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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기고 > 이수경 교수의 日 나가노 한국 사적지 탐방
힐링의 땅 나가노에서 한국 사적지 흔적을 만나다-(3)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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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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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츠시로 죠잔지하호 평화가이드 도우미 가나이씨(오른쪽)와 필자(가운데) 그리고 동행한 친구
그런 일본의 근대 전쟁사의 흐름을 더듬으며 우리는 죠잔 지하호에 기다리던 평화 가이드 가나이씨(릿쇼 대학교 영어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 일본어, 영어, 불어에 능통하여 군대의 통역으로 일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안내로 헬멧을 쓰고 어둡고, 환풍기조차 없어서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지하호로 들어갔다. 죠잔 지하호는 1944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착공하여 다음해인 1945년 8월 15일 패전 날까지 약 9개월간 당시의 금액으로 약2억 엔이란 거액과 300만 명이라는 주민 및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열악한 환경과 낡은 공법의 인해전술을 강요하여 공사를 시켰다. 그렇기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고, 우리가 들어간 지하호의 암벽에는 한국의 ‘대구부(府)’(현, 대구시)라는 노동자의 출신지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몇 번이나 와도 가슴 아픈 곳. 그 어두컴컴한 바위산 지하호의 여기저기서 습기 찬 냄새와 물방울이 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2008년에 왔을 때는 안쪽 지하호로 연결되는 철창에는 평화와 한일 우호관계를 기도하는 각 학교 학생들이 만든 종이학이 벽면 가득히 걸려 있었는데 이번엔 없기에 물었더니 습기가 차서 금방 썩는 터라 처리를 했다고 하였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면 나가노 시에서 자원한 평화가이드 도우미를 많이 배치하고 있었고, 필자가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현저히 다르게 지하호 안에 방문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팀들의 가이드 이야기를 들어봐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아픔이나 4명의 종군 위안부의 존재 등을 전하려하였고, 당시의 초라했던 상황이 전쟁의 본질임을 다양한 형태로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이 지하호가 75% 정도가 완성 되었을 때 일본이 패전하고 공사를 중지한다. 그 후 잊혔다가 태평양 전쟁의 유적지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전하고 평화 의식을 되새겨보는 현장의 하나로 보존하여 1989년부터 견학 가능케 하였다. 지금은 당시 현장의 일부 500미터를 공개하고 있고, 근처의 지하호중의 하나인 마이즈루야마(舞鶴山)는 현재 일본 기상청 정밀 지진관측실로 활용되고 있다.

평화 가이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리얼하고 흥미로웠지만 확인이 필요한 에피소드이기에 언젠가 다른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전쟁이란 극소수, 그야말로 특권 상위 0.1% 만을 위해 모든 이가 희생되는 구조라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현대전은 과거 같은 인해전술이 아니라 최첨단 강력 병기의 시험장이자 전투를 명령한 자가 최전선에 앞장서서 희생이 되는 전투가 아니다. 가장 책임져야 할 사람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명령을 하고, 그들이 만든 각종 미사여구의 슬로건과 강압적인 전쟁 몰이에 희생이 되는 것은 항상 약한 국민임을 감안한다면 이젠 좀 더 지혜롭고 강한 시민의식 구축과 연대를 통한 전쟁 분쟁 저지를 위해 노력하는 인류사를 자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이 아니면 우군 밖에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사회 체제가 아니라, 세계화라고 다문화를 외칠 사회라면 이젠 우리사회에 다양한 의식,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 마츠시로 죠잔지하호에서 희생된 조선인 추모비
필자가 죠잔 지하호에서 가슴이 푸근했던 것은 많은 평화가이드 도우미들이 한국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과 그들의 아픔을 그 많은 방문객들에게 세세히 설명을 하고 있었고, 산골이라 한적한 그곳의 죠잔 시립 주차장에는 단체 방문객들로 인산인해였기에 주차를 할 곳이 없어서 대절 버스가 길 주변에 기다리는 상황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터무니없는 억지로 과거 침략 전쟁을 은폐 풍화시키려는 움직임이나 과거 권력을 쥐었던 정치가들의 후손들이 정치가가 되어 과거를 미화시키려는 강경파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로 근대 시민 문화의식을 높여 온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 의식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나쁜 단면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소박하고 왜 평화가 필요한지 자신들이 스스로 궁리하고 싸움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그렇기에 우익 보수층이 그렇게 떠들고 젊은 층이 세뇌되어 말려드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주장하는 시민네트워크도 강력하게 그들을 저지하는 양심적 행동을 한다. 그렇기에 1억3천만 일본에는 다양한 의식과 다문화 출신의 사람들이 존재하면서 사회가 질서 있게 돌아가고, 그 많은 재일 교포들이 차별을 이겨내고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 하여도 그들은 정치가를 탓하기만 하고 절벽으로 몰아세우기보다 시민네트워크로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보호막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국가이기에 모순도 없지는 않지만 시민 양심들이 존재하는 것을 잘 알기에 일본 사회는 평화를 쉬이 깨트리는 우행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죠잔 지하호에서 만났던 많은 단체객들이 학생들의 계획된 수학여행이나 답사여행이 아니라 대부분이 중후한 연령의 단체여행이나 혹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나들이였고, 평화가이드가 벽에 새겨진 대구를 설명 할 때 옆에서 열심히 보충 설명을 하는 아빠와 듣는 아이의 모습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비록 짧은 일정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지만 현장을 통해 얻은 감각은 근대사를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큰 재산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비행기 시간을 의식하며 오후 2시에 현지를 뒤로 한 채, 막히는 주말의 고속도로를 다섯 시간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렸다. 우리는 하네다 국제선에서 재회를 기약하며 이별을 하였지만 짧은 여정 동안에 1000킬로미터를 달리며 나가노현에 있는 한국의 흔적을 확인하였고, 서로 뿌듯한 충만감으로 다음 만남을 위해 건투를 빌었다.
   
▲ 가이드가 죠잔지하호 내부 벽에 새겨진 '대구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귀가를 했을 땐 밤 10시가 넘었고, 다음 날 아침 수업에는 교원자격 필수 수업인 200명의 인권 교육 수업이었는데, 나가노의 현지에서 확인한 시민 의식과 전쟁이란 최대 폭력의 초라한 결말, 교사란 자기가 맡은 학생들을 이끌고 올바르게 가도록 신념을 가지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역설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내가 본 것을 전하고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미래의 책임에 대해 토로를 하였을 때, 적어도 그 수업의 200여명의 학생들의 눈동자는 모두가 나만을 응시하였고, 허튼 행동이나 잡담으로 분위기를 흩뜨리는 학생은 없었다. 당연히 우리 학생들의 의식 수준이 높고, 자신들이 학교 때 매력을 느꼈던 선생님들처럼 재미있고 친근감 있게 공부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고 싶다고 희망하여 수강한 학생들이 대부분이기에 모두 필자의 취지나 의도를 이해하려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교과서만을 외운 이론이 아니라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현장답사와 편견을 갖지 않고 내 눈으로 내 발로 확인한 상황이나 현장의 장단점을 전하는 것이 설득력과 진지함으로 전달된 것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인권 문제나 전쟁 관계는 리얼리티, 그 사실감을 전달하고 문제의 소재 및 해결 방안에 대한 모색이 중요하기에 확인 작업과 기록 내용을 그대로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오랜만에 주말을 보람 있게 다니고 와서 기분 좋게 수업을 끝내고 나니 필자 자신도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는 겸허한 자세로 새삼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혹시라도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기회가 있어서 일본을 방문한다면 가급적 스케줄을 만들어서 필자가 다녀온 곳을 한번 나름대로의 시선으로 봐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곳에는 우리 조상의 흔적도, 우리를 평안히 만드는 대자연도, 그리고 우리를 든든하게 만드는 인적 만남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과거의 흔적은 미래를 위해 기억하고, 현재는 미래를 향한 기반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며 진취적으로 다가서려는 한일 시민관계가 구축된다면 미래는 희망적 일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결코 단편적인 부분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미숙한 극단적 발상은 버리고,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여유도 찾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끝으로 필자를 항상 격려해주고, 예리하고 현명한 의견으로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며 여정의 많은 부담조차 가벼이 짊어졌던 이지원 교수에게 진심으로 생일 축하의 마음을 보낸다. 2012년 5월 24일 미명에.

(참고; 이 기사 내용을 포함한 근현대 한일 간 교류 내용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수경 편저 [한일 교류의 기억] 한국학술정보사 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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