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영 / '민중의 소리' 기자 ]

29일 오후, 통일부 기자실에서 포털 검색창에 ‘핫바지’를 치고 있었다. 북한 매체에 ‘품격 있는 언어’를 쓰라고 호통 치던 통일부의 류길재 장관이 한 강연에서 “우리를 핫바지로 보는 것 아니냐”, “‘통일부 엿 먹어라’는 식의 태도” 등의 표현을 써가며 북한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서 통일부 장관 속이 요즘 속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당국 간 회담 제의에는 묵묵부답이면서 남측 민간과 기업을 통해 대화공세를 퍼붓는 북한, ‘통일부 장관 존재감 없다’며 씹어대는 언론, 굵직굵직한 흐름마다 남북관계 주무부처인 통일부의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대통령과 청와대, 그 답답한 마음이 짜증스러운 발언으로 이어진 걸까?

민주당 김성곤 의원은 “통일부 장관이 북에 설령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속내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 끝까지 참고 북을 대화로 이끌어내어 남북화해와 민족통일로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통일부 장관의 임무다”라며 “북한을 단번에 ‘악(惡)’으로 규정해 놓았으니 과연 앞으로 남북 대화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언젠가는 북과 마주앉아야 할 대화 파트너인 통일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거친 표현을 써가며 북을 비난할 때까지 주위에선 뭘 한 것일까.

그런데 사실 ‘핫바지’보다 중요한 것은 류 장관의 발언 내용이다. 갈수록 강경해지는 개성공단 관련 발언을 보며 금강산관광 중단 사태의 악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정부는 북측이 민간이나 기업을 통해 대화공세를 펼치자 ‘남남갈등 조장’을 위한 것이라며 지속적으로 당국 간 회담에 나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 홍익표 의원의 지적처럼 당국 간 회담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마치 대화의 새로운 전제조건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합의한 내용은 당국 간 합의가 아니라고 일축하며 ‘당국 간 회담’만 고집하던 지난 정부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류 장관은 북측이 하자는 대로 개성공단 기업인과 관리위 관계자가 올라가 개성공단이 재가동된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며, 이는 북한이 군통신선을 차단한 3월 27일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그동안 벌어진 일이 다 사라지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북측에 재발방지 확약을 받아내지 않는 이상 개성공단의 단순 정상화는 무의미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말에 말이 더해지고 행동에 행동이 더해지면 갈수록 돌이키기 어려워진다. 뒤늦게 ‘이 길이 잘못된 길이구나’ 깨달아도 이미 말과 행동이 더해져 만들어진 경로를 따라 가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런 맥락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철학으로 시작됐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점점 원래의 길을 벗어나 갓길로 깊숙이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 길이 애초에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새누리당 길정우 의원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이후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남북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단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길을 걸어갈 강단이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였다.

요즘 같은 때엔 길정우 의원의 평가를 한 번 믿어보고 싶어진다. 지금이라도 박근혜 정부가 자신의 대표 브랜드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바른 길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