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태 / 선양세무외국어학원 원장, 칼럼니스트 ]

난 산을 좋아하고 산행도 좋아한다. 다만 주말수업 때문에 잘 가지 못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중국인과 대화하던 도중 우연히 이런 아쉬움을 얘기했더니 그는 여느 한국인들과는 좀 달리 반응했다. 대뜸 말하기를 ‘거기 올라가면 뭐 볼만한 게 있느냐’는 것이다.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산정상이나 산등성이에서 느끼고 배우는 겸허함이라든지 산행 도중 접하는 수목과 야생화의 아름다움, 가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등장하는 가사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산사나이가 던진 화두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 등등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산같이 밀려 왔지만 깨끗이 포기했다.

그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매우 현실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또 평원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등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보통의 동북인(东北人)인 줄을 진작 알았기 때문이다. 성장환경에 따른 가치나 관념상의 차이로 인해 거리를 느꼈던 경우이다. 하지만 이것은 취향의 문제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로도 주변의 중국인들과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히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중국인 직원이 말했다. 오전 9시에 시작하니 실수하지 않으려면 8시 반까지는 그 장소에 도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7시 40분에 미리 어디서 만나 같이 가자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현장에 가 보니 이전부터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장소였고 8시 50분까지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괜스레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번거로운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외국인인 내가 정확한 행사장 위치를 잘 모를 거라고 지레짐작한 그의 착오 혹은 배려(?) 때문에 그날 오후는 내내 곤해서 연신 하품을 해 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몇 번의 시행착오를 더 거친 후에야 이런 거리는 좁혀졌다.

선양에서 생활하며 중국인들과의 접점에서만 이런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한국인들끼리의 접촉에서도 순간순간 참 많이 느낀다. 5천만 명의 한국인들 중 집단별로 대표성을 가진 사람을 하나씩 차출이라도 하듯 모인 마치 표본 집단과도 같은 한국인 교민사회에서는 서로서로 '나와 다른 당신'을 더욱 피부로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유유상종하느라 접촉할 일이 거의 없었던 계층과 부류의 사람들도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쉽사리 만나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이나 한국인끼리의 대인관계에서도 한국에서와는 달리 마음쓰임이 적지 않고 피곤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차라리 중국인들과만 어울리고 싶고 한국인들은 만나기 싫다는 사람도 꽤 있다.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 소통은 별개의 문제이더란 이야기다.

나의 생각과 주관과 의견, 분위기와 관념과 심성, 개성이 같지 않은 당신 앞에서 우리는 종종 불만을 가지고 언성을 높이기 쉽다. 다혈질인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나아가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국에 있을 때에 비해 생활이든, 업무든 확실히 힘들고 팍팍한 일상이니 더욱 그러기 쉬울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한국인끼리의 갈등의 골도 꽤나 깊고 갈등의 표출도 잦다는 느낌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일까. 그래서 노래 가사처럼 '이젠~ 이젠~ 잊을 테요'로 관계가 마무리 지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딱하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현실은 분명히 그러하다.

한국에서든 중국에서든 요즘 시대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소통'과 '화합', '통합'을 생각해 본다.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다른 중국인들과의 어울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터에 이런저런 것들이 나와 다소 다르다고 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내 의견과 방식만을 주장해야만 옳을까 의문이다. 모 집단이 아닌 표본 집단일수록 각 개개인들은 더욱 '소통'을 염두에 두고 노력해야 주변과의 어울림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몇 년 전, 선양 현지에서 발행되고 있는 월간 '한국인 소식지' 편집에 봉사로 참여하며 유학생 하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한족학교를 다녔고 베이징대학 특례입학에서 외국인학생 수석을 차지했던 대견한 학생이다.

당시 현지에는 한국학생에 맞춘 국제학교니 뭐니 하는 학교들도 없었다. 내 아이들도 현지 한족학교에 다니고 있던 터라 한족학교에 다니며 급우관계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겠다고 위로 삼아 격려를 보냈더니 조용하면서도 자신에 찬 당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학생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친해지지 않아요."

그랬다. 비록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이미 온몸으로 깨닫고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어릴 때부터 긴 세월 중국 학생들과 부대끼면서도 불편 없이 지내오며 본인이 가고자 했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었으리라.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이런저런 만남과 어울림 속에서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얼마만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