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신문 /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
 

▲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엊그제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3년의 작업 끝에 나온 작은 결실이다. 20년 이상 글을 쓰고 몇 권의 책을 냈지만, 생각과 느낌을 문자화하는 일은 늘 버겁다. 그런데도 그 괴로움을 자청하는 것은 글쓰기가 지니는 오묘함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글은 단순히 말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의미를 생성한다. 써나가다 보면 미처 이르지 못했던 생각들이 불현듯 나타난다. 내 머리에서 나온 문장들인데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듯하다. 어느 저술가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만 글을 쓴다는데, 무지(無知)의 벽을 돌파해가는 기쁨 때문이리라.

그런데 글쓰기는 앎의 빛을 켜주면서, 모름을 자각하게도 해준다. 분명했던 생각인데, 활자화되는 순간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말로 할 때는 술술 풀렸는데, 글로 옮기면서 미로를 헤매고 곳곳에서 막혀버린다. 단어를 하나씩 배열하다 보면 논리의 정교함이 더욱 요구되고 진위를 정확하게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앎을 의심하면서 반박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 단순한 현상이라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논지의 맥락과 인과관계를 꼼꼼하게 짚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출판사와 함께 책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일종의 수행(修行) 같았다. 편집자는 저자보다 더 책에 애정을 갖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의 집요함으로 글을 살피고 가다듬어 주었다. 대학원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엄격한 문장 수업을 통과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손볼 게 없겠지 하면서 자신있게 넘긴 원고가 빨간 표시로 가득 채워져 되돌아왔다. 오랫동안 글을 썼으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허술하구나 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20세기 일본 영화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떠올렸다. 그는 시나리오 초고를 작성한 다음에 일본의 최고 시나리오 작가 두 명을 초대해 면밀하게 검토했는데 그 방식이 흥미로웠다. 셋이 둘러앉아 각자에게 주어진 원고를 읽으면서 수정을 한 다음 옆으로 넘긴다. 원고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검토한다. 이때 옆사람이 수정한 것을 달리 고칠 수 있음은 물론, 아예 그것을 무효화하면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아도 된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넘긴다. 따라서 수정 사항이 몇 번씩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원고를 한 방향으로 계속 돌리며 다듬어가다 더 이상 손댈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작업은 종료된다. 내로라하는 프로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순수하게 헌신한 것이다.

얄팍한 권위주의나 체면 때문에 업그레이드의 경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냉정한 피드백을 받지 못해 엉성한 정책을 내놓거나 부적절하게 처신해 망신을 당하는 권세가들이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찬사를 마다하고 따끔한 지적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충실한 성과물을 만들어낸다. 일에 최선을 기울이면서도 ‘정말 그럴까?’ ‘이게 전부일까?’라고 끊임없이 되묻고 다른 견해에 귀를 열어두는 태도가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진다. 편집자에게 시시콜콜 지적을 받으면서 그런 상식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글쓰기가 언제나 그러하지만, 이번에도 엄청난 양을 삭제했다. 확실하다고 생각해 쓴 것인데도 편집자는 예리하고 냉혹하게 물음표를 붙였다. 나도 자꾸만 읽다 보니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는 내용이 참으로 많았다. 근거가 분명치 않거나 생뚱맞고 억지스러운 군더더기들이다. 지식을 과시하려다 흐름을 어지럽히는 과오도 수없이 범했다. 글의 맥을 단단하게 붙잡으면서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객관성을 냉철하게 견지하지 않으면 허황된 사유의 거품에 휩싸이고 만다.

SNS 시대에 글쓰기는 무엇인가. ‘좋아요’라는 반응을 독촉하는 자아의 진열이 아니라, 의식과 감성을 서로 향상시키는 집단지성의 즐거운 체험이어야 한다. 독단에 빠지기 쉬운 생각을 점검하고 흐트러지기 일쑤인 마음을 정돈하는 절차탁마의 글쓰기, 그것은 외로운 고행이면서 공동의 놀이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