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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과거는 완료형이 아니다 - (4)
한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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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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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한수산 세종대 교수
통토의 땅 사할린이라지만, 지난봄에는 무릎까지 오게 눈이 쌓였다. 4월 13일이었다. 아흔을 넘긴 박수남 할아버지는 눈 속에 갇혀서 문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이제 봄이 오면 올해는 딸기농사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고. 우리말로는 농막이라고나 불러야 할 한 칸짜리 집, 숲 속에 짓는 ‘다차’에서 딸기를 기를 생각을 꿈처럼 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시는 한국 땅에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절절하고 한 많고 헝클어진 삶이 시작된 내 나라 한국, 그곳은 이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 되어 있었다. 그가 아내의 마지막 병수발과 장례를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파트 퇴거와 기초생활수급자 자격 박탈이었다. 그는 3개월 이상 한국을 떠나 있을 때 체류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고흥 출신의 박수남 할아버지, 1943년 11월, 22세에 징용으로 사할린까지 끌려왔다. 질곡의 한국현대사와 함께 했던 한 세기, 90년의 생애를 그는 연도와 날짜까지 기억하며 들려주었다.
며칠 후면 ‘일본으로 돈 벌러 가기로’ 하고 누나 집에 가 있던 그에게 ‘빨간 딱지’(징용통지서)가 나온다. 여수항을 출발한 그의 삶은 홋카이도를 거쳐 사할린의 탄광으로 내던져진다. ‘사할린의 쿠시나이에 도착하니 째진 거(발가락이 갈라진 일본 작업화 지카다비) 하나씩 주데요. 그걸 신고 눈 내린 바닷가를 백 리는 걸었는데, 한바 주인이 와서 국수 한 그릇 먹이고 데리고 가데요.‘ 그렇게 오다스 탄광의 광부가 되었다.

일본 본토의 광부가 모자라자 사할린의 조선인 광부들을 다시 일본으로 끌고 간 이중징용으로 1944년 그가 일하던 탄광은 조업이 중지된다. 탄광에서 차에 실려 비행장 건설현장으로, 다시 코르사코프 항구 부근으로 끌려가 방공호를 파다가 해방을 맞는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어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아 팔며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러시아군이 진주한 후에는 징용자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자원해서 돌아가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60년대의 일이었다. “북한이 낙원이라는 말에 속아서 갔어요. 나랑 같이 있던 홀아비들도 많이 갔어요.” 그 무렵 도 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운명처럼 그를 찾아온다. ‘농편(농사짓는 데)으로 가자’는 그를 따라 이곳 브이코브 탄광지대 인근으로 와서 1년 남짓, 믿고 따라온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청년 박수남은 ‘꽃부리 영(英)자 쓰는 15살의 그 집 큰딸’ 영자와 결혼하면서 졸지에 어린 처남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 감자, 당근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다. 후에는 ‘장기근속으로 노력영웅 훈장도 받으며’ 철근콘크리트 공장에서 일했다. 첫아들을 낳자, 밝은 9월에 빛나라고 박찬구라고 이름을 지으며 슬하에 2남1여를 두었다. 그동안 고향으로 수없이 편지를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76년에 처음으로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훗날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온 이 편지 때문에 한국의 가족들은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감시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생애가 또 한 번 요동친다. 2000년 2월 23일 만년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영주 귀국했다. 뒤따라 의사였던 처남도 한국 모 병원에 스카우트되어 서울에 도착했지만, 공항에는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취업사기였다. 수술실의 마취기술자였던 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는 와중에 직장을 잃자 ‘해 먹을 게 없어’ 서울로 온다. 월 1백만 원을 받기로 하고 서울 명동의 식당에 취업했지만 그 딸마저 보름 만에 ‘나가려면 다른 사람을 구해 놓고 나가라’는 냉대 속에서 겨우 15만 원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조국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병명도 모른 채 한국의 병원을 들락거리다가 다시 찾은 사할린에서 ‘1년이나 늦었다’는 병원의 판정과 함께 손도 못 써보고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병수발과 장례를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안산의 임대아파트 퇴거와 기초생활수급자 자격 박탈이라는 통보였다. 차디찼던 조국의 기억을 뒤로 하고, 그는 사할린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2005년 5월이었다.

비극 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사의 강줄기 위를 풀잎처럼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작고 무력했던 한 개인의 생애, 이런 삶도 있었다니... 한 시간 넘게 차를 달려 브이코브 탄광지대 인근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포장 공사를 하느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길가, 조그만 버스정류장에 박수남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그 더운 날씨에도 양복을 입은 노인은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한 모습이었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차에 오르자마자 노인이 내민 것은 녹슨 깡통에 비닐을 깔고 곱게 담은 딸기였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그가 손수 텃밭에서 기른 딸기를 두어 움큼 따서 씻어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91세 할아버지가 기른 딸기를 묵묵히 베어 물며 생각했다. 정말 이분에게 한국은 무엇일까. 조국에, 시대에, 이념에 할퀴고 찢긴 한 평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비켜가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노인은 정갈했다.

그의 우리말은 90년의 세월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한방짜리에서 사는 게 얼마나 바빠?” (방 한 칸에서 사는데 얼마나 고생인가) “동삼에 먹을 거 다 절구고 말리고 단도리 해야 해.”(한겨울에 먹을 것을 다 절이고 말리고 챙겨야 해) 그는 힘들다를 ‘바쁘다’라고 했고, 직장을 ’일간‘이라고 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일본이 착취해 간 임금을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배곯으며 뼈 빠지게 일한 거. 돌려받아야지요.” 그래서인가. 그는 노구를 이끌고 사할린 한인들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박수남 옹의 기억을 떠올리며 흙먼지가 휘날리는 길을 따라 브이코프 탄광지대를 찾아갔다.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북쪽으로 50여 Km로, 이제는 폐광이 된 탄광촌은 휴일을 맞아 한적했다. 1945년 1천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혹독한 강제노역에 처해졌던 마을에는 아직도 떠나지 못한 한인들이 3백여 명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했다. 동행한 배덕호 KIN 대표는 몇 년 전 조사차 여기에 들렀을 때 고령으로 눈이 먼 할머니가 찾아와 조국의 소식을 묻더라고 들려주었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기찻길은 적막 뿐,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침목 사이로 잡초가 자라고... 탄광사무소 앞을 흐르는 강에는 조국을 잃은 이국의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그 시절의 비극을 말없이 이야기하는 듯 부서진 다릿발만 서 있었다.

마지막 날, 나는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서 있었다. 어딘가에서 닥터 지바고가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자작나무 숲 속을 차로 달리기 한 시간, 항구에 닿았다. 김홍지 사할린 한인연합회 회장과 함께였다. 고향으로 돌아갈 귀국선을 기다리며 평생을 독신으로 남았던 ‘올애비’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던 언덕을 지금은 한가롭게 유모차를 밀며 러시아 여인들이 지나가고,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는 위령탑이 은빛으로 빛나며 푸른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1945년 8월,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
     통토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4만여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는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분들을 내버린 채 떠나가 버렸습니다.
     소련 당국도
     혼란 상태에 있던 조국도
     이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 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곳 LNG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대우건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역사의 비극을 묻은 채 세월은 흘러갔다. 오늘 바다는 파도조차 없고, 코르사코프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침묵뿐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everything that I know, I know only because I love)”라고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썼다. 나 또한 사할린에 와서야 사할린 한인들이 품고 살아가는 비극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독일의 사죄와는 달리 전후처리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을 힐난하는 한국의 언론 학자에게 독일의 작가 귄터 글라스는 물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일제 강점기를 다룬 소설이, 노래나 영화가 몇 편이나 있는가. 독일을 무릎 꿇게 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과거사를 잊지 않은 유태인 바로 그들이라고.

용서하라,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너무 잊고 있다. 사할린 동포의 고난을 후세에 전하는 기념관조차 없지 않은가. 징용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은 고난의 기억만이 아니다. 서둘러 자료의 멸실을 막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통한의 시대를 증언할 것인가.

역사적 책무를 생각할 때, 사할린 동포를 위한 현실적인 조치도 서둘러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4명의 국회의원이 사할린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한 4개의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조속한 법안 통과는 그 동안 국가가 방기해 온 피해국민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우일 것이다.

귀국길에서였다. 사할린의 좁고 불결한 공항 대합실에서부터 전화를 하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짧은 반바지에 샌들차림, 어지럽게 칠한 발톱... 이 여자의 전화는 출국장 대기실에서도 계속되었고, 넓적다리까지 훤하게 드러낸 다리를 흔들어대면서 깔깔거리는 소리는 대기실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 여자의 전화는 활주로를 버스로 이동해서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공공의 장소가 무엇인지 아예 그런 의식이 없는 흐트러짐, 그녀가 부치던 짐과 들고 있는 소지품으로 보아 한인 동포가 분명했다. 어쩌면 오늘 사할린 동포들의 현지동화(同和)란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취재기간의 신선했고 충격적이면서도 서글펐던 내 기억들이 얼마나 감상적인 것이었나를 그 한인3세는 비웃고 있는 듯싶었다. 91세 박수남 할아버지가 들고 나왔던 깡통 속의 딸기와 모기가 들끓는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던 공동묘지에서의 서병철 씨 얼굴이 떠올랐다.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창밖으로 노랗게 흔들리는 꽃들이 바라보였다. 이제 내가 만나고 가는 현재진행형이었던 사할린의 과거는 다시 또 세월에 묻히면서 과거완료형이 되어 갈지도 모른다. 그들 살아 있는 1~2세들의 관심은 과거가 아니었다. 오늘 조국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하는 현재형이었다. 그러나 저 비석의 사진이 겨울을 지나며 얼어 터져서 떨어져나갔듯이 저들의 염원마저 과거완료형으로 묻혀가고 잊혀져가야 하는가.

지금도 공동묘지의 풀을 베며 나아가고 있을 조사원들을 생각했다. 사할린 한인사의 0년으로 우리는 그 기민(棄民)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첫걸음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무덤을 찾아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그들의 한걸음 한걸음에서 나는 둔중한 희망의 발소리를 느꼈다. 그들은 세속의 꿈을 나 하나가 아닌 ‘우리들’ 그리고 ‘함께’에 바친 젊은이들이었고, 이런 정신과 의지와 가슴들이 모여 저 묘지의 숲을 헤쳐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늦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고난의 역사와 겸허하게 그리고 진정을 다해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우리정부가 한발 앞서 사할린 동포들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한인 공동묘지 전수조사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으리라.

묘지조사로 시작되는 이 작업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적확한 로드맵이 없다. 다만 그분들의 한과 못 이룬 귀향에의 꿈을 한조각한조각 거두어 고국으로 모시고 돌아가는 날,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귀국선의 희망이 거기 담기리라. 그리고 이국의 어느 언덕에 그분들의 피맺히게 절절했던 염원을 담아 위령탑을 세우고 분향소를 차려 한줌의 향을 피워 올리며 원혼을 달래드릴 수 있을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후손으로서 무릎 꿇고 그분들을 만날 수 있는 그날을.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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