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 이수경 교수

나이가 들어가니 그동안 혹사했던 세월만큼 몸도 연륜 속에 노화를 맞이한다. 최근엔 자신을 추스를 여유조차 없이 일과 현실에 쫓기다 쓰러지거나 세상을 달리한 동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고, 필자 또한 소모품을 혹사시킨 탓에 병원을 자주 찾게 된다.

특히 올 정월에는 제자들 졸업 논문 제출시기에 맞춰서 수정 체크하고, 몇 편의 의뢰 원고를 적느라 거의 보름을 책상 앞에서 하루 한 두 시간의 수면으로 컴퓨터 작업 생활만 하였던 터라 마음과는 달리 몸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다양한 형태의 부작용으로 앓게 되었다. 특히 시신경은 과로로 인해 장애가 왔고, 심한 안구건조증과 더불어 눈꺼풀 뒤쪽에 생긴 굵은 염증으로 통증이 심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인한 태풍 급의 바람과 꽃가루 알러지, 황사로 인한 요동치는 봄의 잉태가 있었기에 필자의 눈 상태는 심각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병원을 찾았으나 담당의사는 제대로 내 증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치료 밖에 하지 않았다. 의사가 반드시 환자의 통증 혹은 증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눈꺼풀 속의 두드러진 염증들을 만지면서도 ‘곪지 않고 있으니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말을 했을 때는 힘들고 불편한 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 야속하기도 했다.

참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집 근처 역전에 있는 화려한 간판이 세워진 안과전문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은 더 심각한 병원이었다. 의사가 일방적 진단만 내릴 뿐, 환자가 증세에 대해 말조차 꺼낼 수 없게끔 만들었다. 더구나 옆에서 보조하는 간호사들도 모두 의사 눈치에 절대 복종하는 식으로만 환자를 대하고 있었다. ‘참 이런 병원도 있구나’ 하는 충격과 함께 의사의 교만과 권위적 태도를 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권력구조에 젖어있으면서 눈 옆에 나 온 다래끼만 지적하는 엉터리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찾았던 병원보다 더 비싼 진료비를 주고 나오며 ‘이렇게 제대로 된 의사가 없을까’하는 씁쓰레함을 맛보아야 했다.

아픈 눈 때문에 수업 준비도, 집필도 못 하고 속상해 있을 때, ‘보험은 안 되겠지만 의료선진국으로 거듭난 한국에 와서 수술을 받으라’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조언을 듣고 그래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3월 중순, 도저히 눈 뜨고 운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인터넷으로 주변의 다른 안과를 찾아서 급히 처방만 받고 다음 주에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 들어가니 로비에 있는 대기실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고, 간호사들은 부산하게 환자들을 진찰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필자도 진료 수속을 마치고 진찰실 앞 대기실에서 1시간 정도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진찰실 안에서 명확한 진찰 결과를 환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일러주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환자에게 한결같이 정중하게 환자의 증세를 성실히 설명해 주는 의사의 목소리는 퍽이나 다정하고 친근감 있게 들려왔다.

다른 대학병원 의사들도 몇 사람이 번갈아 진찰을 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이 병원 원장의 진찰을 받았다. 곧 필자의 순서가 와서 인사를 하며 들어가 앉았더니 60대 초로의 의사가 인사와 더불어 어떤 증세인지 일단 물었다. 물론 진찰실에 들어가기 전에 시력이나 기본적인 안압 검사 등은 미리 검사를 한 상태라서 필자의 기록카드(Karte)에는 정보가 입력돼 있었다. 간단한 상황과 통증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진찰 기계로 눈 검사를 시작하자마자 필자의 눈꺼풀 뒤의 염증들을 잡아내, 빨리 제거해야 불편함이나 통증이 없다며 수술 날짜를 서둘러 잡자고 하셨다. 의사의 소견이라기보다는 고통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함께 아픔을 덜어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어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른다. 역시 마음이 있는 사람은 표현도 다르다고 할까?

더구나 그 전에 갔던 병원 의사들이 모두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판단을 못하는 의사라면, 휴가를 받아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와야했기에 시간이 없던 나로서는 더욱 더 반갑게 느껴졌다. 분명 독자들도 통증을 이해 못하고 진단도 제대로 못하는 병원을 전전하다가 환자의 아픔을 마치 내 몸처럼 이해하고 정확히 대처해 주는 의사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담당의사의 의견대로 최대한 빠른 수술날짜를 잡았는데, 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제자들 졸업식 날이었고, 더구나 올해는 아끼던 제자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맡기에 반드시 참석하고 싶었던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수술을 하면 4월에 통증 없이 학기를 맞을 수 있으나 포기하면 4월 이후로 수술이 넘어가게 돼 담당의사의 바쁜 일정이나 필자의 일정을 감안할 때 한시라도 급히 의사의 시간대에 맞추는 게 현명할 것 같아 졸업생들에겐 미안했지만 수술을 그 날로 택했다.

학교에 연락하여 상황을 말한 뒤 병가를 받은 후 수술을 했는데, 세 번의 마취주사의 아픔 외엔 고통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사와 간호사와의 수술 중의 대화가 매우 간결하면서도 알기 쉽게 와 닿는 것이어서 신뢰감으로 가득했다. "환부를 찢어보니 예상보다 굵은 염증 덩어리가 많이 들어 있다"며 "이참에 다 제거하자"는 목소리가 들렸고, 이미 의사와 환자 사이엔 신뢰감이 굳혀졌던 상태였기에 “참을 테니 나쁜 부분은 다 제거해 주세요”라는 순수한 믿음뿐이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 ‘안과의 명의’이자 ‘환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시술하는 진정한 의사’라는 담당의사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훈훈했다.

수술 뒤에 지혈이 되었어도 당분간은 안정을 해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친절한 간호사들의 뒤처리를 받고 나서 오랜만에 편히 쉬었다. 마취가 풀리고 약간의 출혈은 있었지만 정신적 안도감으로 아픔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안구건조증이 심하니 시간이 있을 때 지속적 치료를 받아서 낫도록 하세요.’라며 필자를 걱정해 주는 말은 필자뿐 아니라 모든 환자에게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믿음 때문일까? 약을 싫어하는 필자도 열심히 치료를 받으며, 일벌레임에도 모든 일을 전폐하고 약 일주일간 음악과 더불어 차분히 안정을 취했고, 지금은 안대를 하고 외출할 정도로 거의 완치상태다. 이토록 고마운 눈 상태로 만들어 준 의사가 있는 반면, 아픔도 몰라주는 의사들도 많으니 세상 어디나 의술의 차이 땜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맡았던 이사다 씨(재일동포관련 연구 우수논문으로 졸업)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졸업식에 참석했던 제자들로부터 연락이 왔고, 대학원 졸업생들은 김밥을 말아오고 한국음식들을 챙겨다 주기도 해서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졸업생 대표를 맡았던 제자가 4월부터 출근하기에 그 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근처에서 만났다. 필자가 아끼는 제자 ‘이시다(石田)’는 한국유학을 포함해 5년 동안을 한결같이 열심히 공부를 해 왔고, 한국어, 한국문화는 물론 중국어, 영어 등을 열심히 공부해 필자와는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메일을 주고받을 정도이다.
또, 여린 외관과는 달리 검도2단의 소유자로 명랑한 성격에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예의도 발라서 동료교수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학생이었다. 그녀의 졸업 논문은 『재일동포 및 동포학교관련 연구』가 테마인데, 필자를 지명해서 유학을 온 독일인 제자와 함께 각지의 동포 인터뷰나 민족학교 답사를 통해 세밀하고 포괄적으로 분석한 우수한 내용의 논문을 내서 주변 평판도 좋았다. 필자의 친구인 재일동포 변호사나 관련기자들을 직접 찾아 다니며 조사 작업을 했기에 그들로 하여금 연구자세가 올바른 학생이라는 칭찬이 자자할 정도였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졸업논문을 제출한 뒤, 이번엔 자신의 한국어 능력을 확인하는 공부차원에서 단기간에 몰입해 일본어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보내온 것이 아닌가. 물론 완벽하진 않아도 성실하게 번역한 논문을 보면서, 이제 학교를 떠나 사회인으로 살아 갈 제자 아이 보낼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졸업식 날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연구실 앞에 서서 찍은 사진과 '수술이 성공하길 빈다'는 편지로 되레 격려해 주던 이 제자 아이에게 어떻게 정이 안 들 수 있단 말인가?

안대를 한 상태로 약속한 장소로 갔더니 다른 졸업생들은 회사 연수관계로 이미 지방으로 내려갔고, 그들이 적어놓은 편지나 에피소드, 선물 등을 전해 받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 문양의 머그 컵 속에 지도교수의 힐링을 위한 것이라며 향긋한 차 팩을 넣은 뒤, 그동안 감사했다며 부디 건강을 챙겨달라는 메시지로 나를 감동시켰다.
필자도 그녀를 위해 사회생활에 힘내라고 자그마한 것을 준비했던 터라 제자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촐한 우리의 졸업식을 보낸 셈이다. 그녀의 고마운 말과 다른 제자들의 메시지로 마음이 따스한 귀로에는 어느새 화사하게 핀 벚꽃들이 불빛을 받아서 환상적인 봄날 밤의 향연을 자아내고 있었다.

고통스런 힘든 나날도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의사를 만났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따스한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는 필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학기 준비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