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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서 호남 호북성 기행-연수정, 황학루, 고금대, 신해혁명의 땅 무창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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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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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정

그날은 강남문화의 중심 도시인 구강시의 ‘홀리데이 인’에서 숙박을 하고, 2월18일 아침엔 손권의 책사였던 주유의 배장대로 알려진 연수정으로 향했다. 항상 심야까지 일을 하고 새벽녘에 조금 눈을 붙이는 필자로서는 아침 6시의 기상과 7시의 식사, 그리고 8시의 출발은 비몽사몽 상태였기에 아침 식사는 마지막 날 한번 먹은 게 전부다. 새벽잠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내겐 필요했다. 그렇기에 출발 직전까지 잠을 자는 쪽을 택했기에 점심 식사 시간이 가까워오면 허기를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버스 맨 뒤쪽 구석에 앉은 필자가 불쌍해 보였는지 동행한 일행들이 요거트나 삶은 계란, 과자 등을 챙겨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필자가 태어났을 때 어느 길 가던 스님이 필자를 보고선 ‘이 아이는 평생 먹을 복 재물 복은 남부러울 게 없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녀로 태어나 챙겨주는 게 천성이다 보니 가난은 팔자소관에다 재물에 관심가질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남과 비교해야 하는 것에 의미를 못 느낀 터라 남을 부러워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재물을 가진 부자는 결코 아니므로 그 말은 틀린 것 같은데, 먹는 음식은 어딜 가도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복 받은 인생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평소엔 군것질을 할 기회도 시간도 없어서 그런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었는데, 여행 중에 먹으니 의미 있는 별미였다. 삶은 계란은 연변의 명동 윤동주 생가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로스엔젤스에서 일행이 챙겨줘서 먹어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동서양의 여행지에서 삶은 계란을 챙겨 먹은 기억은 소중한 필자의 추억어린 재산이다.

한편, 약간 차가운 날씨에 연수정 근처에 내리니 호수 주변에는 현지 사람들이 형형색색 자신들이 속한 그룹의 유니폼을 입고 각자가 준비한 음악에 맞춰서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고 있었다. 연수정이 개관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시 그들의 태극권이나 춤을 보고 있노라니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단체가 너무 확대되는 바람에 중국 정부가 한때는 정치적 위협을 느껴서 단체 활동을 금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분위기는 없고, 되레 모두 건강을 과시하듯이 힘차게 율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생활에 누적된 스트레스를 전신 운동으로 아침에 풀어버리는 것도 하루의 활력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필자 같은 경우, 철야 작업이 많고, 낮에는 수업과 교무 활동이 많아서 주말이 되면 거의 파김치 상태로 쓰러진다. 나이가 드니 체력 기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요즘은 주말에 귀찮아도 테니스 코트에 가서 2시간 정도 뛰고 온다. 전신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쾌감이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주기도 한다. 사람은 역시 땀을 흘릴 정도로 움직여서 노폐물을 배출하고, 그 속에서 스트레스 발산도, 활력 충전도 하는 게 좋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 연수정 앞에서 아침 체조를 하는 중국인들

참고로 일본에서는 올 4월부터 Dance(춤) 수업이 공립중학교에서 의무화 된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크는 일본 아이들, 그래서 전차 속의 그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시끄러운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제된 생활을 미덕으로 하는 일본이기에 사람들은 좀처럼 크게 웃거나 자신의 표현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서 억지를 부리거나 화를 노골적으로 내는 경우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처럼 감정 표출을 억제하는 걸 도덕적 규범으로 여겨온 사회라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무관심하지만 사회 전체가 질서정연하고 조용한 편이다. 그런 상황에 컴퓨터 온라인 게임 등의 확산으로 집밖에 나가길 싫어하고 틀어박혀 사는 일명 ‘히키고모리 족’이 늘어나고, 실명을 사용하지 않기에 인터넷 등의 사이버 공간에다 자기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붓는 젊은 층들이 급증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과격한 네티즌 문제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으니 현대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1998년 이후, 연간 3만 명 이상이 자살을 하고 있다. 물론 1억 3천만 명의 일본 인구를 감안한다 해도 많은 숫자다. 한편, OECD 국가 중에서 한국도 자살률 상위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상은 1등, 엘리트, 명문, 명품 지상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사회 속성과도 관계가 깊다. 인생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좌절에서 재기하기 힘든 상황이고, 상위권 선호주의에서 파생된 ‘All in식 몰입형’ 노력가들이 기대치만큼 평가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삶의 회의를 느껴 ‘All or Nothing’ 형의 습관적 발상에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기에 이번 중국 여행에서 느낀 몇 가지는, 우리는 자신을 억제하기보다 적절하게 신체적 움직임도 필요하고 자기감정을 노래나 스포츠 응원 등을 통하여 소리로 표현하며 속병이 될 소재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필자는 우울증이나 알콜의존증, 자살 등의 사례를 직간접으로 많이 봐왔고, 교내 인권위원장을 맡으면서는 다양한 상담을 맡아 왔기에 사회적으로 시급히 대처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충분한 휴식과 정신적 케어, 힐링(치유)공간의 확보가 절심함을 느꼈다. 2009년도 7월의 마이니치신문에 의하면 국공립대학교 교사들 940명이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퇴직을 했는데, 그 해 병으로 퇴직한 전체 퇴직자 1893명의 49.7%에 육박했다고 하니 모두 삶의 굴곡에서 정신적 지탱을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비출 수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버티기 힘들어 정신적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이 급증한 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요즘은 고학력으로 좌절한 사람들 중에 다중적 성격(사이코패스)으로 자신의 열등의식 혹은 체면 등의 유지를 위해 합리화에 급급하는 심리적 성향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하니,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삶과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땀을 흘리며 전신을 움직여서 활기를 찾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적절한 표현 교육의 방법이라고 본다. 물론, 장애를 가지거나 움직이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학생들에게는 별도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다수가 좋다고 해서 다수의 결정만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70억 인구 중엔 단 한 사람도 DNA가 같은 사람이 없듯이 모두 천차만별의 개성이 있다.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급적 건전한 활동이 있으면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활력을 찾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에 맞도록 배려하는 여유를 가지고 함께 살려고 노력하는 사회, 이것이 문화 수준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두 어울려서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지혜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침 일찍 자신들이 선택한 무용팀이나 스포츠 단체와 함께 어울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신체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 참 좋을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일행 중에 몇 사람들은 추위 탓도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 가서 따라서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현지 사람들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런 스포츠 문화는 굳이 말이 필요 없다. 공감대만 형성되면 같이 즐기면 된다. 우리들의 어설픈 춤도 웃으면서 맞이하는 그들의 여유, 분명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일에만 쫓겨 사는 사람들보다는 행복 지수가 높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니 연수정이 열렸으니 들어오라고 한다. 2000년에 강서성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진 아담한 기와로 작은 성처럼 만들어진 연수정에 줄지어서 들어가니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높은 망루대는 아니다. 내부에는 주유와 관련된 삼국지 문헌 자료나 적벽대전의 설명, 혹은 당시 사용되었던 토기 도자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가운데 정원에는 괴석과 어우러지는 꽃나무로 앙증맞게 정원을 꾸며 놓았다.
다른 자료실에는 1911년 10월 10일에 무창에서 발발한 폭발사고가 발단이 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0월23일 밤에 구강의 신해혁명이 개시되었다는 설명과 더불어 당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한자에 익숙한 덕분에 중국 한문을 읽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물론 발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황학루

그러고 보니 오후 일정이 중국 3대 누각중의 하나인 황학루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무창을 떠올리니 근대사를 전공한 입장에서는 그 현장에 내 발로 서보고 싶었다.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 병탄 다음해에 일어난 신해혁명의 땅. 민족/민권/민생주의의 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중산 손문(쑨원)이 부패한 청조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 역사상 첫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한 혁명의 땅. 그 시대의 혈기가 전해오는 무창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주유의 흔적이 깃든 연수정을 뒤로 하고, 유유히 흐르는 장강을 보며 무려 3시간 반을 달려서 호북성 성도인 무한으로 이동했다. 시내로 들어선 뒤, 1700년 전의 오나라 손권 세력의 마지막 수도였던 무창구 근처의 큰 호텔 건물 앞에 내렸다. 금강산도 식후경. 1층에서는 거창한 결혼식으로 왁자지껄했고(결혼식장과 음식 먹는 곳이 다른 한국식 결혼식과는 달리, 신랑 신부와 이벤트를 즐기며 식사를 같이 하는 일본의 현대식 결혼식과 비슷했다), 우리는 그곳 2층에서 점심을 먹은 뒤, 아름다운 강남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황학루로 갔다. 80원의 티켓을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가니 신비로운 괴석과 작은 연못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꽃가지와 전통적인 건축 양식의 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정원이 우리를 맞았다. 참 아담하고 아름답다. 봄 여름 가을에는 이런 곳에서 홀로 독서와 집필에 몰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우리는 북적대는 관광객 사이에서 각자 적당히 흩어져서 황학루를 향했다. 낮은 언덕을 오르니 짙은 갈색 건축물에 날아갈 듯한 오렌지색에 가까운 노란 지붕의 황학루가 보였다. 누각은 생각보다 높아서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갔다. 연세 드신 분들은 엘리베이터가 별도로 있었다. 황학이 날아갔다는 최호의 시를 생각하며 누각의 꼭대기에 오르니 거대한 장강(양자강)대교 건너편에 넓게 펼쳐진 도시와 높은 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참 정교하고 아름답다. 내부엔 높은 천장에 담청색과 녹색의 용이나 봉황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고, 벽면 곳곳에는 명필가들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었다. 하늘을 향한 지붕 끝의 곡선이 인상적이었다. 화려했을 장강 유역의 역사를 더듬어보며 천천히 누각에서 내려오다가 모택동의 기념 종루를 거쳐서 밖으로 나왔다. 리옹에서 처음 중국을 왔다는 프랑스인 커플도 아주 괜찮은 누각이었다며 필자에게도 좋은 여행이 되라며, 다음엔 도쿄로 간다고 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오랜 역사만큼의 전통과 풍습과 아름다움이 있다. 중국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남겨진 아름다운 건축 문화가 현대를 숨 쉬게 하는 공간이 되고 있기에 인류의 문명으로서 소중히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 황학루에서 바라본 무한시 전경

잠시 달리다가 우리는 막역한 지기를 의미하는 고사성어 ‘지음(知音)’의 주인공인 유백아가 그의 거문고 음악을 알아 준 종자기를 만났다는 고금대를 들렀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기에 우정 어린 만남과 신의를 깨닫게 해 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백아는 종자기를 만난 뒤, 다음해에 다시 약속의 장소에 왔으나 이미 종자기는 타계를 하였기에 유백아는 종자기의 무덤 앞에서 벗을 위해 마지막 거문고를 탄 뒤에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벗이 없기에 거문고를 타는 일을 접었다는 이야기이다. 인생의 벗이란 결국 많은 사람보다 진정 나를 알고 위해주는 소중한 지기 한 두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로맹 롤랑이 익히 강조했지만, 나이와 더불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지는 듯하다.

그들의 우정 어린 일화에 친근감을 느끼며 입구 전시관의 왼쪽 문으로 들어갔더니 안쪽 사당 앞에 다양한 분재들과 수목, 기념비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나온다. 나무 옆을 걷자니 거문고 연주는 피곤해진 심신을 감싸준다. 감미로운 이 곡은 필자가 간혹 부르기도 하는 아름다운 순정을 노래한 곡이다. 대학원 제자가 졸업하면서 중국으로 귀국할 때, 필자에게 테레사 텡(등려군)의 중국어 CD를 주고 갔기에, 한 때는 출퇴근길에 자주 들었다. 음악을 남달리 좋아하고 삼국지 속 ‘신의’를 느끼려고 여행에 참가했던 필자로선 좋아하는 음악에 젖어 고금대의 ‘지기와의 만남’의 땅을 걷는 그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포근해진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현지의 노인이 물통의 물에 붓대신 빗자루 같은 막대로 한시를 근사하게 시멘트 바닥에 적으며 그 의미를 되 뇌이고 있어서 한참 신기하게 봤다. 모두 한시의 명필을 오랫동안 배워오고 즐겨온 사람들인지 어딜 가도 넓은 공간에서 시멘트 바닥만 있으면 물과 막대기 붓으로 글을 적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보기 좋은 문화 풍습인 것 같다.

고금대에서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황학루 바로 뒤에 있는 신해혁명의 시발지가 된 무창봉기(武昌蜂起 혹은 무창기의; 武昌起義)의 장소로 갔다. 예정된 코스는 아니었으나 근대 역사의 중요한 장소였기에 반드시 가야한다고 해서 찾아 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황학루 아래에 넓게 자리한 기념관 쪽으로 가자니 가운데 쑨원(손문)의 동상이 맞이한다. 이미 신해혁명 무창기의 기념관은 문이 닫혀 있었고, 넓은 입구 광장 옆으로는 무창 혁명 당시의 상황이나 호북성의 혁명 단체 사진 등을 전시한 설명문이 즐비하고, 동상 옆에는 쑨원의 아내이자 송미령의 언니였던 송경령(쑹칭링,宋慶齡)이 1979년에 ‘신해혁명 무창기의 기념관’이라고 제호를 적은 기념석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생 송미령의 남편 장개석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그녀는 손문 사망 후 국공합작에 진력하지만 국공 분열이 되자 베를린 등의 외국을 전전하게 된다.

신해혁명은 각 지역의 신군과 무장병력의 회당 등 혁명조직들에 의해서 성공을 했는데, 리더였던 손문이나 황흥 등의 절대적 지지 세력은 당시의 국제 사회를 일찌감치 보고 돌아온 유학파들이었다. 기존의 부패적인 봉건 체제를 바꾸려는 근대적 움직임은 남녀 학생들을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고, 1905년에서 1906년 사이에는 연간 1만 명 전후의 중국인이 일본 유학을 하게 된다. 국제사회의 사상적 조류와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쟁취를 목적으로 한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은 그들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폐쇄된 구체재의 청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중국을 위하여 개혁 혹은 혁명을 일으켜서 중국을 구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식을 드

   
▲ 황학루에 있는 모택동 기념석

높이게 된다. 그런 혁명 의식이 고조되고, 일치단결의 혁명의 결의를 하기 위해 도쿄의 아카사카에서 1905년 8월에 신해혁명의 기본이 된 정치 결사 동맹회(중국 혁명 동맹회에서 중국 동맹회로 개칭)를 결성한다. 이때 총리에는 손문, 서기에는 황흥(당시의 주된 멤버로는 孫文,胡漢民,汪兆銘, 陶成章, 章炳麟, 蔡元培, 秋瑾, 黄興, 陳天華 등이 있었다)이 뽑혔다. 아이러이컬하게도 신해혁명을 지지한 일본 측 배경에는 일본의 국수주의적 우익의 거두였던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한국 병탄의 막후 인물로, 1908년에 주차헌병대사령관으로 착임한 아카시 모토지로의 어드바이저였다)나 도우야마 미츠루(頭山満)등이 직접 관련되었다. 일본 측의 혁명 지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원을 받으면서도 중국의 변혁이 필요했음이 당시의 현실이었고, 중국의 신해혁명의 의지는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큰 여파를 남기게 된다.

참고로 혁명 당시 급진적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추용(秋容)의 '혁명군'이란 책자에는 “우리 중국이 독립을 원한다면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중국이 세계열강과 나란히 설려고 하면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중국이 20세기 신세계에 오래 존재하려고 한다면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가 지구상의 이름 있는 나라, 지역상의 주인공으로 있으려고 한다면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혁명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하는 길이고, 혁명은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새로운 중국의 시대를 만들기 위한 혁명을 역설하였다.

이미 100년이 지난 역사지만 우창봉기의 땅에서 썩어가던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민족과 인민과 국가 통일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던 그 땅은 지금은 깔끔하게 그 날을 기념하는 장소로 정비되어 있었다. 그 뒤의 제국주의 열강이 밀려오는 폭풍우 속에서 위안스카이와 타협한 뒤, 중국도 휘청거리며 역사적 오점을 남기게 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려했던 뜻으로 혁명을 일으켰던 우창기의 기념관은 황허루의 고풍스런 아름다움과 더불어 무한의 상징으로 유유히 자리 잡고 있었다.

   
▲ 황학루 모형

이날은 의미 있는 사적지를 둘러보고 가슴 가득한 충만감으로 차 있었기에 식사에 대한 기대도 없었는데 돌아오면서 초나라 음식으로 유명하다는 큰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1000명 이상은 간단히 수용할 수 있는 대단히 큰 식당이었고, 입구에는 양쪽으로 20명 정도의 전통 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우리를 반기며 인사를 한다. 손님으로 그 넓은 공간의 테이블이 꽉 찬 1층 홀 가운데 무대에서는 비파나 거문고, 아쟁을 켜는 하얀 전통복 차림의 여성들의 연주가 저녁 식사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고 있었다. 우리는 2층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을 즐기며 가이드 신양이 한턱 쏜다며 가져 온 호북성의 맥주로 건배를 한 뒤, 초나라 전통 음식에 하루의 피곤을 내려 놓았다. 마침 필자의 옆 자리에는 언변 좋은 정지민 씨가 앉았는데, 그녀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지 일본의 이런 저런 상황을 묻는다. 산문 수필 등의 글을 적는 그녀는 사회의식도 있고 역사 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나머지 일정 중에도 좋은 대화를 나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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