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오 / 호주 한국일보 편집고문 ]

▲ 김삼오 호주한국일보 편집고문

정치 선거에는 경마나 복싱에 버금가는 흥행 요소가 꼭 들어 있다. 구경 중에 싸움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고 한다. 요즘에도 간혹 그렇지만, 과거에는 길거리에서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뺑 둘러앉아 구경을 했다. 선거가 피 터지는 싸움은 아니지만 승자와 패자 간 한판 승부를 가늠하는 볼거리가 되어 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이번 박원순-나경원 후보 간 서울 시장 자리를 놓고 하는 선거판을 지구 저편에서 보며 훈수를 두느라 열을 올리는 많은 교포들을 옆에서 지켜봤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매번 대선과 총선 때면 그랬다. 요즘은 안방에 앉아 한국의 현장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호주의 TV 코리아나 MBC 라디오 방송, 책상머리에서 손끝 잠깐 놀리면 골라 읽을 수 있는 여러 인터넷 매체와 그 기사들을 재탕하는 늘어난 공짜 교포 매체들의 덕택으로 더 그런 것 같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었지만, 대부분 모임에 가보면 열띤 대화의 으뜸 소재는 역시 그거였다. 농담이지만 승자를 놓고 내기를 걸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전부가 흥행을 보는 관중이라고 말하고는 싶지 않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고국의 선거를 지켜보는 인사들 또한 많음을 잘 안다.

구관이 명관

고국과 해외 한인사회의 선거를 오래 지켜보면서 나는 선거가 세상을 바꿀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에 대한 글도 썼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나는 후보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정당의 공천을 받거나, 아니면 큰 재력을 가져야 하는 현실을 들었었다.

정치 지도자가 되는 이 첫 관문을 뚫지 못해 정직하고 유능한 많은 인물들이 꿈을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그래서 어떠한 선거제도 아래에서도 유권자의 후보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다. 영어에 ‘두 나쁜 놈 중 덜 나쁜 놈을 뽑는 게 선거다’(The Lesser of the two evils)라는 한탄이 생긴 게 그런 이유라고도 지적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울 시장 선거 후보로서 시민운동가 박원순 씨의 등장과 당선은 지각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에 대한 나의 기존의 인식체계는 그대로다. 한국에서의 선거가 세상을 크게 바꾸기 어렵다고 봐 온 이유가 여러 가지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가지만 더 예를들어보자. 후보자가 승자가 되어 그 자리에 앉으면 후보 때와는 전혀 딴판인 악재가 예외 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원순 시장의 시련은 바로 지금부터라고 생각된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흥망성쇠와 함께 앞으로 좋은 사례연구가 되어야 한다.

박정희 향수

서울이 어떤 곳인가? 그런대로 따라주어야 할 자질구레한 사안부터 이제는 초당파적이 되었어야 할 대북정책까지 너무도 많은 집단 이익과 개인 이익의 대립으로 어느 하나 국가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여 혼란을 겪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며 주변 위성도시까지 포함시킨다면 전국 인구의 반에 육박하는 수도권 메가(Mega) 도시다.

여기에서도 어떤 정책이든 과감하게 추진하겠다면 신선한 정치인, 썩은 정치인 할 것 없이 코드 정치와 정치적 편의, 그리고 구악과 타협이 필요하게 되어 있다. 그 결과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떤 지도자도 종국에는 권력누수니 구관이 명관이란 원성을 듣고 내려앉았었다. 오죽하면 ‘박정희 향수’가 생겼겠나 싶다.

요즘 ‘아랍의 봄’이 한창이다. 예멘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면서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여성 콰클 칼만이 외신 기자의 질문에 한 대답은 한국의 많은 정치 지망생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내가 길에 나가 민중과 같이 할 수 있다면 대통령으로서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I think if I can be in the street with the people, I can achieve more than if I am the president)라고.

대의정치인데 선거 무용론을 주장하는 바보가 아니다. 문제는 선거는 정치와 사회를 바꾸는데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온 나라가 들뜨는 한국의 선거를 보면 그 정치 행사 하나 잘 치르면 매사가 해결될 것 같이 국민 모두가 길들어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한국의 선거가 대천 해수욕장처럼 들뜨는 이유는 첫째로 선거 때마다 줄을 잡기 위하여 쏟아져 나오는 똑똑하나 사악한 기회주의자들과 둘째로 그런 난장판을 부추기는 언론의 경마저널리즘(horse-journalism: 미국 언론학 용어로서 선거를 흥행으로 만드는 보도 행태를 말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선거가 한국의 정치와 사회 풍토를 오히려 타락 시켜온 측면도 많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언론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 풍토 개선을 위하여 선거 못지않게 국민 행태 발전과 향상을 지향한 보도를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무엇을 ‘점령하자’는 운동은 강력한 리더가 없고 잘 먹힐 수 있는 구체적 제안이 없어 흐지부지 되고 마는 측면이 있지만 그 의미는 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얼마가 되든지 출세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행태, 그런 목적을 위하여 선거를 줄잡는 기회로 악용하는 행태, 선거 때가 되면 몇 푼의 이권의 노예가 되어 날뛰는 행태, 그래서 만들어지는 패거리 사회풍토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선거는 몇 백 번 치러도 소용없다.

고국의 재판?

재외국민참정권의 허용으로 내년부터 여기 호주 한인들은 시민권자가 참여하는 호주 선거, 영주권자가 참여하는 한국의 선거라는 두 가지 선거문화 속에 살게 됐다. 투표권은 헌법이 정한 기본권 행사이니 선거가 가져올 부작용을 걱정하는 일부 사람들의 비관론대로 그걸 반납한다면 ‘빈대 무서워 초가삼간 불태우는 격’이 된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문화를 여기에 그대로 옮겨 올 필요는 없겠다. 선거문화는 우리가 사는 호주 방식이 좋다고 생각한다. 호주에서는 총선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치러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지 않은가? 후보자가 갑자기 재래시장에 나타나 쇼를 하거나 길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악수를 청하는 일이 없지만 누가 누군지 몰라 엉뚱한 데에 한 표를 던졌다고 말하는 유권자는 없다.

내년 총선과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한국의 정치인이 찾아와 여기 한인 단체장들을 만나거나 유권자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고, 어느 정당이 한인 인사를 서울로 불러들여 행사를 하는 일이 많아질지 모르겠다. 그럴 때는 그런 곳에 쓰이는 돈들 아꼈다가 공익자금이 거의 제로인 전체 한인사회에 보태달라고 건의하는 앞선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나무 밑에서

이런 오해 받을 수 있는 말을 하게 되는 까닭은 지금대로라면 재외동포 투표권이 재외동포사회에 크게 이익을 가져오지 못 할 것 같아서다. ‘지금대로’라는 뜻은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 구심점이 없는 해외 한인사회는 고국 정부를 향하여 ‘우리의 필요는 이것이다’라고 컨센서스 절차를 거쳐 만든 종합적인 기본 문서 하나가 없다는 의미이다.

고국과 해외 현지 사회에서 동포관련 학술 행사, 문화와 경축 행사, 각종 대회가 많지만 그런 의제를 다루는 일은 전혀 못 본다. 그리고 이때까지 재외동포법과 재외동포재단으로 이어지면서 복수국적 문제나 교민청 설립문제 등 재외동포의 큰 관심 사항에 대한 건의는 미국에서 시작됐지 다른 지역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려온 셈이다.
그런데 이번 참정권 실시에 앞서 과연 재외동포사회는 무엇을 고국에 우선 사항으로 요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의는 없고 선거절차 이야기만 무성하다. 그런 상황에서 유세차 찾아오는 정치인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뭘 해달라고 부탁하면 가서 반영하겠다면서 돌아갈 뿐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내각책임제를 택한 여기 호주 선거보다 조금은 더 요란하지만 그 선거도 오늘날 근본적으로는 텔레비전 선거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TV 코리아, MBC 라디오 방송, 한국의 인터넷 매체와 교포매체들의 선거 보도를 듣고 읽으면 어느 당의 정책이 뭔지, 누가 누군지 몰라 투표를 잘 못할 이유는 없다.

후보자를 낸 여야 정당들도 그렇다. 저쪽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선거 유세를 벌인다면 전체적으로 나랏돈만 축나지 효과는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