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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인무역협회 김우재 회장,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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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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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재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
인도네시아 최대 한인 유통기업을 이끄는 ‘무궁화유통’ 김우재 회장. 연 매출 4천만 달러의 탄탄한 중견기업을 일궜을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CEO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많은 성공한 기업가들의 지난 삶의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듯이 김우재 회장의 인생역정 또한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다. 시련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아름다운 노정은 정직과 신뢰로 이룬 금자탑이 그를 웅변하고 있다.
정직과 근면을 기업경영의 모토로 삼아 철저히 원칙을 지켜온 김우재 회장. 얼굴을 에이는 겨울의 찬 공기를 뒤로하고 청계천주변의 한 음식점에서 그의 삶의 열정과 도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새로운 삶의 무대 인도네시아를 향해

홍사(洪史) 김우재(金優載, 71), 그에게 인도네시아는 제2의 고향이다. 불안하지만 완벽한 변화와 삶의 도약을 꿈꾸며 떠났던 미지의 세계였고, 열정을 불태우며 수많은 역경과 죽을 고비를 넘겨 꿈을 이룬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룬 꿈속에 한국문화가 살아 숨 쉬며 무궁화가 꽃피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인도네시아로 떠난 건 1977년(34세)이었다. 농촌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로의 유학을 거쳐 한국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10년의 안정된 직장생활을 보냈다. 그런 그가 동남아시아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제정신이 아니라며 강력히 말렸다고 했다.

“대학 때 낙하산 동아리 활동을 통해 경비행기 활공(滑空)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활공을 하다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세상이 내 발 밑에 있다는 쾌감이 생겼어요. 그 때의 활공체험이 훗날 사회생활을 하는 데 활력과 신념을 불어 넣은 힘이 되었지요.”

그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갔다고 했다. 무모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도전에 응한 것이라고 했다.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무궁화유통 사옥 전경
인도네시아.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태평양 서남쪽 말레이제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화국으로 인구 2억 5천만 명의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다. 13,700여개의 섬과 한반도 15배나 되는 땅을 가진 나라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김우재 회장은 식품유통업을 통해 한국의 식품문화와 전통문화를 전하고 있다. 김 회장은 “물적・인적 교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식품유통 뿐만 아니라 관광, 건설 등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40여 년 가까이 살며 정든 ‘제2의 고향’ 인도네시아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있다.

김 회장이 37년 전 한국에서의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밀림지역인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원목개발사업장에 뛰어든 것은 새로운 포부에 대한 끓어 오르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전망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로의 진출을 마음먹었다면, 망설이지 말고 과감히 몸을 던지라고 하고 싶어요. 그곳은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미지의 세계와 같습니다. 모험 없는 도전은 작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가 버리는 모래성과 같기 때문에, 모험을 즐기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정직함만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 피운 무궁화

김 회장의 인도네시아의 첫 걸음은 험난했다. 산림개발을 통한 성공의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칼리만탄 밀림지역. 뜨거워진 가슴을 식혀낼 것이 없을 정도로 열정과 기백을 가지고 덤벼들었지만 정글생활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중삼중의 보호를 해도 신발 속을 파고드는 거머리와 전갈의 위협, 구렁이와 초록뱀의 위협, 숨바쿵강에 빠져 죽다 살아난 일 등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회장은 무모한 정글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인한 자신감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순간에 신앙에 의지해 기도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원목(산림개발)사업을 하며 새벽 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3년이란 세월을 거쳐 열매가 맺힐 무렵, 인도네시아 정부의 ‘원목가공공장을 갖추지 않은 한 수출할 수 없다’는 시책이 발표돼 수출길이 막혀 빚만 떠안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회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김 회장은 그 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식품을 유통하는 작은 일에 뛰어들었다.

“1981년 한국종합식품이란 상호로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7평 남짓한 작은 상점에서 식품유통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주로 교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 점차 현지사회에도 알려지면서 확장을 해 나갔습니다. 사업이 조금씩 확장되자 일본 식품점 ‘사쿠라’가 등장하더라고요. 조건반사적으로 상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우리 민족의 꽃 ‘무궁화’를 상호로 내세워 당당하게 일본식품점과 맞서 겨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김 회장은 민족 사랑과 조국 사랑의 일념이 명칭을 불러온 셈이 됐다고 했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살면서 ‘무궁화’란 상호를 공공연히 내세운 것은 그의 한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내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품사업을 통해 한국의 상품을 해외에 알리려는 민간외교의 효과도 기대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무궁화유통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4,000여개의 식품유통망을 확보해 연간 4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식품유통업 뿐만 아니라 관광업과 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처음 10명에 지나지 않았던 직원도 3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김 회장에게 이렇듯 사업성공의 비결은 무엇인지 물었다.

“정직, 성실, 봉사 이 세 가지를 사훈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내 생활철학과도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사업 전개할 때는 늘 조국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측면과 현지생활에 적응하며 확실한 경쟁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때론 저돌적인 사업경영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데 힘을 쏟고 있지만,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김 회장은 늘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사회봉사활동

   
▲ 한센인 자녀들에게 물품을 나눠주고 있는 김우재 회장.
자카르타 근교 탕그랑에 위치한 시타날라 한센병원. 이 지역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한센인 전문병원이다. 그 옆에는 마르화티협회라는 이름의 한센인 재활원이 있다. 완치된 환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이곳에 김우재 회장 부부의 손길이 닿아있다. 김 회장 부부가 이곳에 관심들 두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이경재 신부를 만나고 부터다. 1984년부터 인도네시아 한센인들을 돕는 일을 해 온 이경재 신부의 활동에 자극받아 시타날라 한센인 병원과 한세인 재활원에 위문품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센인 병원에서 신부님들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과 한센인 엄마 곁에서 재롱을 떨던 네 살 된 아이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어요. 그 후로 한센인을 돕는 일은 정기적인 일이 되었지요.”

김 회장은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한국 안양에 있는 성나자로마을 한센인 돕기를 위한 자선행사에도 매년 참여하고 있다. 단순히 한센인들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봉사와 나눔을 통해 얻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성직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미래가 불투명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한센인 부모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야겠다는 결심이 한센인 병원과 마르화티 재활원을 찾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며 계면쩍어했다.

김 회장의 봉사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 수술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한 지금까지 50여명에 이른다. 1996년에는 아내(박은주)와 함께 가수 이미자 씨를 인도네시아로 초청해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개최해 7천5백만 루피아를 마련해 전달하기도 했다. 또 무궁화재단을 만들어 ‘무궁화 인도네시아 심장병 어린이 수술 돕기’ 란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오고 있다.

김 회장은 “불우이웃 돕기는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인도네시아에 닥친 홍수 피해자 돕기를 위한 식품과 식수 공급 등 구호식품체제 구축, 화산재해 피해자 돕기, 장학회를 통한 소년 가장 돕기 등 이웃과 함께 하는 크고 작은 사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 김우재 회장이 한인무역협회 임원들과 함께 요양원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주민들과의 신뢰는 단편적인 행위만으로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진정한 마음의 자세를 보일 때 다가옵니다. 그들과 친해지고 가까워지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앞장서 우리를 도와줍니다. 결국 이웃을 위한 나눔과 봉사는 나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김 회장은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따위의 해결방법은 인도네시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외에서의 사업의 성패는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됨을 절실히 느낀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중국인 상점들이다. 평소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주변을 돌보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경제윤리가 미흡해 인도네시아인들이 사회적 불만을 표출할 때 제일 먼저 타깃이 되곤 했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이든 기업이든 현지인과의 소통과 문화를 이해하며 함께 사는 노력이 없을 경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삼 깨닫게 된다.

김 회장에게 인도네시아 유통 분야의 경쟁상대인 중국인과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성공한 비결을 물어봤다.

“난 처음부터 인도네시아에 뼈를 묻을 각오로 진출했어요.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요.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코뿔소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에요.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 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목표가 세워지면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끈질기게 추진하고 끝장을 보고 맙니다.”

이제 무궁화유통은 경쟁상대인 중국계 기업을 상대로 유통망까지 펴나갈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지난 40여년에 가까운 해외생활동안 좌절과 한숨의 시간이 많았어도 체력과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에 전력을 다한 그에게서 배짱(氣)을 허망하게 버리지 않은 생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한민족 경제인 네트워크를 향해

   
▲ 제18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 폐회식에서 김우재 회장이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다.
김우재 회장은 2012년 11월, 지구촌 해외한인 경제네트워크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회장에 취임했다. 모국과의 무역증진과 모국상품의 해외시장 진출, 회원 상호간의 정보교류를 통한 이익증진, 지구촌 해외한인 경제네트워크 결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월드 옥타는 전 세계 67개국 126개 지회를 거느린 국내 최대 규모의 해외한인무역인단체이다.

김 회장은 이 단체의 수장으로서 이미 구축된 회원 상호간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창조경제에 이바지하고 중소기업의 해외진출을 돕는 일과 청년일자리 창출에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올해 월드 옥타의 예산도 전년에 비해 5억 원이나 늘었다. 보통 역량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 증액 배경이 궁금했다.

“KOTRA 오영호 사장이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리고 국회 해외동포무역경제포럼 회원들이 관련의원들을 독려했고, 그동안 각국에서 무역을 통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준 6,500여명의 월드 옥타 회원들에 대한 정부의 신뢰와 국가적 숙원사업이라 할 수 있는 차세대 경제인육성과 일자리 창출 등에 대한 시대적 요청 등 증액에 필요한 좋은 코디네이션(coordination)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올해 예산이 증액된 만큼, 차세대에 대한 의미 있는 방향설정을 해 줄 것이라고 했다. 또 청년들을 해외에 진출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므로 청년들의 글로벌 창업 등을 지원하는데 노력을 경주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그동안 차세대무역스쿨을 통해 배출한 2만여 명의 차세대무역인들을 통해 3만개의 청년 일자리 창출과 해외 한인우량기업 100~200곳에 청년인턴사원을 보내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회원들 기업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 고급인력들이 해외에 나가 기반을 닦아 성공했을 경우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겨자씨를 심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미래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그동안 탄탄히 다져온 월드 옥타의 네트워크를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보고 있다.

   
▲ 청년실업해소 및 창업지원 차원에서 펼친 해외한인기업 인턴사원 국내교육에 참가한 청년들이 수료증을 받아 펼치고 있다.
“개인이 한다면 힘든 일이지만, 우리 같은 경제인 조직이 선도적인 입장에서 추진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월드 옥타의 재정자립을 이룩하는 것은 김 회장에게 또 하나의 과제다. 이를 위해서도 단계별 계획을 세워 추진해 나갈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흠 없는 성공을 위한 발걸음

한국-인도네시아(印尼) 간 정치・경제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모색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 김 회장은 어는 선진국보다 협력이 잘 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교민사회를 통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엄청난 잠재적 시장을 가지고 있는 인도네시아와의 협력은 한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한인무역인들은 경제 한류를 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류가 브랜드로 자리 잡기까지 세계한인경제인들이 수십 년 동안 수출한 한국 상품은 수십만 컨테이너에 이릅니다.”

   
▲ 김우재 회장이 (사)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2013 교포정책 포럼'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김 회장은 한류 붐을 일으킨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김 회장만 해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심에 위치한 ‘수하르토 박물관’에 한복을 제작해 기증했고 한복문화를 인도네시아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 무궁화유통을 통해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진 한국식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밖에 한국의 전통예술과 문화(식품, 태권도 등)를 알리는 ‘한국상품문화전’을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는 현재 5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의 1200여개의 기업이 이 나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선배 세대들이 이뤄놓은 터전위에 한인차세대 육성을 위해 2007년 7월 인도네시아에 ‘차세대무역스쿨’을 열었다. 기성세대들의 경험과 해외 현지에서 얻은 지식을 차세대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열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기성세대들이 낯선 땅에 와서 겪은 역정의 체험과 성공담을 차세대들에게 전수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할 일 많이 남았다.’며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까지 잘 영근 성공의 열매를 딸 수 있기를 희망하는 김 회장에게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돈 번 후 부모에게 효도하고 불우이웃 돕는다고 하는데, 언제 돈을 벌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적으면 적은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씨앗이 내려야 열매를 맺듯이 결실이 맺힐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면 다른 사람의 모델이 되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오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김 회장은 성공이란 누구나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큰 부를 축적했더라도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면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없다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다.

   
▲ 한국-인도네시아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12월 주인도네시아한국대사관에서 국민훈장동백장을 수여받고 김영선 인도네시아 대사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는 아내 박은주 씨)
그동안 꾸준히 해 왔던 사회봉사활동과 노년에 시작한 신앙생활은 그에게 있어 큰 기쁨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동체적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라는 말을 생각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2013년 10월, 자신의 가치 실현의 도구가 됐던 ‘무궁화유통’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 공노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受與)했다. 그의 아내 박은주 씨는 인도네시아 한국부인회 회장 재임시절(1996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바 있다.

김 회장은 아내와의 사이에 1남(종헌) 2여(현미, 현아)를 두었다. 자녀들은 모두 분가했으나 가끔씩 4대가 함께 모여 가족애를 나누기도 한다. 김 회장은 스스로를 가정주의자라고 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문이 닳도록 자신을 위해 헌신해 준 아내의 내조에 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평범함이 비범한 것이라 했던가. 정직과 근면으로 여전한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감사함의 뜻을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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