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9.21 금 17:31
재외선거, 의료보험
> 자료발굴 > 잊혀진 한인들의 이야기
사할린의 과거는 완료형이 아니다 - (1)- 한수산 작가의 사할린 르포(2011년)
한수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2.01.3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 한수산 / 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 ]

( ※ 이 글은 작가 한수산 씨가 2011년 7월 중순 사할린을 방문해 사할린 한인사회 현장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룬 현장 르포형식의 글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역사와 책임>에 게재된 바 있다.-편집자 주. )


   
▲ 한수산 세종대 교수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되어 노역하다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현지에서 숨진 한인 묘역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작했다. 이 사업을 위탁 받은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대표 배덕호)의 조사원들은 2011년 7월 3일 사할린에 도착, 러시아 사할린 주도(州都) 유주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 약 42만㎡ 속에 묻혀 있는 한인묘지를 시작으로 조사활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사할린 강제징용자 유족 오선환(71세), 신윤순(67세)씨가 사할린으로 떠났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후, 해방이 되었지만 돌아오기는커녕 소식조차 끊긴 채 반세기를 훌쩍 넘겨버린 아버지의 족적을 더듬고, 유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오선환 씨는 2살, 신윤순 씨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던 유복녀였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식을 껴안고 두 어머니는 남편을 기다리며 가난의 질곡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한 이들의 행로는 사할린 시의 문서보관소에서부터 돌린스크 시청, 빠그로브가 공동묘지, 그리고 아버지가 살던 소스노브가의 옛 집터까지 망각의 늪을 건너며 이어졌다.
이 첫 묘지실태 조사활동과 사할린 현지에서 펼쳐진 유가족의 ‘아버지 찾기’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나는 7월 14일 사할린으로 떠났다. 이 취재여행에는 KIN의 뜻 깊은 협조가 있었음을 밝힌다.

1.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은 사할린을 ‘슬픔의 틈새’라고 불렀다. 2011년 7월 나는 그 ‘슬픔의 틈새’를 찾아 사할린으로 떠났다.
“어쩌자고 선생님은 그렇게 슬프고 청승스런 데만 다니세요.” 사할린을 다니러간다는 내말에 고교 국어교사인 제자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폭우로 사할린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1시간여를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슬프고 청승스런 곳, 그러고 보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역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했던 분들을 찾아서 참 많은 곳을 떠돌았다. 멀게는 400년 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심수관 일가에서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 후 반공포로로 제3국을 택해 인도로 간 사람들까지.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버려지듯 강제 이주된 까레이스키를 찾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도 했고, 1904년 우리나라 두 번째 이민선을 타고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를 거쳐 끝내는 쿠바까지 풀씨처럼 흩어져 가야 했던 이민자들의 족적을 만나러 가기도 했었다.
비 내리는 활주로를 내다보며 그때 그 쿠바에서 만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관절염으로 두 다리를 자른 몸이 되어 요양병원 침대에 앉아서 나를 맞은 그 이민2세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사람을 생애 처음 만난다면서 내 손을 잡으며 울었었다.
“슬프고도 반갑습니다.”
가 본 적이 없는 조국,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 속의 조국에서 온 나에게 그 할머니가 한 이 말은 오래 내 기억 속에서 떠돌았다. 슬프다는 것이 신산하기만 했던 이민2세의 지난날이었다면, 반갑다는 것은 오늘의 만남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번 취재여행은 다르다.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민족의 한과 멍울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런 의문과 비통함 속에 그때 비행기에 올랐다면 이번 여행에는 질곡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장을 여는 희망과 약속의 뜻이 담겨 있다. 이국땅 사할린에 묻혀있는 한국인의 묘지실태를 조사하여, 유해를 모셔오는데 필요한 자료를 데이터화하는 첫 발걸음의 현장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되어 노역하다 해외에서 숨진 한인 묘역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는 건국 이후 처음이 아닌가.
비행기는 떠날 줄을 모르는데 공항은 장맛비 속에 젖고, 비행기 창에 주룩주룩 빗물이 흘러내렸다. 비 내리는 공항 활주로를 바라보자니 먼저 사할린으로 떠난 조사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낫을 구해 가지고 러시아로 떠난 조사원 김기열 씨, 문득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떠나는 그를 공항에서 배웅하며 아침밥을 함께 했을 때 그는 말했다. “고기는 거기서도 먹을 수 있을 테니,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순두부를 먹겠습니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쓰나미로 원전사고가 일어난 일본 동북지역과 위도가 비슷한 바다 위를 날고 있을 때였다. 창밖으로는 맑게 갠 하늘과 푸르디푸른 동해바다 위로 흰 물결을 꼬리처럼 늘어뜨리며 가고 있는 배들이 내려다보였다. 멀리 은빛 구름의 덩어리들이 꿈결 같았다. 아름다운 세상아. 이 땅의 삶 또한 아름다워야 하건만 역사는 언제까지 비극의 징검다리들 속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
서울을 떠난 지 3시간, 사할린의 주도(州都) 유주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통관심사를 거치자니, 한국에서 열린 ‘대전세계태권도 문화엑스포’에 다녀오는 러시아 소년들 30여 명이 우르르 공항을 오간다. 메달을 두 개씩 목에 두른 소년도 보였다.
사할린에서의 첫날밤을 자다 깨다를 거듭하던 내가 눈을 뜬 것은 5시, 숙소인 민박집에서 기르는 닭소리가 새벽부터 요란했다. 구름 낀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쳤는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서성거렸다.
이 여름 사할린은 일교차가 심하다. 한낮이면 몸을 못 가누게 땀이 흐르지만 아침의 체감온도는 11월처럼 춥기까지 하다. 이른 아침, 동포 2세로 현장의 코디가 되어 실태조사를 돕고 있는 김복곤 회장(정의복권재단)의 안내로 제1묘지 작업현장에 도착했다. 묘지는 묘지인데, 멀리서는 묘비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작나무와 풀로 들어찬 숲이 울창하다.
그러나 통행로를 따라 묘지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나무들 사이로 한인 묘지가 몇 기 보인다. 조사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구역까지 찾아갔지만 숲 속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화로 연락을 하고 통행로에서 기다리자니, 조사원들이 하나 둘 풀을 헤치며 숲 속에서 나온다. 얼굴은 환하게 웃는데... 긴 장화에 갈색 방충복을 뒤집어쓴 모습들이 이상스런 비장함으로 다가왔다. 마치 영화 속에서 특수임무를 수행 중인 요원들만 같다. 손에는 반달형의 러시아 낫이 들려 있다. 숲을 빠져나오며 김기열 씨가 말했다. “몸에서 육수가 흐르네요.”
인천공항에서 헤어졌던 얼굴들을 다시 만난다. ‘조국의 아들’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나 할까. KIN의 기획실장 서병철 씨는 큰 키에 늠름하다. 그리고 그 풍모에 어딘가 우수가 있다. 윤병호 씨, 다부진 체격에 수염까지 길렀다. 이은영 씨, 유일한 여성인력이다. 작은 체구 때문에 가냘프게 보이지만 일하는 모습은 다부지고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다. 오민섭 씨는 어린 티가 스멀스멀 느껴지지만, 조용하고 신중하다.
6구역 앞 통행로에서 잠시 휴식을 갖던 조사원들이 묘지를 향해 하나 둘 돌아선다. 작업반장 김기열 씨를 선두로 조사원들이 묘지 한 줄씩을 맡아 ‘1번’ ‘2번’하고 번호를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늘어선다. 러시아 낫을 든 다른 대원들과 달리 김기열 씨는 조선낫을 들었다.
그는 왼손잡이라 대장간에서 특별히 왼손용 낫을 만들어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전진!”
김기열 씨의 목소리가 숲속에 퍼져나간다. 나무와 풀을 자르고 길을 내면서 조사원들은 묘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앞으로 나간다.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나도 묘지 안으로 들어선다.
풀을 자르며 나아가던 조사원 하나가 “발견!”하고 소리쳤다. 한인묘지를 찾아냈음을 다른 조사원에게 알리는 소리다. 풀을 베면서 묘지 하나하나를 뒤지는 탐색 조사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묘지 안은 수렁과 진창이 뒤섞여 있다. 조사원들 모두가 장화를 신은 이유를 알만했다.
이곳저곳에서 이장을 해간 웅덩이를 만난다. 물론 풀로 뒤덮인 웅덩이이다. 이런 곳에 발을 헛디디면 다친다. 무성한 풀에 가려져 있어서 묘지를 둘러싼 철책에 부딪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조사원들의 정강이는 멍투성이다. 모기는 땀이 나서 방충복이 몸에 붙어 있으면 그 부분을 뚫고 들어와 문다. 계속 일을 하며 움직여야지 쉬고 있으면 모기가 더 달려들어 문다.
비문을 읽지 않고도 러시아인 묘와 한인 묘는 한눈에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한인 묘는 묘비를 봉분 앞에 세우는데 러시아인들은 묘비를 봉분 뒤에 세운다. 게다가 한인 묘는 합장을 한 것이 유난히 많다. 가족묘만이 아니다. 더러는 친지 사이로 보이는 묘도 한 울타리 안에 있다.
묘역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자, 이쪽으로” 하는 반장 김기열 씨의 구호와 함께 조사원들이 자리를 바꾸며 땀을 닦노라면, 만세를 부르듯 달려드는 모기떼를 쫒느라 팔을 휘두르는 것도 잠시, “자, 정위치!” 하는 김기열 씨의 외침이 묘지에 울린다. ‘1번!’ ‘2번!’ 조사원들이 다시 묘지를 한 줄씩 맡아 일렬로 도열한다. “전진!” 김기열 씨의 목소리와 함께 한인묘지를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낫질 소리와 함께 숲 속으로 사라진다. 한인묘지를 찾아냈다는 “발견!”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발견된 묘지의 풀을 베고 성묘를 하듯 정리가 끝나면 멀리서도 보일 수 있도록 주변의 나무와 묘지철책에 일련번호를 부착한다. 그 뒤를 사진촬영을 맡은 조사원이 일련번호를 따라 사진을 찍고 자세한 묘지형태를 기록하게 된다. 훗날 묘지를 찾아올 유족들의 편의를 위해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하도록 주변정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이 현지시간 7시 기상, 9시부터 작업에 들어가면서 진행되는데, 점심시간이면 일단 숙소로 철수하는 것이 특이하다. 달려드는 모기와 벌레들 때문에 현장에서의 식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묘지 하늘에서는 까마귀가 우짖고, 들개가 출몰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사할린의 개들은 사자만 하게 ‘지겹도록’ 큰 몸집으로, 악마처럼 ‘끔찍하게’ 무서운 얼굴로, ‘잡아먹기라도 할 듯’ 짖어댔다. 사진작업을 하던 이은규 조사원은 송아지만한 개가 숲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작업을 일시 포기했을 정도였다.
나 또한 그들이 헤치고 나간 뒤를 따라 풀숲을 걷고 또 걸었다. 모기들이 쓰레기장의 파리 떼만큼이나 주변에서 날아든다. 자작나무 숲 속, 키가 가슴 높이로 자란 무성한 풀. 특히 잎이 넓은 머위는 왜 이렇게 무성한지.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걸치고 있는 옷이 젖는다. 이곳으로 오기 전날 짐을 싸면서 ‘이거 하나 넣고 나니 가방이 반일세’ 하며 투덜거렸던 등산화가 풀과 수렁, 진창을 밟고 나가는데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다. 먼저 떠나던 조사원들이 왜 꼭 등산화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키릴 문자로 쓴 이름 밑에 ‘리도길’이라고 한글로 적은 묘비에는 1907년에 태어나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숫자뿐, 비문이 없다. 이름도 없이 오직 사진뿐인 묘비도 있다. 단지 ‘고영양남씨지묘’라는 글자만을 적은 묘비도 보인다. 故南珍希之墓(고남진희지묘)라고 시멘트 기둥에 새기고 갓을 씌운 묘비에는 묘주가 ‘모주’라고 잘못 적혀 있다. KIM이라고 새긴 묘비가 보였다. ‘아, 이것도 한인 묘로구나’ 하면서도. 키릴 문자로 쓴 비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숫자만으로 그가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을 겨우 확인한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수백만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혼’이라고 수없이 외쳐온 그 원혼 속에 사할린에 끌려온 이들의 이름도 있다. 이제는 차가운 빗돌 속에 서툴게 삐뚤거리는 한글로 혹은 낯선 키릴어로 이름을 새긴 채 뼈에는 풀뿌리가 감기며 유해가 되어 누워 있는 이름들이다. 광복을 맞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일본에 의해 이 땅에 버려져야 했던 사람들, 귀국선을 기다리며 이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미쳐서 죽어갔다고 했다. 냉전시대의 분단 조국도 그들을 외면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사할린의 과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들이 껴안고 있는 과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 비석의 사진들이 겨울을 지나며 얼어 터져서 떨어져 나갔듯이, 이제 또 과거를 미래완료형으로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지난 역사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데…앞을 가린 자작나무는 왜 이다지도 푸르게 너울거리는가. 고개를 드니, 묘지 위 하늘에는 찢겨진 슬픔의 조각들처럼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내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쓰러진 묘비나 흙더미에 묻힌 것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예상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 모든 조사원들이 하나같이 들려준 말이었다. 단 한기의 묘소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이들의 어깨에서 견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 자신들이 놓치면 그분들은 또다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망각의 숲, 그 깊고 깊은 시간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조사원들 하나하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역사적 인식과 각오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숨 막히는 습한 열기와 꽃가루처럼 날아드는 모기떼와 싸우며 가시나무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결연한 의지가 그들의 눈빛 속에 번득이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목덜미를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조사원들을 뒤따르는 내 가슴에 그것은 기쁨이 되어 차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