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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기고 > 이수경 교수의 日 나가노 한국 사적지 탐방
힐링의 땅 나가노에서 한국 사적지 흔적을 만나다-(2)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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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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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코치 주변 풍경

1986년 여름에 필자가 처음으로 가미코치를 찾았을 때, 신슈대학교 학생들이 경영하는 300엔짜리 텐트에 머무르며 아즈사 강물 옆에서 현지의 학생들이 만들어주던 카레 밥을 먹으며 캠프 교류를 즐겼던 것이 싱그러운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은 뒤, 우리를 기다려주던 그 택시 기사를 만나서 사완도에서 급히 노리쿠라(乗鞍)고원으로 향했다. 1시간 가까이 장관을 이루는 설산을 따라 높은 고원을 오르고 좁은 산림도를 조심스레 올라가서, 구불거리는 협곡 아래로 한참을 가자니 짙은 유황냄새가 퍼지는 시라호네(白骨)온천이 나왔다. 가미코치에서 바로 왔으면 30분 정도로 올 수 있지만 지금 붕괴된 도로 건설을 하느라고 그 길은 폐쇄되어서 둘러 온 것이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기에 유일하게 온천욕을 할 수 있는(대부분이 숙박예약자 우선)곳으로 가서 유황냄새 진한 온천을 체험했다. 입욕료 700엔의 감동은 마치 짙은 삶은 계란 냄새 같은 유황 냄새가 밤까지 이어지는 에피소드로 기억이 되었다. 우린 숨겨진 은신처 같은 시라호네 온천을 뒤로하며 일단 바깥 세계로 나왔다. 마츠모토에서 고속으로 한 시간 가량 달려서 나가노시에 예약한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묵었다. 인터넷에서 아침 식사가 괜찮은 곳으로 검색을 해서 찾은 곳인데, 신슈소바는 물론 현지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로 깔끔하고 풍부한 메뉴가 있어서 다양한 신슈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 근처의 젠코지(善光寺)로 향했다. 입구 근처의 유료 주차장에 차를 둔 뒤, 젠코지 정문을 향해 가다보니 역사가 깊은 사찰이라서 전통적인 분위기와 자그마한 사원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본 사찰 외에 천태종의 ‘대권진(大勸進)’과 25사원, 정토종의 ‘대본원(大本願)’과 14방의 사원이 들어있고, 그 중에서도 대본원은 비구니 사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입구를 향해 가다보면 옆 길 사이사이마다 오래된 작은 사원들이 들어있는데, 사찰 정문을 향해 가다보면 오른쪽 길 안에 ‘세존원(世尊院)’이란 사원이 나온다. 그 곳의 석가당에는 973년에 지금의 니이가타에서 어부가 어망으로 건진 석가 열반상(중요문화재)이 모셔져 있고(한번 회람하는데 1000엔을 지불), 기타 나가노시 지정 문화재 등이 들어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불당 벽 위에는 1931년4월9일에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였고 친숙하게 영친왕으로도 불리는 의민황태자 이은(당시 34세)이 그곳을 방문했던 사진이 걸려있다. 백제 불상이 모셔진 그 땅에서 비운의 황태자가 대검을 찬 군복(일본제국 육군 중장으로 퇴역) 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역사의 복잡함을 느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 젠코치 세존원에 걸려있는 영친왕 사진

우린 주변의 여러 사적들을 확인하면서 사천왕이 서있는 젠코지 본당을 향했고, 나라의 도다이지(동대사)처럼 아픈 부위와 같은 곳을 만지면 병을 낫게 하는 불상이 있기에 부실한 신체 부위와 같은 곳을 만지며 종교에서 파생된 유니크(unique)한 의식도 즐겼다. 넓은 법당 안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일본에서도 명 사찰로 꼽히는 이 사찰은 1광3존 아미타여래상을 모시는 곳인데, 552년에 일본에 불교를 전한 백제의 불상(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538년 설과 553년 설이 있다)으로 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이 불상이 644년에 지금의 젠코지로 옮겨지고, 644년에 가람이 완성되었으나 창건 이래 십여 차례의 화재로 인해 불상이 사라질 위험에 처했건만, 민중의 불심에 의해 보전되었다고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전하고 있다.

넓고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는 웅대한 사찰과 신록으로 덮인 정원, 그 곳에는 수많은 참배객과 단체 관광객, 중국어를 구사하는 단체 여행객으로 북적거렸다. 젠코지를 방문했을 때는 각종 사원이나 보물전, 혹은 전망대, 본당 등도 봐야겠지만 사찰을 에워싼 수풀 속에 세워진 다양한 추모비 등을 둘러보는 것도 공부가 될 것 같다. 물론 청일전쟁부터 1923년의 관동대진재 희생을 추모하는 추모비 등의 돌비석도 많고, 몇 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전(입장료가 500엔)등도 있지만, 조금 이색적인 것은, 예를 들면 그동안 사용해 왔던 바늘 등을 감사하고 기리는 추모비, 그동안 죽어간 꽃꽂이용 생화를 추모하는 추모비, 이발사들이 사용했던 기구들을 추모하는 비 등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감사비 혹은 추모비가 마치 보물찾기 미로처럼 정원 수풀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필자들도 그 넓은 곳을 구석구석 돌아봤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몇 군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미련이 남는다. 이곳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면 시간을 여유 로이 가지고 넓은 정원속의 각종 추모 감사비를 확인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물론 게중에는 역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묘를 안치한 곳도, 유명한 시인이나 명승의 비석 등도 많다. 평소에 사적지나 무덤을 즐겨 찾는

   
▲ 젠코치 각처에 세워진 추모 비석들

필자로서는 백제 역사도 느낄 수 있는 젠코지에서 한일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단아하고 정갈한 일본화(자연 바위색을 녹여서 색채를 내는 기법)미술을 좋아한다면 대표적인 일본화가 히가시야마 가이이(東山魁夷)미술관이 바로 젠코지 뒤에 붙어 있으므로 꼭 한번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필자도 히가시야마의 작품에 흥미를 갖고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기에 보는 이를 마음 편하게 해 주는 그의 작품과 기법을 소개하고 싶다.

이번엔 시간 할애가 어려워서 아쉽게 그곳을 빠져 나왔지만 시간이 있다면 그 주변을 산책하며 옆의 신슈대학 캠퍼스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보내기 전에 한 곳을 더 둘러볼 곳이 있어서 일단 젠코지를 빠져 나왔다. 급한 발걸음으로 넓은 사원을 뛰었던 터라 허기가 지기에 깔끔하고 세련된 카페가 보여서 잠시 쉬면서 휴식을 취한 뒤, 걸음을 재촉하였다. 사원 거리를 빠져 나오면서 나가노 명산인 오야키(다양한 야채양념 속이 들어간 밀가루 찐 빵. 소박하지만 따스한 인간미를 느끼는 음식이다)를 몇 개 구입하여 다음 행선지인 마츠시로 대본영을 향해 가면서 먹었다. 오야키는 파는 가게마다 내용이나 가격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시래기볶음 맛의 속이 들어간 것이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젠코지의 오야키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과 달리 모양이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만든 자연미가 담긴 것이 별미였다.

   
▲ 젠코치 오야키 진빵 판매점

오야키를 두개씩이나 먹다보니 어느새 마츠시로 대본영 근처로 왔기에 시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서 현지에 갔다. 마츠시로 대본영이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해외 각지에서 계속 패전을 당하자 1억 국민(식민지도 포함)전체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야마토 정신으로 자멸하자며 자살행위를 부추기던 군부의 강한 조장 속에서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일본 왕족 및 육군대본영(최고 사령부), 국가 주요기관 및 통신 방송 관련 주요 기관을 나가노의 산간 지역인 마츠시로(松代)로 옮기려고 극비리에 계획, 진행 되었던 광대한 지하호를 말한다. 당시 일본 각지의 탄광이나 댐, 군수 건설지 등에 연행되어 왔던 한국인 노동자들 7000명이 대거 투입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4000명이 13킬로미터의 대규모 지하호를 파는데 투입되었다. 전후 대부분이 폐쇄되었지만 나가노가 평화 교육의 차원으로 공개하고 있는 죠잔(象山)지하호는 필자가 한여름인 8월 달에 들어가도 서늘한 정도의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맨손으로 삽질을 하며 땅굴을 파고, 통풍조차 되지 않는 곳에 ‘국체호지’라는 명분으로 국민 없는 왕족을 살리겠다고 피신시키려 했던 초라함이 전쟁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지휘 통수권 다툼으로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심해져서 해군 사령부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

고 다른 곳에 거처를 준비했을 정도이니, 분리된 군부에 의한 국민 없는 국가로 전락하여 일본 및 그 식민지가 궤멸을 했다면 지금쯤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무책임한 위정자들의 탐욕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성전이라고 외쳐대는 살아남은 자들의 과거 미화는 보면 볼수록 흉측스럽기만 하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무슨 성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찢어지는 살과 피투성이가 범벅이 되고 울음과 비명으로 뒤덮이는 전쟁이 무슨 성스러운 싸움일 수 있는가? 짐승들은 차라리 비열하게 변명이나 합리화에 급급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전멸, 국가의 파멸을 담보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싸움판에 목숨이나 거는 사욕적 허세에 얼마나 미증유의 생명들이 희생이 되었고,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가. 권력자라는 특권으로 개개인의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이나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숱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던 희생의 구조에 무슨 인간의 지혜를 볼 수가 있고, 희망적 정치가 있었을까?
   
▲ 죠잔지하호 입구
패전 직전까지 육군대신 아나미는 일억 인구 전원이 죽을 각오로 결사 항전을 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다가 결국 45년 8월15일에 할복자살을 한다. 귀축(鬼畜, 아귀 축생의 약어, 잔인한 짓을 하는...) 미국이나 영국 등과 전쟁을 서둘러야 한다는 시마다 의원의 과격 연설로 국회가 떠들썩했고 미국과의 대전에 거국전을 치르자는 강경파 군 지휘부의 움직임 속에서 한반도 도공의 피를 잇는 박무덕(일본 이름은 도고 시게노리, 東鄕茂德) 외무대신은 외교 교섭에 의한 평화론을 주장한다. 오키나와의 초토화 상태(미군에 의한 공격과 함께 자국인 일본군에 의한 자살 강요로 인해 죽게 된 오키나와 민간인들도 상당수였다. 오에 겐자부로 재판 승소 참고)와 각 전투지의 패전으로 인해 이미 패배를 예견하던 스즈키 칸타로 수상은 1945년 4월 9일에 당시의 엄청난 사태 수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종전 처리 인물로 도고 시게노리(박무덕)를 지명하게 된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이 투하되자 8월9일 밤 어전회의에서 결사 항전도, 조건을 건 항복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도 코이치,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참석한 상황에서 도고 시게노리는 ‘조건 하나만을 내세운 항복’, 즉 ‘천황제 유지’라는 단 하나의 조건을 건 항복론을 제안하고, 모두가 타당하단 결론으로 일본 정부는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도고 시게노리는 강경책을 주장하는 군부의 암살기도나 갖가지 협박 속에서도 최후까지 일본이란 국가를 책임지고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더 이상 무모한 행위로 국민을 내팽개치는 자멸 상태를 저지하려는 외교관의 책임을 다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패전 후인 1946년 4월에 그는 극동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1950년 7월, 옥중에서 68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가 수감 중에는 같은 가고시마현의 사츠마 도예마을 출신이던 도예가 심수관이 사식을 넣어주고 면회를 했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의 외교적 수완은 2차 대전으로 인해 일본이 가장 위급했던 진주만 공격 때와 패전 후의 수습 처리였는데, 외무대신으로서 그는 오로지 ‘국민이 우선되는 미래가 있는 국가를 위한 평화정책’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인물임은 평가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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