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중앙일보 <중앙시론> / 조동호 퀸즈칼리지 교수 ]

으뜸가는 소통의 수단으로 흔히 언어를 꼽는다. 그러나 우리네 언어생활은 실다운 상호이해에 도달하거나 새로운 인식을 얻기보다는 도리어 내편과 네편을 가르거나 진실을 포장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언어 오용에 대한 경계심은 인류의 유서 깊은 지혜였다.

오늘날 깊은 성찰 없이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보수와 진보, 긍정과 부정, 통합과 분열 따위의 언어가 있다.

가령 오바마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을 두고 진보주의의 본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동일노동 남녀임금 격차 해소, 동성애자 차별 철폐, 서류미비 이민자 포용정책, 빈부격차 해소, 기후변화에 대한 능동적 대처 등은 이른바 진보파가 줄곧 강조하던 의제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같은 '진보적 의제'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슬기로운가? 진보가 역사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은 만인이 공감할만한 어떤 가치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뿐이다. 보수가 의미 있는 것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할 가치를 끝내 지켜낼 때뿐이다.

진보가 지향하는 가치 또는 보수가 보전하려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가 누구나 공감하고 함께 추구할만한 가치인지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면 진보든 보수든 한갓 패싸움의 언어로 전락하게 된다. 가치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은 진보 대 보수의 평면적 이분법을 넘어 중도(中道)에 이르게 한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도 칼로 자르듯 딱 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노예제도가 인종차별 정책에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도리어 미국 헌법의 정신을 긍정하는 일이요, 그리스도교의 신께 아멘을 외치는 행동이다. 다른 한편 기성 현실을 무턱대고 긍정하는 것은 현실의 억압ㆍ착취ㆍ불의와 죄를 고스란히 인정하는 행동이요 불신앙이 된다.

더구나 통합이나 긍정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외치던 국민총화와 민주사회의 보람차고 신바람 나는 상생의 삶을 구분할 기준이 사라진다.

긍정이냐 부정이냐, 희망이나 절망이냐 하는 식의 논란은 정작 중요하고 어려운 핵심 문제를 비껴가는 짓이다.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할 것인가, 무엇에 "예"라 하고 무엇에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것이 진짜 문제다.

지난 21일 재취임식 연설에서 오바마는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혁명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 미합중국이 지나온 길을 회고했다.

그 여정은 천부인권 이념에 기초한 공화국 건설을 선언한 필라델피아로부터 출발하여, 같은 원칙이 여성에게도 적용됨을 선언한 세네카폴, 흑인과 여타 소수인종에게도 해당함을 선언한 셀마를 거쳐, 동성애자들에게도 그 약속이 성취되어야 함을 선포한 스톤월에 이르는 길이다.

약속 성취를 향한 아메리카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오바마는 지적했다. 그는 또 천부인권의 이념이 제아무리 자명한 진리(self-evident truth)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실현되는 진리(self-realizing truth)는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하늘의 선물을 받아 누리려면 땅 위의 싸움이 있어야 하고 그 노력에 다 함께 동참하자고 그는 호소했다.

이 연설을 놓고 어떤 이들은 진보주의를 화끈하게 내세웠다고 반기고 다른 이들은 패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당파적 연설이었다고 비난했다. 둘 다 엉뚱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핵심에서 벗어났다.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사회는 독립선언에 새긴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인민주권의 나라가 아니라 금권독재의 나라로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오바마가 18세기 혁명적 건국이념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말하자면 정통보수다. 동시에 미국 독립선언서가 상기도 서슬 퍼런 혁명의 문서인한 그는 급진파이기도 하다.

독립선언이 갈라서자는 선언이자 하나 되자는 호소이듯, 오바마의 연설도 통합의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결별의 선언이다. 아니 오바마는 중도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