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04.06. 중앙일보 <배명복의 세상읽기> /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의 별명은 검투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그의 승부사적 근성은 돋보였다. 검투사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번역 오류 논란에 시달려 온 ‘한·유럽연합(EU) FTA 협정문’ 한글본에서 무려 207건의 오류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는 ‘사과한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머리를 숙였다. 검투사의 굴욕이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허탈하다. 속은 기분이다. 대한민국 외교부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외교부 설명대로 1300쪽이나 되는 방대한 협정문을 제한된 인력으로 짧은 기간에 번역하다 보니 생긴 실수일 수도 있다. 예컨대 ‘공작기계(machine tools)’를 ‘공자기계’, ‘광택제(polishing products)’를 ‘고아택제’로 표기한 것은 시간에 쫓기다 생긴 오타(誤打)라고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역학(疫學·epidemiological) 서비스’를 ‘피부의학 서비스’, ‘이식(transplant)’을 ‘수혈’로 번역한 것은 도대체 설명이 안 된다. 고유명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경제개발협력기구’로 표기한 대목에서는 웃음밖에 안 나온다. 최근에 명칭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언론사 수습기자에게 맡겨도 이런 어이없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완전히 나사가 풀렸거나, 실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 ⓒ 중앙일보, [일러스트=강일구]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외교부의 오만함이다. 처음 오역 논란이 불거졌을 때 외교부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태도를 보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비(非)전문가들이 지엽적인 문제를 갖고 공연히 시비를 건다는 투였다. 타이핑 과정에서 일부 사소한 실수가 있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만큼 일단 비준부터 해달라고 국회를 압박하는 뻔뻔한 모습까지 보였다. 그런 식으로 우물쭈물 깔아뭉개다 결국 무림의 고수들에게 걸려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흔쾌히 잘못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 정도로 망신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우물 안에서 까불다 큰코다친 꼴이다.

외교부의 망신살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자신의 자녀를 특례 채용해 물의를 빚은 전직 장관은 도망치듯 해외로 빠져나가 여태 안 들어오고 있다. 국익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도 모자랄 외교관들이 여인네 치마폭에 숨어 서로 쌈박질을 해도 제대로 관리·감독조차 못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외교 활동에 써야 할 공금을 쌈짓돈처럼 유용한 공관장도 있었다. 우리 함정이 북한에 피격당해 수십 명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유엔에서 제대로 된 비난 성명 하나 받아내지 못하고 중국의 높은 벽만 한탄하는 것이 우리 외교부다. 북한의 핵 저장고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외교의 현주소다.

외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외교부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다. 외무고시를 통과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골방에 갇혀 현실과 동떨어진 텍스트나 달달 외워 외교관이 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에게서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투철한 공복(公僕)의식을 기대하긴 어렵다. 세계와 맞서는 기개와 고도의 지략(智略)으로 국가에 봉사하기보다는 알량한 특권에 연연해 권력의 눈치나 살피고, 연줄이나 따지는 반쪽짜리 엘리트가 대부분이 아닌가.

외무고시 대신 외교아카데미 같은 전문 양성기관을 통해 제대로 된 외교관을 길러내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취임 초부터 이명박 대통령이 관심을 가졌던 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지지부진이다. 국회에 외무공무원법 개정안이 올라가 있지만 눈속임에 불과하다. 석사 과정의 외교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그중 일정 수를 외교관으로 채용하자는 당초 취지는 사라지고, 형태만 바꿔 사실상 외무고시를 존치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이다. 고시라는 강고한 철밥통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꼼수로밖에 안 보인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4강(强)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구조에서 외교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외교만큼 뒤처진 것도 없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외교관이 누가 있는가. 솔직히 외교에 관한 한 북한이 한 수 위다. 북한 외교를 ‘벼랑 끝 외교’라고 욕하지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다.

걸출한 외교관을 키워야 한다. 단순히 언어나 암기 능력보다 실질적 문제해결 능력 위주로 선발과 교육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역사와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과 철저한 국가관도 심어줘야 한다. 이대론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외교의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우리가 살 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FTA의 검투사가 아니라 외교의 검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