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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중국 강서 호남 호북성 기행 - 모택동 생가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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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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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는 필자의 대학과 자매결연 한 호남사범대학이 있는 곳으로, 첨단 하이테크 단지 조성이나 제조업 등의 외국인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서 한국, 일본, 유럽 등의 투자자들에 의한 개발 사업이 급격히 늘고 있고,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건축 붐인 관계로 공기나 물이 맑은 곳은 아니다.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새로 지은 호텔에서 묵었는데, 전날 저녁부터 맥이 빠지더니 심야부터는 고열이 났다. 아침엔 빈혈까지 겹치기에 일어날 수 없어서 결국 6일째의 여정인 평강의 두보 묘와 두보 사당, 악녹서원과 애만정, 금루옥의 전시로 유명한 마왕퇴한묘 등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호남사범대에서 국제 심포지엄의 초청 기회를 만든다는 지인 교수의 연락을 받은 터라 다음에 보러 가야겠다는 위안을 삼으며, 준비했던 감기약을 먹고 호텔에서 잠에 빠졌다.

   
▲ 창사(장사)의 거리
세찬 빗소리에 잠을 깨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넘고 있었다. 미네랄워터 두 병을 마신 뒤, 넓은 호텔방에서 모택동이나 유소기, 호요방, 주용기 같은 중국 공산당 혁명 인물을 배출한 땅 장사를 생각하며 이 땅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 1937년 중일 전쟁 후에 항일 운동을 전개했고, 여기서 회의 중에 칼을 맞은 적이 있는 땅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 국권과 민족의 얼을 되찾아 보겠다고 생을 바쳤던 수많은 항일 의병들의 의지와 발길의 흔적이 중국 곳곳에 남겨져 있지만 멀리 호남성 장사도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김구… 그러고 보니 필자는 백범의 기억이 남겨진 땅을 제법 다녔다. 그가 칩거를 했던 하동의 쌍계사도, 자매학교인 공주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마곡사를 갔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기회를 봐서 백범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빗속의 희뿌연 거리를 내다보았다. 일어나니 휘청거려서 누운 채로 책을 좀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저녁 9시경에 우리 조장인 김승희 씨가 불렀다. 내일 마지막 여정인데 서로 여행 이야기나 하자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굶은 터라 그곳에 준비된 과일을 좀 먹고 나서 별도로 가이드가 가져다 준 사과를 먹고 있으니, 유이사가 로비에 내려오라고 해서 갔더니 몇 분이 이야기를 나눈다. 오길순 단장이 건강 챙기라며 청심환을 넣어 주시기에 맥없이 하루를 보낸 입장에서는 그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회자정리. 정들자 이별인지 벌써 여행 마지막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엔 전날 굶은 탓에 아침을 일찍 먹고 우리 일행은 짐을 챙겨서 소산으로 향했다. 물론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 1893~1976)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모택동은 어릴 때부터 혁명 운동에 가담하며 그 발판을 굳혔으나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5,000만 명 이상을 희생시켰고, 공산주의 혁명 세력을 확보하면서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지만 중화인민 공화국의 초대 주석으로 중국 근대사를 이끈 위대한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 화폐에 새겨진 그 얼굴은 중국 땅 어딜 가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고, 의심이 많아서 측근조차도 신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 9월9일에 베이징서 사망한 모택동의 시신은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거대한 권력과 84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한 수많은 위업들이 왠지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84년의 삶 속에 희생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이고, 생활이 너무 문란했던 탓이리라.

   
▲ 모택동 생가
영웅호색이란 미명으로 정신적 황폐함을 포장해온 권력세도가들의 불안했던 나날이 편하고 행복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과 더불어 빗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모택동 광장을 지나서 오른 쪽 언덕길로 올라가니 제법 큰 벽돌로 된 기와집이 나타난다. 실내 사진은 절대 찍지 말라고 한다. 줄지어있는 사람들을 따라 모택동이 살았던 옛 흔적을 느끼려 들어갔더니 그렇게 넓거나 화려한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되레 소박하고 솔직하게 꾸며놓은 것 같았다.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는 이 ‘모택동 동지 故居’ 의 내부는 부모님의 침실이나 모택동 혹은 형제가 별도 방을 사용했던 흔적, 부엌과 식당, 집 중간의 자그마한 공간 등이 정리가 되어 있었고, 밖으로 나오니 집 뒤엔 작은 연못과 차밭 등이 빗물에 젖고 있었다. 이런 시골에서 전 중국을 장악했던 인물이 나온걸 보면 사람의 운명이란 반드시 명문가의 완벽한 환경이 주어져야 잘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되레 없이 살아 온 사람들이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서 자신의 삶을 펼치며 역사를 만들어 온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택동의 삶이 결코 편한 삶은 아니기에 부럽지는 않으나 중국을 뒤흔든 인물이 이런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산골에서 태어났으니 시골 도시출신 운운하며 차별적인 표현으로 과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릇이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다시 느껴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기에 우산 가진 분 옆에 가서 같이 걸었다. 모택동 광장에 이르니 중국의 다른 시설답게 크고 넓게 광장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보는 가운데 붉은 색 카펫이 깔린 모택동상 앞에 꽃다발을 갖다 바치며 예를 하는 사람이나 단체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찬다. 광장의 곳곳에 붉은 색으로 모택동 관련 글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들이 놓여 있고, 광장 왼쪽에는 모씨 집안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흔들리는 대나무 잎 위로 빗물이 계속 떨어지기에 서둘러 버스로 왔더니 김재란 씨가 이런 날씨에는 군고구마가 별미일 것 같다
   
▲ 모택동 동상
고 사서는 모두에게 나눠준다. 참 섬세한 배려심이다. 일본에서는 군고구마 하나가 500-1000엔(6천원-만 삼천 원 정도)하기에 비싼 편이고, 무엇보다도 군고구마 파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맛있게 먹었고, 잠시 차를 달려서 현지의 소박한 음식으로 점심을 했다. 돼지고기 찜이나 생선 찜 외에는 야채 요리가 많았는데, 주로 그 지역의 야채나 산채라고 하여 모두들 공기 맑은 곳의 야채 산채 요리를 즐겼다. 점심을 먹고 규모가 큰 기념품 판매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마지막 일정인 전쟁기념관을 가는 버스 속에서는 임 선생님이 열심히 헌신했던 모택동의 숨은 여인 장옥봉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신다.
글쎄, 우스갯소리로 인상 깊은 장옥봉의 헌신적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지만 임 선생님이 모 유명 인사의 장학금으로 격리 공부를 하실 때, 부인 고경숙씨가 고충의 세월을 보낸 것을 익히 잘 아는 필자로서는 뭔가 씁쓰레하다. 아무리 천하의 영예스러운 지명이었다 할지라도 어린 딸아이와 신혼의 남편을 버리게 하고, 자신의 수발을 들게 하면서 숱한 여인들과 정권 내부 정보를 관리하게 하면서 79세의 나이로 장옥봉에게 딸을 임신시키고, 마지막에는 맹금운의 품안에서 죽어간 모택동([붉은 왕조의 여인들]참조)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시대의 역동에 결코 지지 않고 엄청나게 터프하고 파워풀하게 세파를 헤쳐나간 모택동이었지만, 성적인 면에서는 동물적 본능을 절제 없이 표출했던 인물이기에 황폐해진 마음에서 의심증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았건만 그는 결과적으로 어떤 행복을 안고 갔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마지막 일정인 호남성의 호남 열사 기념관에 들렀다.

   
▲ 장사의 열사기념관
엄청난 규모의 큰 공원의 가운데 길을 따라서 기념관으로 들어가니 대리석으로 된 원형 공간의 추모하는 방을 지난 옆방에는 수많은 혁명의 희생자들이나 열사로 추모되는 인물들의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만 29세로 모택동의 명예를 위해 그만을 사랑하며 모택동과의 아들 셋을 낳은 양개혜의 앳된 사진도 보인다. 그녀가 사랑했던 모택동을 감싸며 총살을 당할 때 모택동은 이미 다른 여인과의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사진을 보다 보니 왠지 얼마 전에 이혼을 당한 타이거 우즈와 오버랩이 되었고, 결국 모택동과 가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낳았지만 죽음에 임해서는 그녀를 지켜줘야 했을 모택동은 다른 여자와의 사랑에 취해 있었으니 그녀의 삶은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도 났다. 추모 공간에는 신민주주의 혁명 시기와 구민주주의 혁명 시기로 나눠서 사진 혹은 당시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져 있었다. 원형 공간 가운데는 모택동의 글이 새겨진 하얀 대리석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인간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밖으로 나와서 버스에 오르니 제법 시간이 되었다. 기념관을 출발하여 3-40분 정도 달리니 장사 공항이 나온다. 우리는 그동안 같이 다녀줬던 가이드 신양과 작별을 나누고, 짐을 맡긴 뒤,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큰 공항은 아니고, 쇼핑을 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었다. 멀리서 유이사와 정지민씨가 있기에 갔더니 커피 한 잔이 한국 돈으로 12,000원이라서 쓴 커피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아직 커피 가격이나 초콜릿 가격이 비싼 편임은 익히 유학생들을 통해서 알고 있는 터다. 장사의 쓴 커피를 얻어 마시면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니 내 자리가 마침 부부동반 했던 장진영씨 남편 자리였기에 자리를 바꿔달라고 했다. 선심을 쓰는 척 바꿨더니 상대는 에코노미에 나는 비즈니스 석이었다. 역시 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복이 들어오나 보다. 웃으면서 옆 자리의 김재란 씨나 이영 묵씨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인천 공항으로 왔더니 벌써 밤 11시에 가까웠다. 필자가 묵는 개포동 친구 집 근처로
   
▲ 장사의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경극
가는 정지민 씨랑 허급지급 정신없이 공항버스를 타느라 모든 분들께 개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거자필반’,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하며 일단은 버스를 탔고, 버스 내에서 오길순 단장이나 상향희 씨를 뵙고 인사를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과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진 뒤, 캠퍼스로 돌아와서 신학기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얻어 온 많은 자료들과 역사 인식, 강남문화권에서 둘러 본 인물과 자연, 인간 본연의 자세 등을 정리하고 생각하여 이번 신학기에는 많은 내용을 우리 학생들에게 전해줄 것을 생각하니 머릿속은 벌써부터 수업 내용으로 꽉 찬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발로 확인한 나만의 중국 강남 문화를 전달하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이번 기행문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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