느 날. 김 사장은 장태한 교수(UCR, 소수인종학)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영옥 연구소 설립을 위한 준비모임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신문지면을 통해 자주 보았던 장 교수와 1년 전 한국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합석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나누었던 한인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늘 가슴에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연 매출 4천만 달러의 기업체를 운영하며 새한은행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인 김 사장은 처음에는 연구소 참여에 다소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김 사장은 한국에서 살아온 날 만큼이나 긴 세월을 미국에 살면서 대부분의 교포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효과적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 됐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민 생활 30여 년이 다 되가는데, 이민 1세는 물론 2~3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뜻있는 일과 준비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일대기를 읽었어요.”

“이민자가 어느 정도 생활 안정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한번쯤은 ‘Who am I?'라는 자문(自問)에 빠져들며, 깊은 고뇌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재미한인의 정신적 멘토는 없는가?’로 고민과 방황하던 때, 혜성과 같이 다가온 인물이 김영옥 대령이었습니다.” 김영옥 대령의 전기를 쓴 재미언론인 한우성 기자 그리고 장태한 교수와의 만남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한 기자는 그의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에서 『그(김영옥)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해서는 재외동포는 과연 난파선에서 먼저 뛰어내리는 쥐새끼 같은 존재인가에 대한 답변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한인은 국가의 위기나 발전 또는 지역사회봉사에는 무관심한 파렴치한인가에 대한 답변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밤새워 읽으며 제가 재미동포들을 위해 할 일은 그의 업적을 통해 우리의 좌표를 새롭게 다듬는 것임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아마 이것이 제가 김영옥 연구소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김 사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소명을 발견한 셈이 됐다.

또 김 사장은 그 책에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진정한 용기와 리더십을 보여준 김영옥의 삶에서 교훈을 받았다고 한다. ‘재미한인은 100% 미국인, 100% 한국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분의 일생이 700만 재외동포의 롤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고 밝혔다.

그가 김영옥 연구소에 참여하면서 25만 달러를 기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 사장은 김영옥 대령이 보여준 용기와 리더십, 희생정신과 박애정신 그리고 철저한 미국인이자 동시에 한국인으로 살면서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기대하고 있다.

“김영옥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김영옥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아니라 김영옥의 정신적 유산을 통해 한인사회를 재조명하는 연구소가 된다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실존인물인 김영옥의 정신적 유산을 차세대에 물려주고 롤 모델로 삼는다면, 앞으로 한인이 미국의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 사장에게 연구소 운영방향에 대해 물어봤다.

“이제 50대 중반이 됐어요. 지난 약 25년간 사업하느라 솔직히 힘들고 무척 바빴습니다. 미국에서 본토인과 경쟁에서 이기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려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교포들에게 롤 모델을 계속 제시하고, 멘토 역할을 해주는 기구가 필요한데 바로 이 연구소가 그러한 역할 해 나갈 것이라고 봅니다.”

김 사장은 “이것이 교포사회에서 기초학문을 담당하는 연구소의 위상”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그래서 본인과 같은 “사업가들의 적극적 기부와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World OKTA 상임이사 및 LA한인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는 김 사장은 전 세계 한인무역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활동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차세대들을 위해서라도 커뮤니티 활동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언급했다.

김 사장은 김영옥 연구소의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재미교포사회에 관한 기초자료를 수집하여, 유태계·중국계·일본계 같은 다른 소수 인종 커뮤니티를 비교 연구해 재미교포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설립취지에 공감하는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중년의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로서 교포사회의 멘토 역할과 정체성 함양,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김영옥 연구소에 매력을 느낀다는 김 사장의 표정에 말할 수 없는 자긍심이 엿보인다.


미국으로의 이민과 액세서리 사업

김주연 사장은 1956년 경북 상주 시골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산골 촌놈’으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1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자식의 공부를 위해 대구로 이사를 했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나와 1972년 대구상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상업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도시생활에서의 갈등으로 제주도로 무단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이런 경험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 놓았다.

야구 선수로 유명했던 장효조 선수와 최병국 현 경산시장이 동기들이다. 상고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호텔에 근무하게 되면서 미국에 대한 동경의 꿈을 키우게 된다.

“이태원 해밀턴호텔 벨 보이로 근무하면서 영어를 틈틈이 읽혔죠.” 75~76년도 당시 벨 보이는 특이한 직업중의 하나였다. 김 사장은 벨 보이로 근무하며 받은 팁을 모아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그 후 군대에 다녀온 후 하얏트 호텔에 근무하면서 미8군 안에 있는 메릴랜드 주립대학을 다녔다. 오로지 미국을 가기위해 영어공부에 매달린 셈이다. 1984년(당시 29세)에 혈혈단신 맨손으로 도미했다. 유학 명목으로 미국에 갔지만 실상은 정착이 목적이었다.

유학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국내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비자 발급을 안 해줘 입학허가서를 받아놓고도 미국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미국으로 가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비자발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오면 다시 취직시키겠다는 보증서를 제출해 준 하얏트 호텔 상사의 도움으로 겨우 비자를 받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에 간 후 한 학기를 마치자 돈이 떨어져, 고민 끝에 유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결심하게 된다. 김 사장은 크리스천으로서 유태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유태인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다.

“유태인의 상술에 ‘여자를 공략하라, 먹는 것을 공략하라, 아이들을 공략하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유태인에 맞는 직업을 구하다보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액세서리가 사업성이 있겠다 싶었죠.” 지구상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 있는 비즈니스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 액세서리가 미국에서 유행한 것도 한 몫을 했다.

김 사장이 성공하기까지는 사부(師父)라 할 수 있는 이덕치 사장의 도움이 컸다. 혈혈단신 미국에 온 그를 이덕치 사장이 채용해 시장개척과 쇼핑 등 모든 것을 다 맡기는 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동안 열심히 익혀 둔 영어가 밑천이 돼 맡겨준 일도 잘할 수 있었고, 4년 만에 독립할 기회를 갖게 됐다.

드디어 1989년 액세서리 전문도매업체 코스타(COSTAR)를 설립했다. 홀로 미국에 온 김 사장은 이민 온 지금의 아내(박정선)을 그 때 만났다. 처가는 김 사장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제공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그가 오늘 날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소 팔아서 공부시키려고 대구로 이사 한 어머니 덕분이었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김주연 사장 부부는 슬하에 딸 은영과 보영, 아들 정현을 두었다. 은영은 UC리버사이드 4학년이고 보영은 브라운대학 3학년으로, 둘 다 뿌리교육을 위해 연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보냈다. 막내 정현은 고교 3학년. 워낙 출장이 많다 보니 아이들을 키우고 회사를 꾸려 나가는 데 처가의 도움이 커서 이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하고 있다. 출장을 다녀오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있는 삶이었다고 소회한다.


LA흑인폭동 사태로 인한 시련 그리고...

1989년에 창업한 액세서리 사업은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바탕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2년 LA폭동 때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심한 스트레스로 사업을 정리하고 한적한 미국 국경지역에 가서 조용히 살려고까지 생각했어요. 아내가 옆에서 지켜주고 용기를 북돋워주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한다. 마음을 다시 잡은 김 사장은 그 후 샘플을 들고 4천 마일을 돌며 주문을 받았다. 열심히 돌아다니다보니 중국에까지 눈을 돌리게 됐다.

1997년 중국에 들어가 공장을 둘러보고 저렴한 가격에 미국 수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루트를 확보해 나갔다. 당시 중국에는 미국에서 온 사업가들이 그리 많지 않을 때라 남들보다 시장을 선점하기가 쉬웠다. 흙탕물 투성이에 쥐가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그곳의 노동자들과 같이 지내며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97년부터 수년간 LA다운타운 액세서리 업계를 휩쓴 ‘나비 클립(butterfly hair clip)’을 승부아이템으로 정한 것도 이 시기였다.

중국 공장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발 빠른 감각으로 도매시장에서 탄탄한 자리를 확보하기까지 김 사장의 성실함과 기업가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우의 경우 미국인들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중국에 들어가기를 꺼려했지만 김 사장은 오히려 그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저렴한 가격에 미국 수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냄으로써 액세서리 업계의 히트작 ‘나비클립’ 성공을 이뤄낸 것이다.

바이어들이 회사에 줄을 서서 물건을 가져갈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공장을 늘리고 창고를 짓고 하는 와중에 손해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경험,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 사장은 창업 이래 LA에 본사와 자회사 ‘애비뉴’(Avenue)를 두고 있으며, 중국 이우에 지사를 두고 있다. 상품의 가짓수만 해도 3만여 개에 이른다.

그동안 무역인의 길을 걸으며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기업가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여 지금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신앙적 의지를 내 비췄다.


사업을 통해 교포에 눈을 뜨다

김 사장이 사업을 하며 교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에서의 사업을 펼칠 때였다. 처음 중국 청도에 갔을 때 한국에서 온 기업체 사장들이 재중동포(조선족)들을 아주 무시하고 사람취급도 안하는 행태를 봤다. 그로인해 재중동포들의 반감과 적대감이 심해지고 있었다.

“저는 그런 모습들이 몹시 싫었어요. 왜 차별을 하는지 이해가 안됐고, 재중동포 중에는 독립군 후손들도 많은데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들이 한국말을 한다지만 중요한 상업용어들이 영어로 돼 있어 알아듣지 못하면 무시하고 구박하고 하는 모습들이 비일비재 했어요”

김 사장은 자신이 고용한 재중동포와 중국인들에게 업무에 필요한 공부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소통도 잘되고 관계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 그 덕분인지 김 사장은 지금도 재중동포들 그리고 중국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사업하러 갔다가 동포들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하는데, 평소 관계를 잘 유지했던 저는 재중동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나름대로 미국에서의 성공과 이민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김 사장은 미국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에 유학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 제가 설 자리는 딱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국이 겉으로는 나이스(nice)하고 오픈(open) 된 것 같으나 우리 같은 이민자에게 설 수 있는 공간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유태인 수준을 뛰어 넘을 수 없었죠. 처음에는 그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했어요.”

유태인들은 정착과정에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미국의 주류사회 일원이 됐다. 김 사장은 유태인들을 공부하면서 이들보다 이민역사가 짧은 한인들도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김 사장이 한인상공회의소나 한인무역협회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것이나, 김영옥 연구소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내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연구소 기부도 생색도 내지 말고 또 그런 오해도 받지 않도록 조용히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홍명기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사장(듀라코트 대표)의 ‘동포사회에 알려 뜻을 함께 모으자’는 말에 공감해 기부사실을 공개하게 됐다고 김 사장은 밝혔다. 김 사장은 한인사회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는 홍명기 이사장을 드라마틱한 분으로 묘사한다. 김영옥 연구소에서 같이 활동하게 된 것이 숙명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김영옥 연구소의 장태한 교수와 한우성 기자 등 이론을 겸비한 사람들이 체계를 세운다면, 자신 같은 사업가들은 일을 뒷받침하는 실천가로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믿고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만남도 있어야 하지만 사적인 만남을 통해 감당해야 할 부분을 하겠다는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터득한 인간관계의 노하우가 연구소 활동에 도움을 주고, 이런 부분이 자신이 해야 될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민자로서의 삶과 정체성

재외국민참정권 부여 이후 본국(한국)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은 교포사회 일부지도자들에 대한 소견을 들어봤다. 김 사장은 “그곳은 제가 설 자리가 아닙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동포사회의 자문이나 후원 역할은 몰라도 그런 것은 재미동포로서 역할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국인으로서 마땅히 역할을 하고 살아가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김영옥 대령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런 면에서 김 사장은 자녀들에게 철저히 한국어 교육도 시키고 있다. 언어를 잃으면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김 사장은 “동포들의 지위가 올라가고 정치력 신장이 이뤄지면 본국(한국)에서도 교포들을 모셔갈 정도가 되지 않겠냐.”며 정치력 신장에 대한 입장도 피력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 사장은 한인 기업인이나 경제단체들도 미국의 정치에 보다 많이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집간 사람들이 시댁에도 신경을 써야지 친정에만 신경을 쓰면 되겠습니까?”라고 토로했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지라도 너무 일방적으로 본국 지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흐르다보면 이민자로서의 본연의 자리를 망각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김 사장은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모교인 대구상고에 장학금도 보내고 가족들을 데리고 옛 고향마을을 찾아 친척들과도 만났다. 맞절을 따라하며 일어날 줄 모르는 아이들의 모습에도 대견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어려서 자랄 때 크고 넓던 넓게 보였던 집과 담장들은 초라하고 작아보였지만 애틋한 고향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할 때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많은 한인단체들에 실망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간직한 순수한 단체를 찾다보니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까지 오게 됐다고 말하며 껄껄 웃는 김주연 사장의 표정에서 또 다른 열정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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