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5.25 금 17:37
재외선거, 의료보험
> 자료발굴 > 잊혀진 한인들의 이야기
동토의 땅, 버려진 이름을 찾아서- 일제 때 징용당한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한 사할린 기행 -
유연상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1.08.19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사할린 망부가

일제 때 사할린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한인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묻는다면 거의가 돌아가시거나 영주 귀국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본격적인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문호가 열린 후 현재까지 4천 명에 이르는 사할린동포들이 고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한인1세의 발자취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부분 행정수반이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쪽으로만 조사됐고, 다른 지역에는 관심을 가지기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그 흔한 모국방문도 하지 못한 이들도 있는가 하면 현재까지 고국 손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도 수두룩하다.

예전부터 사할린에 남아있는 한인1세들은 변방으로 갈수록 많이 기거하고 있었다. 한인1세의 발자취가 대부분 탄광 밀집지역에 분포되었고 북쪽 공장 가동라인이 융성했기 때문이다.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거나 미처 신청서를 작성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으나, 행정적 낙후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사할린은 버려진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석유와 가스가 쏟아져 나와 기회의 땅이 되고 있는데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온 한인들에게는 패전이후의 아픔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 하다. 광복이 되었지만 일본은 자국민이 아니라는 한인 징용자들을 사할린에 방치했고, 어언 반세기가 지나서야 고국은 사할린 한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로부터 자나 깨나 나는 아버지 생각에 잠 못 이루며, 국내에 보도되는 사할린에 관한 소식을 한시도 빠트리지 않고 인터넷에 매달렸다.

1945년 아버지가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려가던 당시 두 살의 어린아이는 어느덧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66년을 가슴에만 품고 살았던 한 많은 삶을 어떻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성묘를 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나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 때에도 아버지 없는 빈자리는 이산가족의 아픔만큼이나 더 애절한 망부곡이 되어 가슴을 타고 흘렀다. 더 늦기 전에 한번은 보고 갈 땅이 있었다. 일제 때 강제 징용으로 끌려 왔던 아버지가 1977년까지 고국을 그리다 돌아가신 곳, 그곳을 찾아 팔순을 넘긴 노모를 모시고 사할린 행을 택했다.
1977년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부고를 들었지만 아버지의 연고는 알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거려도 소용없었고 가슴이 타 들어가도 부질없었다. 평생 가지 못할 거라는 곳, 사할린에 2007년에야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천 구에 이르는 묘지에서 아버지의 묘를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았다. 아버지가 고향을 그리며 언덕에 올랐을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들렀다. 언덕에서 바라다본 코르사코프 항구는 말이 없는데 아버지의 고향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끝내 아버지의 연고도 묘지도 찾지 못하고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변함없이 사할린 소식에 매달렸다. 정부기관과 민간단체 손 가는 곳이라면 아버지 찾는 일에 몰두했다. 밤낮으로 아버지를 찾는데 몰골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2010년 모 일간지에 아버지의 묘지가 실렸던 것이다. 지체할 겨를도 없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로 내달렸다. 인터넷에 실린 묘지사진은 아버지의 묘가 분명했다.
때마침 위원회의 오병주 위원장이 사할린을 방문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 위원장은 사할린사회단체장 오찬 간담회에서 코르사코프 디아스포라 협회 이태춘 회장에게 사진을 건넸다.

   
▲ 처음으로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한 후 EBS 취재팀과의 인터뷰.

아버지는 1945년 징용으로 끌려가 독신으로 살았고 1977년 친구들의 보살핌 속에서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에 안치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천운을 탄 행운이었다. 사진으로 인해 기적이 일어났고, 사진은 지표방향기보다 더 빠른 길로 안내했다.
현지 코르사코프 이태춘 회장의 묘지 발견은 인터넷을 타고 한국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68세의 아들부부는 87세의 노모를 모시고 사할린에 다시 입국했다.
14세에 결혼해 18세 득남하고 20세에 홀로 되신 어머니, 67년을 혼자 사시며 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어쩌면 아들보다 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아들을 보살피며 살아왔을 것이다. 고마운 어머니. 아버지 만날 날을 위해 이렇게도 정정하시니 기적의 화신(化身)이 어머니의 애타는 기다림에 반응한 것 같다.
나는 올해 아버지의 그리움을 담아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상봉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66년만의 가족상봉의 기적이 이루어지다

드디어 8월15일 날이 밝았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코르사코프로 가는 길이 초행길이 아니지만 자꾸만 가슴이 덜컹거렸다.
코르사코프 버스정류장 터미널에서는 이태춘 회장이 나와 있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세 대의 차량이 뒤따랐다. EBS 취재팀과 현지 새고려신문사, 한국교민 김성훈 씨를 비롯하여 지구촌동포연대 묘지조사팀이 동행했다.
코르사코프 제2공동묘지 입구에 다다르자 나는 눈가에 눈물부터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공동묘지라 하지만 우거진 잡목이 앞을 가린다. 한발 한발 다가서지만 아버지의 외로운 타향살이가 자꾸만 아련하게 떠올랐다.

   
▲ 아버지 묘비를 부여잡고 통곡하다
사람들이 붐볐다. 오늘 8월15일은 우리의 광복절이지만 사할린에서는 우리의 추석처럼 성묘하는 날이다. 여기저기 길목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산소에서는 한인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음식만 조금 다를 뿐이지 우리와 똑같은 제사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윽고 입구에서 100미터쯤 거리에 이르니 작은 사거리 길이 나왔다. 그 길에서 10미터 전방에 잡초가 무성한 풀숲사이로 낡은 콘크리트 비석이 보였다.
아버지 산소가 분명했다. 주소도 있었고 내 이름도 있었다. <고 학상 유공흥준지묘 자연상>이 또렷했다. 나는 아버지의 비석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어머니도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고, 며느리인 내 아내도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아버지! 아버지! 내 아버지!, 아들이 왔습니다."라고 한없이 울어 댔다. 일순 주변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취재진도 지구촌동포연대 조사팀도 모두가 목이 멨다.

한참이나 아버지의 비석을 끌어안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성스레 향을 피우고 음식을 내놓았다. 며느리도 거들었고 주변 사람들도 벌초작업에 합류했다.
첫 잔을 올리니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명절 때마다 이웃들이 성묘 가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던 나는 차가운 땅에 잠들어 있을 아버지께 속내를 꺼내며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일제에 의해 동토의 땅, 사할린에 끌려와 조국과 가족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눈을 감았을 아버지 생각에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버지와의 재회를 66년 만에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사할린 땅에서 상봉했다. 이제 남은 절차는 아버지의 유골을 모셔 오는 일이다.
나는 한해정도 위원회의 활동을 지켜본 후 자비를 들여서라도 고국으로 모셔 올 생각이다. 나와 아버지의 66년만의 상봉은 많은 이들이 수고로 이룬 일이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버지의 묘지봉분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기적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자료 : 다음블로그 사할린지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