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호 / 영산대학교 교수 ]

▲ 고 박병헌 재일민단 상임고문

어제 새벽 박병헌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상임 고문이 숙환으로 타계했다. 재일동포 1세 가운데 큰 별이 또 하나 떨어졌다. 향년 83세. 그는 1986년부터 91년까지 민단 단장을 역임하고 한국이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도록 하는데 헌신했다. 재일동포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민단의 정신적 지주로 말년에까지 재일동포 권익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필자는 이 분으로부터 재일동포 현대사와 관련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시는 것을 목격했는데 어제 부고를 받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지난 2009년 3월 '한일시평' 제188호에 이 분의 일생에 관한 칼럼을 실었는데, 일부를 재인용하며 그를 추도하고자 한다.

그는 192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39년에 형을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도쿄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제작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전문학교를 다니면서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쟁 말기 공습을 피해 잠시 거처를 군마(群馬)현으로 옮겼는데 그는 거기서 해방 이듬해 보수적인 청년단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지방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민족단체 운동가로서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해방 직후 많은 재일동포 청년 조직원들이 경험한 바와 같이 10대 청년인 그도 도쿄에 있는 청년동맹 훈련소에 입소하여 민족의식을 키웠다. 1946년 10월에 민단이 결성되는 데에는 청년동맹의 역할이 컸다. 다만 정치적 이념이나 조직의 이익을 둘러싸고 청년동맹은 진보적인 단체 재일조선인연맹 청년대원들과 잦은 투쟁을 벌였는데 그는 이를 목격하기도 하고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1949년 그는 메이지(明治) 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고 재일동포 학생들에 의한 우파적 단체 ‘재일한국학생동맹’에 들어가면서 특히 좌파적 단체 ‘재일조선학생동맹’과 좌우 이념에 의한 치열한 대립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학생동맹은 한국계 재일동포 단체로서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찍이 6월 27일 동맹 임원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구국전선에 동참하자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것은 ‘재일한교(韓僑)학도의용군’ 결성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원하여 의용군 창설을 위한 추진위원이 되었으며 민단과 주일한국대표부에 협력하는 형태로 자원병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자원병에 기꺼이 지원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일생에서 첫 번째 결단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윽고 그는 재일학도의용군 제1진 78명 가운데 한명으로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했다.

1965년 한국과 일본간 국교가 정상화되는 시점에서 그는 민단의 총무국장이 되어 민단의 지도적 임원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민단 재정국장과 경제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0년대에는 민단의 감찰위원이 되었다가 1979년 부단장에 올랐다. 이윽고 1985년 제38대 민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단장에 재임하는 동안 1987년에 해외한민족대표자 협의회를 시작하기도 했으며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 525억원의 후원금을 마련하여 한국에 기증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기업인으로서도 한국에 적극 기여했다. 1973년에 구로공단 안에 전자부품 회사인 대성전기(大星電機)를 설립했으며 1970년대 후반 재일한국투자협회 설립을 주도했고 1980년대 초반 신한은행 출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회사 경영 이외에도 평화통일자문위원, 신한은행 이사, 중앙대학교 이사, 한국복지재단 이사, 제일스포츠센터 이사 등을 맡으면서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말년까지 활동적인 나날을 보냈다. 박병헌 전 단장은 생전에 한국에서는 서울에 있는 자택과 대성전기 명예회장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는 지난 2007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숨가쁘게 달려온 길을 멈춰서서'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축약하여 기록했다.

“생각해 보면 치열하게 도전하고 또 성취하는 삶이었다. 좌절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목표를 달성해 내는 행운의 일생이었다. 이제 우리 세대에 못 이룬 꿈들을 후세들이 이루기를 바라면서 남은 일생도 지금까지처럼 주어진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조국과 재일동포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