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코리아 <칼럼> / 최윤주 편집국장 ]

▲ 최윤주 뉴스코리아 편집국장

물질은 썩는다. 자연계의 대부분은 제 생을 다하면 부패하여 자신의 형제를 소멸시킨다. 부패와 소멸의 과정은 새생명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죽으면 썩고, 썩으면 사라지는 자연의 법칙이 없었다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지구라는 제한적인 공간 속에서 수백만 년의 역사를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잊고 있지만, 부패 또한 신의 선물이다.
물질세계에 부패가 있다면 정신세계에는 망각이 있다. 죽을 것 같이 아픈 기억들이 어느 것 하나 잊혀지지 않고 매 순간마다 생생하게 떠오른다면, 이를 감내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세월이 약이다.” 살면서 어른들에게 자주 들어온 말이다. 그리고 살면서, 누군가에게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하다.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특정인에게만 찾아오는 질병이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겪는 일이다. 이 고통을 해결해주는 약이 세월이다. 세월이 해결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월이 잊게 해준다는 뜻이다.
살면서 괴로웠던 일들, 고통스러웠던 일들, 원치 않게 당했던 아픔들, 심지어는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까지도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같이 아프고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 없다. 잊혀진다는 건, 잊었다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찾아오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가끔은 담아두는 기억이 있다. 담아둔다기 보다 절로 담아지는 기억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미약한 힘으로는 차마 망각의 강으로 흘려 보낼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인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들은 망각이라는 이름 뒤편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연히 찾은 빛 바랜 사진 한 장, 예기치 않게 들려온 이름 석 자만으로도, 시간은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 마치 어제 일처럼 과거의 기억을 또렷하게 재생해낸다.

조현미. 그녀의 이름 석자가 세간에 다시 떠오르면서 무방비 상태에 있던 기억의 커튼이 삽시간에 열려 버렸다. 요리사 모자를 쓰고 흰 가운을 걸친 채 양팔을 크게 활짝 펼치며 웃고 있던 사진, 그녀의 가게 앞을 꽃으로 장식하며 눈물을 떨구던 사람들의 표정, 쌀쌀했던 1월의 어느 저녁, 손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노란 풍선을 하늘로 날리며 그녀에게 안녕을 고하던 모습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2003년 1월, 당시 37세였던 조현미 씨는 가정집으로 도넛 배달을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범인은 18세의 흑인남성 앤소니 도일(Anthony Dewayne Doyle). 경찰 조사 결과 그는 금품을 갈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넛배달을 시킨 후 야구방망이로 조 씨의 머리를 수차례 가격해 그녀를 살해했다.
평일 오전, 달라스 북동쪽에 위치한 조용한 도시 랄렛(Rowlett)에서 일어난 참혹한 소식이 주류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달라스 일대는 깊은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앤소니 도일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녀의 이름은 서서히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면 영화감독이 되겠다”던 조현미 씨의 꿈과 삶을 산산조각낸 앤소니 도일이 지난 27일(목)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지 11년하고도 2개월만의 일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리와 가슴을 찢던 충격과 슬픔은 서서히 잊혀져 가기 마련이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아픔 앞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과거가 되어있다.
그러나 한인 사회 전체가 함께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던 11년 전의 기억은, 범인의 사형 소식과 함께 눈물이 되어 되살아났다.
사형수의 죽음을 접하는 한 켠으로 씁쓸함이 밀려드는 건 시간의 흐름만큼 분노와 슬픔이 무뎌졌기 때문일런지 모른다. 망각과 기억의 오묘한 접점 위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망각할 수 있기에 아프지 않고, 기억할 수 있기에 행복한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