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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서 호남 호북성 기행-동정호와 악양루, 멱라의 굴원사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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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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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과 아마존 다음으로 세계 3번째로 긴 6,300km의 장강(長江)과 서울의 여섯 배 크기로 중국 제2의 담수호를 자랑하는 동정호(洞庭湖, 호북과 호남을 가르는 호수)가 교차하는 인구 55만의 고도 악양(岳陽,웨양)은 고려 충혜왕이 유배를 와서 세상을 떠난 곳이라고 하니 한반도의 슬픈 역사와도 관계된 땅이다.

   
▲ 파릉(악양) 광장에서 아침체조를 하는 일행들

우리는 서둘러서 강남의 3대 누각(호북의 황학루、호남의 악양루、강서의 등왕각)중의 하나인 악양루를 향했다. 두보 등의 유명 시인들이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많은 시를 적었다는 악양루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개관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넓은 파릉(巴陵, 악양의 옛 이름)광장에는 그리스 조각상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동정호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꽤나 쌀쌀했다. 그때 오길순 단장이 갑자기 국민체조를 하자고 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이래 처음으로 아침 체조를 하게 되었다. 길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웃었지만, 정신없이 일에 쫓겨 사는 필자가 언제 다시 이렇게 아침체조를 할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니 코트를 입은 채로 즐겁게 참가를 했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추억을 만든 것 같다. 오길순 단장의 재치에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이 되어 광장을 가로질러 왼쪽의 끝이 보이지 않는 동정호를 바라보며 악양루 입구로 들어가자니 아기자기한 기념품 상점들이 양쪽으로 즐비하다. 애니메이션의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에 나올 듯한 고풍스런 분위기가 마치 중세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길 가운데에는 우물 같은 곳이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박으로 입힌 거북이 조각상이 있었다. 결코 요란스럽지 않고 분위기 좋은 상점가를 거쳐서 밖으로 나오니 악양의 역사를 새겨 놓은 돌벽이 세워진 광장이 나온다. 악양루의 문화재 지정 안내석이 보인다. 지금까지 봐 온 시설과 달리 그 지역의 문물 보호단위가 아니라 중국 국무원이 1988년에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한 곳이었다. 그만큼 국가적 수준의 보물로 가치를 평가받는 곳이다.

   
▲ 동정호와 악양루


입구를 들어가니 조경 설비도 잘 갖춰져 있고, 분수 사이로 중국의 각 왕조별(당, 송, 원, 명, 청)로 만들어 놓은 악양루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행의 몇 분이 중국 시대의 건축 양식의 특징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계셔서 청조까지의 악양루 특징을 설명해 주셨다. 용의 춤을 그린 듯한 곡선위에 얹힌 기와 담벼락 너머로 잔잔하게 동정호가 보이고, 정원에는 분수 물로 촉촉이 목을 적시는 꽃나무들과 어우러지는 차분한 회랑을 따라 걷자니 목가적인 은은함에 나 자신도 숙연함이 느껴졌다. 우리 일행 외에는 방문객이 적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필자는 황학루보다 이 악양루의 호젓하고 아늑하고 정교하게 장인의 손길이 닿아 있는 건축물이 참으로 편하고 좋았다.
문호를 기린 쌍공사 라는 사당을 지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니 노란 기와로 얹은 지붕 위엔 마치 장군의 투구를 보는 듯한 아름답고 굵은 곡선이 하늘을 향한 악양루가 나타난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누각에 오르니 확 트인 동정호와 그곳에 마련된 녹색 지붕의 정자, 그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나무들 사이에 비쳐지는 악양루 지붕자락의 섬세한 조각과 함께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럽고 무거운 마음을 내리게 해 주는 이곳에서 집필 활동이나 하며 동정호와 푸른 나무와 기암괴석으로 꾸민 정원에 호젓하게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트레스 생활에 찌든 탓인지 온통 힐링 공간처럼 느껴지는 악양루 주변을 거닐면서 그런 상상으로 푹 젖었다.
가능한 자연적 형태로 보전하려는 의도인지 별다른 과학적 기기는 설치되어있지 않았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악양루 밖에서 전해오는 빛과 풍광이 한층 더 아름답게 보였다. 2층에는 모택동이 두보가 악양루에 올라서 적었다는 시에 대한 글 판이 붙어져 있었고, 3층에는 조용히 앉아서 실내에 장식된 한시나 바깥 경치를 관망할 수 있도록 넓은 공간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간이 멈춰진 듯한 고요함과 아름다운 환경… 너무 정신없이 내 삶을 채찍질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성이 되는 시간이었다.

   
▲ 악양루

언젠가는 차분히 이 정원을 걸으며 악양루와 동정호를 다시 한 번 보러 오리라는 미련을 두며 차에 오른 뒤, 우리는 멱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다양한 생선 요리와 고기 요리, 찹쌀로 만든 디저트 등 음식 요리가 깔끔하고 다채로웠다. 소도시 멱라에서 꽤나 좁고 꾸불꾸불한 시골길로 멱라강 줄기를 따라 우리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초나라의 시인이자 외교수완이 높았던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기원전 278년)의 굴원묘와 굴원사당으로 이동했다. 굴원하면 일본 근대미술의 대가인 요코야마 다이칸(横山 大観)이 1898년에 굴원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단오절 관련설과 우국충신으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초나라 왕족 중에서도 명문가의 아들이었기에 회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정치에서도 탁월한 능력으로 군사를 맡기도 했으나 그의 우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질투하던 진나라 파벌의 모략으로 인해 회왕의 신임을 잃게 된다. 게다가 진나라의 획책을 갈파한 굴원이 진나라 소왕의 방문 요구에 응하지 말라고 간곡히 설득하지만 회왕은 그의 아들 자란의 말을 듣고 갔다가 진나라에 감금되었다 병사하게 되고, 이후 굴원을 싫어하는 일파들의 중상모략으로 강남에 좌천하게 된다. 이곳에서 9년여의 세월을 보내던 굴원은 진나라에 조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의 지배하에 살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멱라강(汨羅江)에 자신의 시신이 떠오르지 않도록 돌덩어리를 몸에 묶고선 투신을 한다.
그의 충절어린 마음에 마을 사람들은 물고기들이 그의 시신을 먹지 못 하도록 찹쌀 등의 떡을 짚이나 갈대 잎, 대나무 잎 등으로 묶은 쫑즈(粽子)를 강에 뿌렸고, 그 때부터 단오절 음식으로 먹게 되었다고 한다. 이 쫑즈는 동남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디저트 감각의 ‘치마키’로 불린다. 일본의 각 지방에 따라서 삼각형이나 원형 등으로 모양이 다르고, 내용은 찹쌀로 만든 주먹밥 안에 다양한 양념이나 고기 다진 것을 넣는다.

   
▲ 굴원사당

한편, 충신 굴원의 시신을 찾겠노라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멱라강을 뒤졌다는 일화에서 연중행사인 멱라강 Dragon Boat(용선)경기가 열리기도 한다. 봉건주의 전제 정치에 필요한 우국충절한 신하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 사안이었던 인류사를 생각한다면 그런 굴원의 죽음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는 인물관이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꺾이면서까지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프라이드(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층 인사라면 개인적인 죽음은 무책임이라는 발상이 필자의 생각이다)와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그 후, 중국의 수많은 애국지사의 거울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 인물들을 칭송하여 절대적 충신을 양산해야 했던 권력가들에게는 그를 기리고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했을 것 같다. 용선 행사는 물론, 굴원 사당내의 별실에 설치된 벽면 가득한 각종 문화유산 등록패나 정부로 부터 받은 문물 단위 인정패 등의 화려함이 그러한 역사를 말하는 듯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기분 좋을 멱라강가에 쭉 뻗은 포플러 나무길 옆으로 들어서서 굴자사(屈子祠, 청조때 멱라강 근처에서 산쪽으로 옮김)에 도착했지만 인기척은 없고, 퇴색된 분위기만 칙칙한 빗방울과 더불어 우릴 맞이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붉은색 기둥과 청록색 지붕의 색 바랜 굴지사 입구 건물이 나타난다. 어느 일행은 어떻게 건물 손질도 안했냐고 투덜거리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손길이 닿은 깔끔한 시설물 보다는 차라리 굴원의 역사에 어울리는 사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마천이 적은 ‘史記 屈原 列傳’ 내용이 걸려있고, 입구 쪽 굴원의 큰 초상화 맞은편에 굴원사당이 설치되어 있다. 굴원의 우국심경이 그려진 그의 대표적 시 ‘이소(離騷)’, 초나라 때 사용되던 물건들, 굴원을 찬송한 충렬국혼의 자료실들을 돌아보며 정원의 회랑을 돌아 나오니 굴원을 주제로 글을 적었던 노진 같은 문인들의 작품 진열실에 다양한 책들이나 호남백경의 하나로 인정된 기념패등과 더불어 각종 굴원 관련의 우표나 굴원의 장례식 때 참석했던 두보 등의 시인들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 굴원사 내 천문단

사당을 나와서 왼쪽 숲속 길로 들어가니 굴원상이 나타나고 그 뒤쪽 정원 길과 양쪽 회랑의 각종 한시가 적혀있는 길이 마주치는 곳에 자료실을 겸한 구장관이나 이소각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것을 보면 한참 손질을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디선가 굴원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여 풀숲의 향기와 함께 필자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굴원사당에서 멀리 멱라강을 내려다보노라니 주변엔 집 한 채 없는 자연 속이었다. 그의 뜻을 새겨보려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먼 길을 왔더니 굴원의 영혼이 깃든 멱라의 땅은 너무도 고요한 침묵으로 우리에게 조용히 그를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삶과 의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숲 속 정원을 거닐며 자연 속에서 숙연히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굴원, 이번 필자의 여정에서 남겨진 그의 흔적은 크다.

버스에 오른 우리는 다시 한참 시골길을 달려서 오늘의 숙소인 호남성의 성도이자 진나라의 주요도시로 발전해왔고,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의 땅으로 유명한 상업도시 장사(长沙,창사)로 향했다. 버스 이동시간이 길었기에 노동학 전문이신 임종렬 선생님과 우리를 배려해 주신 유프라 여행사의 유두경 이사, 이상순 씨나 공해진 씨, 송경순 씨, 그리고 권현옥 씨와 노정숙 씨 등, 많은 분들이 위트나 다양한 화제로 그 공간을 유익하게 만들어 주셨다. 이야기나 음색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숙박 장소인 장사에 도착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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