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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하늘에서 서울을 본다- 한・중남미 교역의 가교자, 이선원 그는 누구인가 -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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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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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중인 이선원 우루과이 '인솔원(DRAGOR S.A.) 대표
지난 9월,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2013 한인차세대대회’ 참가자한 차세대리더의 간단한 약력과 명단을 받았다. 정부의 한인차세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고, 한인사회를 이끌어 갈 그룹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시점이어서 차세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한인사회를 이끌어 왔던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인터뷰의 변화를 절감하던 차에 서울 모 대학의 교수로부터 중남미지역 차세대리더에 대한 관심을 요구받은 터였다.

차세대대회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재단에서 건네받은 명단에 나와 있는 우루과이에서 인솔원(DRAGOR S.A.) 회사를 운영하며, 한・중남미협회 협력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선원(45)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대회행사가 끝났음에도 이곳저곳 전시장을 쫒아 다니고 바이어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던 그와의 약속은 몇 번의 조율을 거쳐 날짜를 잡았다.

이 대표와의 인터뷰 당일, 오전에 잡은 약속은 몇 번의 연기를 거쳐 오후 늦은 시간까지 미뤄졌다. 퇴근직전 그에게서 사무실 근처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붙잡는 바이어들을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가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인터뷰는 술잔을 부딪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딱딱한 인터뷰대신 그와의 약속 없이 이뤄진 저녁시간은 짧은 시간에 유대감을 확인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미지의 세계로의 진출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난 그에게 다짜고짜 왜 머나먼 우루과이까지 가게 됐는지 물었다. 그곳에서 자란 한인 2세도 아니고 70년대 농업이민을 떠난 1세들과는 달리 젊은 세대라 할 수 있는 40대의 나이에 우루과이의 교포가 된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좀 강하게 했었습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 보니 한국에서는 노동운동 쪽 활동을 하거나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 꿈과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이 대표가 남미에 진출한 이유는 좀 남다르다. 지방대출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취직에 대한 보장도 불투명했고, 사업적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 선배 두 명과 같이 다른 나라로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사업하기에는 사회적 조건이 맞지 않았던 한국보다는 오히려 외국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곧바로 여러 지역을 조사해 보니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남미로 좁혀졌다.

“동남아지역은 자본금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았고, 아프리카는 정보가 부족하고 정치적 불안이 심해 남미가 상대적으로 진출하기 쉬워보였습니다. 또 아르헨티나에 선배의 친구가 살고 있는 것도 남미 진출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1996년, 이 대표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 쓰고 선배 두 명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 그의 수중에는 왕복 항공티켓과 어머님이 마련해 준 300달러가 전부였다.
이 대표는 이민을 가기 전 6개월간 아르헨티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두려움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선택한 길이니 가보자’는 오기로 미지의 세계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가 도착한 아르헨티나에는 이미 한인1세대들이 터를 잡고 있었고, 대부분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자본이 없는 그들로서는 도소매업이 주류를 이루던 한인의류업계로의 진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대표는 직접도소매업을 하기보다는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의류에 필요한 원단 수입 중개업이었다.

곧바로 선배들과 수소문한 끝에 대구에 있는 한 원단업체를 찾아내 사업에 착수했다. 원단업체와 수입업체를 연결해 커미션을 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시킨 것이다.

“첫 원단 수입물량이 12만m이었는데 불량품을 제외한 10만m를 다 팔았습니다. 신이 난 우리는 두 번째 물량 수입을 추진했는데 그게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1997년 9월, 한국의 IMF 구제금융 직전 한국회사로부터 두 번째 원단 컨테이너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끝내 물건은 도착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원단을 가장 많이 납품받은 한인도매가게는 외상값을 치르지 않고 도주를 해버렸다. 돈도 원단도 받지 못해 결국 회사는 1년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 대표에게는 이것이 이민 간 후 당한 첫 번째 시련이었다.

이 대표는 동업한 선배 두 명과 상의해 각자 흩어져 일을 한 후 자금을 모아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성공하지 못하고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며 각자 다른 일을 도모하다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는데, 한명은 봉제공장, 다른 한명은 친척 옷가게에 취직을 했고 저는 한인신문사에 취직해 2년 정도 일을 했습니다. 2년간 서로 버틴 셈이죠.”

   
 ▲ 이선원 대표(오른쪽 맨끝)와 우루과이 한인 직원들.
이 대표는 선배들과 함께 틈틈이 아르헨티나 시장을 파악해 나갔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통신기반이 취약했고, 인터넷 기반이 조성되지 않아 향후 시장가능성이 커 보였다. 3명이 2년간 모은 자금은 1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통신사업은 자본이 많이 투자되는 사업이라 그 정도의 자금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인터넷사업을 준비하던 한인 한분을 만나서 의기투합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년 넘게 준비한 사업은 뜻하지 않게 시련에 봉착했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으로 아르헨티나 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그들이 준비했던 사업이 물거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대표는 결국 선배들과 또 한 번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사업 실패 후 선배 두 명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이 대표만 낯선 땅에 홀로 남았다.

“전 도저히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패배자의 모습으로 귀국하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어요. 또 당시 사귀던 여자도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각오로 주저앉기로 한 것이죠.”

새 터전을 찾아 우루과이로

아르헨티나에서의 사업 실패 후 이 대표는 신개념의 작은 빨래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됐으나 아르헨티나의 정치 불안과 예측할 수 없는 경제 환경 등으로 또다시 시련을 맛보아야 했다. 당시 달러와의 페그제(고정환율제)를 실시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정부의 갑작스런 화폐개혁으로 일대일이던 페소(Peso)화의 가치는 3배로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빨래방 가게 세를 달러로 받던 주인이 하루아침에 3배나 되는 페소를 요구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보증금 2만 달러를 하루아침에 날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했던가. 3번의 사업실패는 오히려 이 대표를 단련하는 도구가 됐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이 대표에게 과거 신문기자로 활동할 때 알고 지냈던 한인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루과이에 위치한 수산회사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한인회장이 추천한 수산회사에 입사한 이 대표는 달러로 받은 급여를 아르헨티나에서 3배나 되는 페소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우루과이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대표는 이후 7~8개월간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주말부부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서울과 대구간 거리에 있는 직장이었지만 출퇴근은 녹록치 않았다. 고민 끝에 이 대표는 2001년 아르헨티나보다 안정된 우루과이에 가족들을 데리고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우루과이에 있는 수산회사에 3년 정도 다녔는데, 예기치 않게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3년 만에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 경력으로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MONTEVIDEO)항에 입항하는 원양어선을 관리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어요. 우루과이에서의 사업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을 갖추게 됐던 것이지요.”

당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은 자유무역항으로 포클랜드 근해, 남빙양 등 주요 어장에 출어하는 한국의 원양 어선의 중간 보급지로 조업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거나 어선수리, 어획물 하역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한국 원양어선 회사의 우루과이 법인 관리소장을 맡았다. 이 일은 이 대표가 시장조사 및 코트라(KOTRA)와의 연계사업, 기업 간 거래에 있어 관련정보를 제공하는 일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업무를 통해 알게 된 우루과이 항만청 관련인사들과의 만남, 그리고 코트라 우루과이 무역관을 통한 한국관련 정보제공 등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는 일이자 교포로서의 보람을 느끼는 일이 되었다.

   
 ▲ 우루과이 한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코트라 우루과이 무역관장의 배려로 그의 아내는 정식직원이 되었고, 우루과이에 정착한 그는 2003년부터 시작해 2009년 독립할 때까지 투 잡(two job)을 해가며 코트라 관련 무역중개 업무를 익혀나갔다. 우루과이를 포함한 중남미지역의 시장조사와 마케팅, 시장개척 그리고 무역에 이르기까지 그의 업무는 이제 모국 한국과의 교역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된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루과이는 한국에서 제일 먼 나라입니다. 먼 나라까지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정상적인 교역이 이뤄지도록 중개역할을 하는 것은 돈 버는 것을 떠나 큰 보람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소규모의 한국기업의 제품이라도 수출되는 일을 성사시켰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 일을 후회 없는 평생 직업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에게 또 하나의 보람은 남미의 정보를 모르고 무턱대고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는 한국기업들의 길잡이가 되는 일이다.

“한국 중소기업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수출대상 업체를 찾곤 하는데, 그럴듯한 홈페이지에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연결된 계약 건들은 사기를 당하거나 계약과 다른 거래로 피해를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 번은 한국 대기업에 곡물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체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우루과이 업체를 통해 대두 6만 톤(약 500억 원)을 수입하려 했다가 사기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계약직전 그 업체에 대한 조사 의뢰를 받고 확인한 결과 유령업체로 드러났다. 한국 업체는 우루과이 은행과의 신용장 개설(L/C)만을 믿고 계약을 밀어 붙이려 했다가 큰 낭패를 볼 뻔 했던 것이다.

이 대표는 철저한 거래업체에 대한 조사와 정보제공 등으로 한국과 우루과이에서 신뢰를 얻었다. 그는 업체 간 계약 성사뿐만 아니라 계약된 규격제품의 납품과 거래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만큼 꼼꼼히 챙겨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이 대표는 2007년 코트라 우루과이 무역관이 폐쇄됨에 따라 이젠 독자적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과 경험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인회관, 한인 정체성의 산실이자 홍보마당

현재 우루과이에는 약 200여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 대표가 한인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루과이에 도착한 2001년부터다. 단체나 조직 운영 경험이 있는 젊은 층을 필요로 한 한인회의 요청도 한 몫을 했다. 2009년부터는 우루과이한인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더불어 2009년부터는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에 가입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대표는 한인회활동 중 보람된 일로는 우루과이한인회관 건립을 꼽는다. 2011년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10만 달러를 지원받고, 자체모금액 10만 달러를 합쳐 약 115㎡(35평)되는 아파트를 매입해 한인회관으로 개조했다. 이곳에는 한글학교와 도서관을 비롯해 각종 문화 활동과 K-POP관련 활동들이 펼쳐진다. 아파트다보니 활동성 있는 프로그램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실시한다. 주말과 일요일은 떠들어도 주민들이 서로 용인하는 분위기여서 아직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다만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에는 회관이 비좁아 불편함 점이 있다. K-POP관련 행사를 할 때는 지원자가 100여명이 몰려 인원을 제한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우루과이한인회도 상주해 교민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벌써 비좁은 한인회관을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겨 한국문화를 더 널리 알리는 것이 한인회의 향후 목표가 되었다.

이 대표는 한인회관련 재외동포재단의 역할과 한인회 위상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교민을 공동체로 묶는 것이 한인회라면, 전 세계 한인회를 한 공동체로 묶는 것은 재외동포재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단체 회원들이 빈부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회원자격을 가지는 것처럼, 재단도 크고 작은 한인회를 따지지 말고 차별 없이 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야 한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지 않겠습니까? 각자의 공동체화 작업은 계속해야겠지만, 무슨 특별회원규정처럼 큰 단체위주의 행사가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대표는 교민수가 많은 지역 한인회의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단체들도 차별 없이 대우 받을 수 있는 형평성 있는 태도를 견지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작은 지역한인회라도 소외감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한인차세대대회는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자리로 변화해야

   
 ▲ 이선원 대표가 2013년 10월 5일, 세계한인차세대들과 함께 총리 공관을 방문해 정홍원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만25세에서 만45세까지 참여하고 있는 한인차세대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위상이 강화되고 있다. 정부의 관심도 크겠지만 그만큼 차세대의 역할과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세대한인들의 선정과 프로그램 운영에는 개선해야 될 점도 많다. 이 대표는 내년부터 참가자격제한에 걸리기 때문에 재우루과이 대사의 추천으로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20대 한인청년들에게 보고 느낀 것을 전해달라는 취지였다. 그에게 한인차세대대회 참가 소감을 들어봤다.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4세를 만났는데, 본인은 민족정체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할머니 권유로 참가해 시큰둥해하다 대회에 와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한국어도 배울 것이고 한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느낀다고 하더군요. 이런 점이 차세대를 모을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여러 지역에서 모이다보니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참가한 차세대들에게 한국어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표는 20~40대 나이는 꿈과 비전을 가진 연령이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위주의 선발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생의 성공을 단언하기에는 아직 젊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땅히 차세대대회라면, ‘대한민국이 밀어줄 테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한 번 꿈과 비전을 펼쳐보라’라는 식의 대회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대표는 옥타(OKTA)의 ‘차세대 무역스쿨’에 한인 젊은 층이 몰리는 이유는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는 마땅한 프로그램이나 대회가 없기 때문에 무역을 위주로 하는 옥타의 그 같은 행사에라도 참여하려고 한다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한인차세대의 꿈과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모임이 현재로서는 옥타의 차세대 무역스쿨이 유일하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한상대회의 ‘영비즈니스 리더’ 모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영비즈니스 리더 모임은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이지 젊은 열정을 불태우며 꿈을 이뤄갈 수 있는 모임으로써의 한계가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 대표에게 끝으로 한국정부의 재외동포 우수인재 영입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다.

   
 ▲ 2013년 10월, 이선원 대표가 전주에서 열린 국제발효식품엑스포에 참가해 우루과이전시관 앞에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한국정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육입니다. 어떻게 자녀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교육시킬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한데 이런 문제를 정부가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한다면 많은 우수인재들이 한국에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대표는 민족정체성 교육을 강조했다. 민족정체성만 심어주면 어떤 프로그램과 모임을 통해서라고 한인차세대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에게는 세 딸이 있다. 교포2세이지만 한국어도 잘하고 한국음식도 잘 먹고 한국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정체성교육을 시킨 덕분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한국정부의 해외동포의 한국어교육을 위해 한글학교지원을 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1~2번 가는 정도이기 때문에 가정에서 수시로 교육시킬 수 있는 교육 자료나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문도 했다.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한국어 교육과 더불어 정체성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표에게는 가슴에 새기고 있는 꿈이 있다. 한인들을 돕는 것을 넘어 한인차세대들의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특히 남미에서 꿈을 키울 수 있는 청년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멘토’들을 조성하고 멘토 들을 만나며 힘들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힐링 호텔’을 만드는 것이 성공후의 그의 모습이다. 또 전 세계 한국인에게 남미의 문화와 모든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사를 만드는 것도 꿈꾸고 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꿈을 품고 남미대륙을 밟을 청년들을 위한 발판마련에 열심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북극성 같은 지표를 향해 꿈 넘어 꿈을 꾸라”는 고도원 씨의 말은 그가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지표이다.

   
 ▲ 우루과이 한인동포들과 함께한 골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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