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08.14. 경향신문 <기고> / 선재희 KBS 보도국 탐사제작부 ]


주자(朱子)가 말했듯이 사람이란 악한 일을 하기는 쉽고 착한 일을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극한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국가에 큰 위기가 닥치면 그 구성원의 선택은 극명하게 갈리게 되는 것 같다.

최근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선풍적인 인기는 우리 사회가 이제 정의의 문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는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선뜻 긍정하고 나설 사람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KBS <시사기획 KBS 10> ‘친일의 길, 항일의 길’ 편을 제작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정의(正義)’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정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친일 행위자와 독립 운동가가 선택했던 상반된 삶은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일까?

일제의 한반도 병탄 이후 이 땅의 많은 우국지사들은 일가족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

세계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가 많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족이 모두 나서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가족 망명’의 대표적 사례는 이회영 선생 일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을 포함한 그의 6형제는 가족과 식솔 등 60여명을 이끌고 연해주로 집단 망명했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백하 김대락 선생도 일가족을 이끌고 망명했다. 특히 김대락 선생은 식민지 땅에서 증손자를 낳게 하지는 않겠다면서 만삭의 손자며느리를 재촉해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식민지를 벗어나 증손자를 본 것이 어찌나 통쾌했는지 증손자 이름을 ‘쾌당’이라고 지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우국지사들의 망명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잘 알다시피 온가족이 망명길에 올랐던 이회영, 이상룡, 김대락 선생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된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숨져갔다. 살아남은 후손들 가운데도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거나 심지어 정신이 이상하게 돼 버리는 비극을 겪은 경우도 많았다.

나라를 되찾은 후에도 비극은 계속됐다.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후손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전 재산은 독립운동에 바쳐버려서 가난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취재 중에 만난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 씨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고아원을 전전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해 근근이 살아가는 다른 후손들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다.

반면 친일 행위자의 후손들은 대부분 광복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내내 양지 속에서 살고 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행위자 이 모 씨의 후손은 전국에 890만㎡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물려받아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친일재산으로 환수됐던 300억 원어치의 땅을 소송을 통해 돌려받기도 했다. 이렇듯 조국을 배신한 대가로 받은 재산은 고스란히 그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졌고, 후손들은 넉넉한 환경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고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친일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특별법이 발효된 뒤 잠시 주춤했던 친일 행위자 후손들은 앞 다퉈 반격에 나서는 모습이다. 조상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겠다는 극히 소수의 후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재산을 되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까지 124건의 반환 소송이 제기돼 67건의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다. 친일 행위자 후손들은 ‘친일 재산 환수 특별법’ 자체가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까지 냈지만 다행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해방 직후 친일 행위에 대한 처벌과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위에 대해 지금 왜 자기가 속죄해야 하느냐는 친일 행위자 후손들의 항변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기가 막힐 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지금이라도 친일의 길과 항일의 길에 대해 분명한 정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나라에 위기가 닥치고 국민들이 갈림길로 내몰렸을 때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