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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스리랑카를 가다-(3)
고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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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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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병수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이사, 제주 탑동 365의원 원장 ]


   
▲ 고병수 새사연 이사
오늘은 새로운 곳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어제까지 진료했던 곳이 군인들에 의해 통제가 심한 곳인데 비해, 오늘 우리가 새로 가는 곳은 얼마 전 민간인 출입이 허용된 곳으로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지역이라고 한다.

새로운 진료지 물라띠부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하다고 하여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서둘러 킬리노치를 떠나서 목적지인 물라띠브(Mullaitivu)로 향했다. 킬리노치 시내를 벗어나 논밭을 지나니 조금씩 작은 부락들이 나타난다. 내전을 겪은 지역답게 거의 모든 집들의 담벼락마다 총알자국이 있고, 폭탄에 지붕이 날아간 집들도 보인다. 내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 부락은 듬성듬성 남은 몇 개의 시멘트 기둥만이 과거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다. 일부에서는 부서진 집에 대충 거적을 덮어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지 군데군데 빨래가 널려 있기도 했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검문 역시 점점 심해졌다. 밀림 사이로 난 좁은 흙길 곳곳에 검문소가 있고, 거의 2~300m마다 초소가 있어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진료소를 차린 곳은 군부대 안이었다. 전투는 3년 전에 종결됐지만,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우리의 안전을 위해 지역 사령관이 결정한 일이라고 했다. 다시 약품을 내려놓고, 의료장비들을 각 방마다 설치하면서 분주하게 진료 준비를 마쳤다.

   
▲ 곳곳에 총알이 박혀 폐허가 된 교회 모습
정착촌(resettled village)은 부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숲의 나무를 베어 땅을 고르고, 묻혀있는 지뢰들을 일일이 제거한 후 집 잃은 타밀족 사람들이 살게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상황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양철을 씌우거나 둘러서 지붕과 벽을 만들어 놓았다. 전기는 물론 상하수도 시설은 없다. 정착촌 입구에 펌프 하나 있는 게 전부로 보였다. 거기에 의료시설이나 학교가 있을 리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전투가 종결되면서 정착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시설이 고작 이 정도면 앞으로 5년이 더 지나도 별로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나중에 관련자 말을 들어보아도 몇몇 시설 빼고는 여기서 크게 발전하기 힘들다고 했다. 내전 당시 피난민이 2~30만 명 정도였고, 일부는 살 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대다수 주민들이 터전을 잃어 정부나 세계기구가 만들어주는 정착촌에 들어가야 했다. 정착촌은 스리랑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만들어졌고, 한 정착촌마다 100~200세대(400~800여 명 주민)로 구성되어진다.

   
▲ 페허가 된 어느 마을
거주민들의 의복이나 신발들은 너무 남루했다. 옷에 땟국물이 흐르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아이들이 맨발로 거친 땅을 밟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손에 쥐었던 사진기 마저 미안해 내려놓고 있었는데, 멀리서 5살쯤 된 한 남자 아이가 우리가 주는 빵을 얻어가기 위해 달려오는 모습을 본 순간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신발은 한 짝만 있고 다른 짝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급해서 한 짝만 신고 온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한 짝만 신고 다녔던 건지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 뛰어와서는 빵과 우유를 들고 다시 어디론가 뛰어간다. 돌아가는 아이의 표정은 세상 무엇보다도 밝았다. 또 한 여자 아이는 자기보다 조금 작은 어린 남동생을 들쳐 업고 뛰어왔다. 우리는 업힌 아이가 다쳐서 그런 줄 알았는데, 돌아갈 때 보니까 내려서 잘 걸어가는 걸 보고 또 웃어야 했다.

정착촌에는 눈에 띄게 남자들이 적었고,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많아 보였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전쟁 통에 남자들이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진료 중에는 아이들만 온 경우가 많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이들만 사는 경우가 많고,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했다. 내 고향 제주가 그랬다. 60여 년 전 4?3때. 마을 전체가 몰살당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을 우리의 땀으로 씻어줄 수 있었을까

물라띠부의 군부대 안 진료소에서도 역시 군인들이 버스로 인근 정착촌이나 마을들을 돌며 주민들을 실어왔다. 그런데 반나절이 지나가는 데도 어제 들렸던 정착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들은 조금 의아해했다. 군인들이 타밀족 출신들이라고 일부러 차별해서 안 데려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곳 주민들이 어제 정착촌에 갔을 때의 모습과 달리 하나같이 깨끗한 옷으로 단정하게 입고 나와 우리가 몰라봤던 것이다. 실제로 진료하다 보니 어제 그 곳에서 봤던 아이들이나 걸을 수 없어서 휠체어에 타고 있던 할머니도 보였다. 낯선 손님들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려는 최대한 깨끗한 옷과 단정한 차림으로 왔던 것이다.

   
▲ 어린동생과 빵을 받고 돌아가는 소녀

킬리노치에서는 불구가 된 주민들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는데, 여기 물라띠부에서는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주민들.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이 남는 사람은 내게 진료 받은 어느 소녀와 치과 진료를 받았던 여성이었다.

오른팔이 없이 헐렁한 옷소매를 길게 늘어뜨리고 찾아온 소녀는 몇 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포탄이 집에 떨어져 가족은 몰살당하고, 자신은 한쪽 팔을 잃은 채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덤덤히 통역을 통해 자기의 피부병에 대해서 말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치료에 대한 생각 보다는 참담한 마음이 앞섰다. 또 한 사람은 왼쪽 다리를 지뢰에 절단 당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스리랑카의 비극

지금은 스리랑카로 불리어지는 실론섬은 기원전부터 인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원주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홍차로 유명해지면서 인도 타밀족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스리랑카 북쪽과 동부 해안을 따라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힌두교도들이지만, 원래의 토착민들은 불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하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차별을 겪게 되자 일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것이다.

전쟁과 살육은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나 불의다. 어느 쪽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마을을 불태워 없애거나 가족들을 처형해버렸던 전쟁, 스리랑카 정부군이나 타밀 반란군들의 주민들 학대는 30년 가까이 지속됐다. 타밀 호랑이라고 불리던 반군(LTTE)은 인도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타밀족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 때는 스리랑카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부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2009년에 궤멸하게 되었다. 비록 반군 지도부의 와해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치안은 불안해서 거의 준 계엄, 혹은 위수령 수준으로 군인들의 통제가 심한 것도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 지뢰에 왼쪽 발을 잃은 한 여인이 누워서 치과 치료를 받고 있다.

통역을 맡은 분들은 그 지역에 사는 타밀족 출신들이다. 나는 진료하다가 잠시 쉬는 틈에 같은 종족들이 많이 죽었는데, 이렇게 정부군 쪽 군인들을 보면 증오심이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별로 그렇지 않다. 우리 동네에서도 심한 전투가 있었고,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그것이 여기 있는 군인들 탓인가? 우리는 반란군들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몇 마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가장 좋다. 사람들도 너무 지쳤다.”

“내전 중에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주민들을 많이 죽였다. 대부분의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은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지금의 정부는 그걸 해주리라고 믿는다.”

타밀족 사람들은 반군을 잘 따랐는지도 물었다.

“반군에 가담한 사람들은 아주 일부분이었다. 총을 들기 싫어하면 잡아가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강제 노역을 하기도 했다. 정부군도 그랬지만, 반군들도 어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정부군의 무차별한 살상도 전 세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반군들의 만행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편들지 않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죽이거나 총알받이로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요즘은 ‘하리잔(harijan)’이란 말로 불린다)의 자녀들을 돈 주고 사와서는 훈련시킨 후 도심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살된 반군 지도자 Vellupillai Prabhakaran는 자동차 모으는 것을 특별히 좋아해서 비싼 돈을 주고라도 원하는 차를 모았다고 한다. 세계 각지의 차들을 모아서 한 군데 전시한 곳이 있었는데, 마지막 전투 중에 전부 불에 타버려서 우리가 지나가는 중에 보았을 때는 불에 타 녹슨 차들이 수 천 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내전이 끝났지만 아직도 스리랑카 북부지역은 준 계엄 상태, 혹은 위수령 수준의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역의 모든 행정 관련된 일들이 군 사령부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그에 비해 비교적 군인들이나 타밀족 주민들은 평화롭게 지내는 것 같다.

플룻과 반군 이야기

   
▲ 불에 타 녹슨 채로 남아 있는 수 천대의 자동차들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피곤에 지친 채 저녁 어스름에 돌아온 우리들은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간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나눠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가 등장했고, 마른안주가 차려졌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과거 연예하던 시절 이야기, 한국에서의 병원 이야기 등을 나누고 있었는데, 산부인과 의사 선생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플룻을 들고 나왔다. 악보를 보면서 몇 곡을 뽑고 나서는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아서 불기도 하였다.

“반군들이 있으면 밀림에서 플롯 소리를 듣고 총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져왔죠.”

그러면서 이번에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연주한다.

“양 선생님 플룻 연주에 반군이 아니라 주변 막사를 지키는 정부군 군인들이 총을 내려놓겠어.”

누군가의 우스개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와 애절한 플롯 소리가 최고의 화음이 되어 어둠에 둘러싸인 막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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