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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과거는 완료형이 아니다 - (3)
한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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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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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 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 ]

3.

   
▲ 한수산 세종대 교수

38년 전의 사망진단서 한 장, 그것이 오선환 씨가 가진 전부였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을 통해 24년 전에 어렵게 구한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는 1987년에 사할린의 돌린스크시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1950년 소인이 찍힌 편지 봉투의 주소하나, 그것이 신윤순 씨가 가진 전부였다.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로부터 유언처럼 전해 받은 아버지의 편지봉투였다.

달랑 사망진단서 한 장, 그리고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 하나를 들고 60여년의 세월을 건너 아버지를 찾아간다니... 혈연이라는 끈은 이렇게도 질긴 것이었던가 싶었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야 했던 저분들의 생애를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71세와 67세. 아버지를 찾아가는 자식들이라고 하지만, 이분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어르신’이었고, 무료승차한 지하철에서는 경로석이 기다리는 나이가 아닌가.

여행 일정표에 따르면, 첫날 우리 일행은 유주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 한인묘역을 답사할 예정이었다. 유족들은 그 다음 날 사할린 시와 문서보관소를 돌면서 생존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 그 족적을 더듬어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아직 해방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해방은 무슨 해방입니까.”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여기 억류되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두 분의 목소리에는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결연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분은 내내 흘러간 세월의 너무나도 깊은 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무 늦었지요. 90년대쯤 왔다면 지도를 놓고라도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날 아침은 서늘했다, 우리는 유주노사할린스크 문서보관서로 찾아가기에 앞서 잠시 ‘사할린 한인 이산가족회’에 들러 여권을 맡겨야 했다. 단 며칠을 머물더라도 사할린에서는 별도의 체류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관광이라는 개념이 전연 없는 사할린이다.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가 전무하니 시내지도조차 구할 수가 없고, 우선 영어가 전연 안 통한다. 거리의 간판도 도로표지판에서도 영어를 찾아볼 수 없이 러시아어뿐이니,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문맹이 되어 버린 것만이 아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미개인과 다를 바 없다. 시내를 다녀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몇 가지의 낯익은 외래화장품과 흔히 명품이라고 하는 옷 상표, 그것뿐이다.
오직 자연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이는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이 있었다. 자작나무숲은 울창했다. 그 울창함 뒤로 죽죽 솟아 있는 원시림이 물결처럼 하늘로 닿아 있다. 유족들은 마음이 급해 있었다. 이산가족회 박순옥 회장에게 여권을 맡기면서도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온 각자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지금 가봐야... 뭐가 남아 있겠어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내 사연을 듣고만 있던 박 회장이 오선환 씨가 내민 사망증명원을 살펴보다가 성큼 일어섰다. “가봅시다!” 두 유족의 간절함이 박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건물 뒤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온 그녀가 문서관리소로 향하며 처음으로 웃었다. 그때가 11시 45분이었다. 전연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정표대로라면 오선환 씨가 사망증명원을 발행한 돌린스크시를 방문하는 것은 이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오 씨는 우리와 떨어져서 혼자 아버지의 사망지를 탐색할 생각에서 한인 동포인 민박집 주인을 통역으로 그의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늘 돌린스크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들과 12시에 만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수고비로 150달러로 약속해 놓은 상태였다.

시청 문서보관소 3층 복도에서 기다리기를 십여 분, 밖으로 나온 박 회장이 토막 난 한국말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이대식입니다. 나코야마 모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이대식. 주소는 돌린스크.”
나코야마 모콘은 오선환 씨의 부친 오맹근(吳孟根) 씨의 사망증명원에 적힌 러시아 이름이었다. 이곳에 끌려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살았었나 보았다. 성은 오에서 나카야마로 바뀌고 이름도 맹근을 일본식으로 읽어 ‘모곤’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그의 장례를 치른 사람의 이름과 주소까지 나오다니. 러시아가 보여준 문서관리의 철저함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돌린스크로 향하는 길은 숲과 초원이 어우러진 대자연의 한가운데로 뚫려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오 씨가 말했다. “한국이나 사할린이나 구름은 같은 구름이네, 저 구름을 보며 아버지는 얼마나 고향에 오고 싶어 했을까.”
구름만이 아니다. 바라보이는 풀과 나무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어쩌자고 풀과 나무들은 이다지도 한국의 그것과 닮아 있는가. 갑자기 오선환 씨가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혼잣말을 했다. “내 우에 이리 좋나. 내 아버지가 살던 델 와서 이래 보니, 우째 이래 행복하나.”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징용을 떠난 것은 그가 2살 때였다. ‘동생인 네가 가라’ 조부는 형 오창근 씨를 대신해서 동생인 아버지 오맹근 씨를 보냈다. 그 백부가 조부의 임종을 하고 눈을 감겼다. 누이가 7살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어머니와 혼자가 되었다. 21살에 홀로 된 그의 어머니는 누이마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기 하나를 바라보고 기르며 한세상을 사셨다고 했다. 국어교사로 평생을 보낸 오선환 씨는 영남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석사로 상주중학교 교감으로 정년을 맞았다. 아버지의 소재를 탐문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당시 자신의 2달 봉급이 넘는 돈을 주고 사할린 동포에게 부탁해서 구한 것이 바로 지금 가지고 있는 한 장의 사망증명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빌며 해마다 한가위가 되면 제사를 지내왔다는 오선환 씨. 슬하의 3형제가 모은 봉투 하나를 받아 가지고 왔다면서 이제 돌아가면 어머니 묘소에 사부곡(思夫曲) 하나를 적어 비석을 세우겠다고 했다.
돌린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2시였다. 일단 시청을 찾아갔으나 문서를 보관하는 부서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차를 되돌리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를 몇 번 우리는 하얀 새 건물로 단장한 문서보관소를 찾아갔다. 일교차가 심한 한낮의 더위로 우리는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선한 씨와 신윤순 씨가 가지고 온 서류를 가지고 담당자를 만난박 회장이 직원과 함께 문서보관 창고와 사무실을 오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지는 사이 우리는 차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저마다 복도를 서성거렸다. 낯선 잠자리에 어젯밤을 뒤채며 보낸 나는 피로가 몰려오며 눈이 쓰렸다.
‘아무쪼록 나와라. 나와라.’ 옆에 앉아서 아버지의 서류가 나오기를 간절해 하며 두 손을 부여잡고 몸을 굽혔다 폈다 중얼거리는 신윤순 회장의 낮은 목소리는 기도가 아니라 차라리 통곡이었다. 신윤순 씨가 갑자기 동행한 사할린 동포에게 ‘감사합니다’를 러시아어로 뭐라고 하는지를 물었다. 그가 ‘스페시바’라고 알려 주자 신 씨가 볼펜으로 손바닥에 스페시바라고 커다랗게 적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신 씨가 말했다. “서류를 찾으면 스페시바, 스페시바 하려고요.” 단 하나라도 현지어를 배워 감사의 말을 전하겠다는 그 애틋함이 절절하게 배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이 넘어섰을 때 박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희망과 실망이 한순간 날줄과 줄이 되어 뒤엉켰다. 1946년부터 2003년까지의 사망자 가운데 한인으로 추정되는, 생년월일이 다른 신 씨 4명을 찾아냈지만 신윤순 씨의 아버지 신완철이라는 이름은 없다. 가장 닮은 이름은 ‘신예원’인데 신완철과는 출생년도가 15년이나 차이가 난다. 오맹근의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를 치른 이대식은 94년 11월 사망했고, 그 부인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태의 진전에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며 서성이다가 말없이 차에 올랐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론가 달리기를 30여 분, 차를 내린 곳은 또 다른 관공서 앞이었다. 여기가 어디냐는 내 말에 박 회장이 한인2세다운 토막 난 한국어로 말했다. “빠그로브가입니다. 우리 지금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를 치른 사람, 이대식 씨 집 찾아갑니다.” 일행이 우르르 2층 사무실로 몰려올라가자, 뚱뚱한 중년의 여직원은 대뜸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서며 사무실 문을 잠갔다. 일처리가 세련된 박 회장이 이미 이곳에 전화를 해 놓았고, 여직원이 우리와 함께 이대식 씨 집으로 동행한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여직원과 함께 찾아간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 이대식 씨 부인이 사는 집은 비어 있었다. 여직원과 박 회장이 우리를 아파트 앞에 기다리게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사라진 지 10여 분, 머리가 하얀 이국적인 할머니가 건강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이대식 씨 부인 김순희 씨였다.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부인은 사흘 전 춘천의 요양소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퍼즐을 맞춰나가는 것 같은 우연히 이어지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담소를 나눈 후, 다시 차에 올라 빠그로브가 공동묘지로 향했다. “나무나 뭐 그런 표시가 없으면 어렵고... 40여년이 지났는데 풀로 망쳐져 있을 텐데...”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길을 달려 차가 묘지 앞에 섰을 때 박 회장이 말했다. 어제 찾아갔던 유주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묘역의 하늘을 가리며 솟아오른 자작나무, 가슴 높이로 자라서 앞을 가리는 풀,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한인묘지, 왼쪽이 러시아인 묘지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인묘지가 따로 있을 정도라면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한인이 살았다는 것인가.
묘지를 바라보며 터져 나온 절망이었으리라. ‘하이고’ ‘하아하아’ 그런 한숨도 탄식도 아닌 숨소리가 유족들의 입에서 내내 새어나왔다. 묘지를 살펴보자니 돌아가신 분의 대부분이 70년대에 묻혔다. 사할린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1910년에서 20년대 생이니까 다들 예순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천천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비석조차 있을 리 없는 묘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맨손으로 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자르면서 오선환 씨가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묘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묘역 밑쪽은 늪지대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크기가 작은 모기떼가 꽃가루처럼 날아들었다.

긴 시간이 흘러갔다. 봉분도 주저앉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숲 속으로 사라진 오선환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새기고 살아서의 행적을 깎는 기념비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를 새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흘러가기에,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잊히기에, 그 망각에게 파 먹힐 기억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동상을 세우고 돌을 깎아 비를 세우는 것이었던가. 죽어서 남김없이 사라져갔을 영혼들을 생각했다. 그 숲 속에 서서 마치 몰려드는 모기떼가 그것이기라도 한 듯 분노 속에 처절하게 조국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오선환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신윤순 씨와 함께 숲 속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사할린으로 끌려가고 나서 여덟 달만에 태어난 유복녀였다. 신 씨의 아버지 찾기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피징용자명부에서 부친의 소재를 확인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신완철로 불렸지만 그때 확인한 아버지의 호적상 이름은 신정철이었다.

사할린으로 온 후 처음엔 탄광에서 다음에는 나무 자르는 목재부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1950년 1월 29일 소인이 찍혀 있었다. 임종을 앞 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는 종이가 부풀게 낡아 있었고 알맹이조차 없는 겉봉뿐이었다. 신윤순 씨는 이른 봄의 별미인 쑥국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이른 봄, 어린 쑥이 싹을 틔우며 솟아날 때 그 쑥을 뜯어다 국을 끓이기도 하고 전을 부치기도 한다. 새봄에 어린 쑥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이른 봄에 맛 볼 수 있는 향취의 하나다. 그러나 신윤순 씨는 그 쑥을 먹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산 생활이 너무나 어려웠기에 그때 지겹도록 먹어야 했던 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사할린으로 떠나는 딸에게 그 어머니는 말했다고 한다. “죽은 아버지 찾아가는 네 생각하다가, 난 눈 물러 죽겠다.”

유치원 근무를 마친 이대식 씨의 딸 이명자 씨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햇살이 기울며 그늘이 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녀가 놀라운 말을 했다. 다카야마라는 동포가 살았던 집을 안다는 것이었다. 사망진단서에 적힌 아버지의 이름 ‘나코야마’가 발음으로 볼 때 ‘다카야마’일수도 있었다. 오선환 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내밀자 명자 씨는 놀랍게도,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집도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명자 씨가 말했다. “올애비들이 여럿이 모여 살았어요.” 그녀가 말한 올애비는 홀아비였다.

오 씨의 아버지가 살던 집은 소스노브가라는 마을,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들 ‘올애비’들이 모여 살았던 집은 그 후 러시아인이 살다가 지금은 폐가가 되어 있었다. 마당 가득 키가 넘게 풀이 자라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풀을 헤집고 들어가 허물어진 집안을 둘러보고 나서 오선환 씨가 마당 한구석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땅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흙에 집착하나.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농경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이국땅에서 버림받고, 차갑게 흙이 되면서 누구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죽어서 떠나가 버린 사람들, 잃어버린 조국을 신음하며 온 몸으로 살다 흔적도 없이 떠나간 사람들, 특히 사할린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산 사람들이 그렇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갈 것을 믿고,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여기서는 홀아비라고 불렀다. 그 홀아비들은 몇 명씩 모여서 살았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그랬으리라.

그리고 죽으면 묘비도 없이, 묘지의 철책도 없이 묻혔다. 작은 봉분으로 땅에 묻힌 그들의 자취는 세월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풀이 자라고 나무뿌리가 그들의 뼈를 감싸면서 흙이 되어 갔으리라. 순결함이란 무엇인가. 고결함이란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일까.
그리움만으로 그렇게 살다 묘비도 없이 이국땅에 묻힌 그들의 삶이 ‘술에 절어 있었다’ 것인가. 결혼을 하면서라도 여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했다면, 그래서 여기서 낳아 키운 자식들이라도 있다면 이렇게까지 허망하지는 않으리라. 백발이 성성한 아들딸이 여기까지 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덤을 찾아 숲 속을 헤매지는 않아도 되고, 배다른 형제들이 만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이라도 훔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끝내 정착을 거부하고 혼자 살며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그루터기조차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세월과 함께 그를 기억하던 사람들마저 하나씩 이 땅을 떠났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 준 친구의 가족과 아버지가 묻힌 묘역을 찾아냈지만 아버지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무덤은 사라지고 찾을 길이 없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터를 찾아 폐가 마당의 흙 한줌을 파들고 돌아서는 오선환 씨. 저녁 빛이 어리는 그의 뒷모습을 다만 지켜볼 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신윤순 씨, 아버지의 뼈가 삭아간 땅을 돌아보면서도 그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오선환 씨... 그들의 뒤를 따랐던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시간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이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때, 어머니 제가 할 일은 다 하고 왔습니다 하는 그 말을 하려고 왔던 겁니다. 저는 할 바를 다 했다는 생각입니다.” 비로소 그의 입술이 심하게 떨리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는 이들의 긴 여정, 시간을 역류해 갔던 기억의 모자이크를 또 다른 기억으로 새기며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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