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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해산물 대박 캐는 박희철 회장,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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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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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철 ‘HNI 인터내셔널 inc’ 회장
“최고의 천연산 장어를 받기 위해 물류창고에 줄을 선 업자들을 보면 보람이 느껴집니다. 까다로운 통관절차와 수십 가지의 검사를 통해 통관이 이뤄지면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듯해서 마음이 뿌듯해지지요.”

생물장어를 머나먼 북아프리카에서 공수해 국내에 유통시키고 있는 박희철(59) ‘HNI 인터내셔널 inc’ 회장(현, 미국동북부한인회연합회 수석 부회장)의 말이다. 살고 있는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가서 해산물을 국내로 유통시키는 그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10월 광주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에서 만난 이계훈 미동북부한인회연합회 회장이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사무실을 찾아왔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지역 한인회연합회 회장으로서 무엇인가 일감을 찾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그의 열정에 끌려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자신 대신 미동북부한인회연합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후배 한 분을 내세우고 싶다며 극구 사양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3월 중순 사무실을 찾은 박희철 회장을 만났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도시의 떼 묻지 않은 순박함이 묻어났다. 열정과 순박함 속에 이어지는 그의 이런저런 이야기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됐다. 결국 다른 약속으로 인해 그와의 인터뷰는 다음날에야 끝이 났다.

청년시절의 도미(渡美) 그리고 정착

충청남도 금산이 고향이라는 박희철 회장은 1982년 도미(渡美)했다. 군 제대 후 2~3년간 소일을 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매형의 초청으로 이민을 떠났다. 70년대 초 한국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던 매형이 누나를 만나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 가족들을 초청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미국 이민은 쉽지 않았어요. 미국으로 떠난다 하니까 친구들이 연일 송별식을 해 주더라고요. 공항에서는 헤어지기 싫어 울고불고 야단이 났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신효범 전 워싱턴 주 상원의원(오른쪽)과 함께. 
미국 버지니아에 정착한 박 회장은 곧바로 맨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으니 몸으로 때우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처음 접한 일은 건축 관련 일용직이었다. 그중에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물 외장 일을 1년간 하다 인테리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말은 안 통해도 눈치껏 살펴서 내가 알아서 일을 처리하니 금방 사장의 눈에 띄어 날 헬퍼(helper)로 삼고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키더군요. 1년 만에 관련 기술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박 회장은 그 후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회사를 차린 사장에게 픽업되어 주당 400달러에서 주당 1200달러를 받는 전문가 대접을 받았다. 단순 기술자에서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버지니아 지역 내 인테리어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고 한다. 경력을 쌓은 그는 그 후 100~200채 주택단지를 형성하고 지역의 인테리어를 도맡아 하는 사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거느리는 직원도 70명가량이나 되었으니 젊은 날에 어엿한 사장이 된 것이다. 도미 후 불과 몇 년 만에 오피스 빌딩도 사고 40만 달러나 되는 집도 사게 되었으니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사업은 모국 부동산에 손을 대면서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90년대 중반 경기도 일산지역 땅을 사 골프에 손을 댔다가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경험 없이 무작정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다시 인테리어 사업에 전념해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경기가 바닥나기 시작하자 박 회장은 또 다른 모험의 길로 들어섰다. 골프가 수준급인 박 회장은 한국에 들어와 골프관련 비즈니스 사업을 펼치다 또 다시 시련을 맛보아야 했다.

“한창 한국에 골프 붐이 일던 때라서 골프연습장에 나가 골프를 가르치는 일도 했어요. 당시 잘 가르치는 강사로 소문나 아주머니들에게 인기가 좋았죠. 골프를 가르치다보니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골프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PGA진출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따기도 했지만 골프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덩치 큰 외국인들과의 시합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2~3년간의 골프강사 생활도 적성에 맞지 않은 것 같아 접었다고 한다.

장어사업과의 인연

   
 ▲ 튀니지 장어 사업파트너 그리고 여직원과 함께 한 레스토랑에서 기념촬영.
2003년 건축경기가 다시 살아나자 박 회장은 옛 노하우를 살려 미국 건축업자들과 계약을 하고 인테리어 사업에 다시 뛰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한동안 호경기로 꽤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서브프라임모기지)로 불경기의 직격탄을 맞아야 했다. 회사 규모를 십분의 일 수준으로 줄이는 등 감축경영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회사 규모를 줄이고 나니 수익이나 규모가 성에차지 않아 다른 일을 찾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보스턴한인회장 후배로부터 장어사업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나와 장어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죠”

건축 관련업, 부동산업, 골프관련사업 등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던 박 회장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 사업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도 쉽지 만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동안의 어렵고 힘든 상황이나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 잘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가 지나온 삶의 이야기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 모나코 유적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박희철 회장.
박 회장은 지인의 소개로 만난 사람과 장어사업을 위한 파트너가 되었다. 한국에 있는 장어양식장운영을 지원해주고 투자를 했으나 2년 동안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양식장도 남의 이름으로 돼 있었고, 수협에서 대출한 20억도 갚지 않은데다, 박 회장 명의로 창녕군청에서 자금지원을 받으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고국에 있는 동포를 너무 안이하게 믿고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박 회장은 그 일을 사업의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번 실패가 두 번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노하우를 터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로 박 회장은 그 동업자와의 관계를 끊고 거래업체가 있던 아프리카까지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장어사업에 뛰어들었다. 기존 동업자가 현지 주민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급여와 빌린 돈 등을 갚아주었다. 그들이 지금은 박 회장의 튼튼한 현지 직원들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저는 기존에 일하는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습니다. 늘 가족같이 대해주곤 하죠. 이전 동업자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을 지금은 다 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박 회장의 맨 파워는 회사운영의 원동력이다. 일보다도 인간관계가 사업의 우선순위임을 터득한 것이다.

지중해 해산물의 길을 뚫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있는 튀니지는 박 회장의 사업전초기지이다. 주변 알제리와 모르코까지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다. 지중해 쪽 장어를 한국에 대규모로 유통시키는 사람은 박 회장이 유일하다. 향후 장어뿐 아니라 여타 해산물까지 거래품목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한다. 박 회장의 지중해 연안 튀니지산 장어에 대한 자랑은 듣는 이로 하여금 군침이 돌게 만든다. 자연산 민물장어로 맛뿐만 아니라 가격, 위생까지 최고를 자신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자연산 민물장어를 구하기 힘들뿐더러 양식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 선적대기 중인 장어 박스들. 
박 회장이 취급하는 지중해산 장어는 동남아지역에서 수입되는 대부분의 장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과 품질이 우수하다. 국내에서 최고의 품질로 취급받고 있어 통관하는 날은 업자들이 줄지어 서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해맑은 미소와 가식 없는 웃음은 박 회장에게 친근감을 더해준다. 그러나 해당사업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진지함은 사뭇 다르다. 현재 박 회장이 들여오고 있는 자연산 민물장어는 일주일에 5톤 정도이다. 조만간 여타지역을 포함해 일주일에 20톤 정도를 소화할 예정이다. 박 회장은 향후 장어 치어를 국내에 대량으로 공급해 비싸게 판매되고 있는 장어가격을 낮춰 많은 국민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장어 등 해산물 사업은 매력적인 사업입니다. 초창기 2~3년간은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습니다. 중간상인들의 농간이 많아 장어가격이 비싸진 이유도 있는데, 앞으로는 인터넷 주문을 통해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박 회장은 회교도 지역인 튀니지 등에서 사업하는 데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했다.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기 때문에 늘 신변보호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어디를 가도 늘 현지인과 동행하고 있다. 먹을 것도 입맛에 닿지 않아 공항면세점에서 김치와 컵라면, 고추장 등을 사가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박 회장은 “먹을 것이 없어 장어만 구워 먹다보니 시커멓던 얼굴이 어느새 뽀얗게 되고 피부도 좋아질뿐더러 체력이 좋아져 헉헉거리던 계단도 뛰어 다닐 정도가 되었다.”며 장어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박 회장은 장어 외에도 대표적인 보양식품인 해삼과 전복, 새우 등의 해산물 유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내에 가공공장을 차리는 것도 준비 중이다. 한국산 해산물을 중국 등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포함해 다각도의 계획을 잡고 있다. 그의 사업의 꿈이 영그는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한인회활동과 한국(한글)학교

   
▲ 박희철 회장 가족들
박 회장은 도미 후 미국에서 부인(미자 박, 한국명 장미자)과 결혼해 성룡(33), 은하(31), 제니(12), 제인(10) 4자녀를 두었다. 늦둥이로 낳은 셋째와 막내는 박 회장에게 둘도 없는 피로회복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자녀들이 보내오는 문자와 동영상을 보다보면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다 풀린다고 말한다. 사업 때문에 가족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어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늘 사무쳐 있다. 가족들로 인해 받는 힘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박 회장은 요즘 누구보다도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도미 후 버지니아에서 살다가 18년 전부터 미북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델라웨어(delaware) 주에 살고 있다. 그가 한인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부터이다. 델라웨어한인회에서 3명의 한인회장이 바뀌는 동안 봉사활동과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2007년 델라웨어 한인회장에 당선돼 2년간 활동하다 연임하여 2011년까지 2년 6개월을 더 활동했다.

박 회장은 한인회활동을 통해 한국어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녀세대와 부모세대간의 소통,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는 한국어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부모와 자녀가 같은 한국어로 소통할 때 오는 정서적 유대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1세대부모와 2세 자녀들에게는 떠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말했다.

“미국역사상 최악, 최대의 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벌인 버지니아 공대생 조승희도 부모와의 대화할 시간이 없이 방치 속에 자라났다고 합니다. 부모는 한국어, 자녀는 영어를 쓰다 보니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한글교육은 우리 교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죠. 따라서 저는 한국정부의 교민정책은 첫째도 한글교육, 둘째도 한글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 '제41회 상공의 날' 재일상공인 참가자 만찬회에 참석한 미동북부한인회 연합회 이계훈 회장과 박희철 수석부회장.
박 회장이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동북부한인회연합회는 한국학교(한글학교) 지원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내중소기업들의 미국진출 시 도울 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기에, 도움의 대가로 한국(한글)학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 기업들과 상부상조하는 차원의 일을 추진하고 있으나 중소기업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고 한다. 중소기업들이 이벤트나 행사 등에는 지원하면서 정작 중요한 한국학교에 대한 지원은 선뜻 나서지 않는다고 했다. 박 회장은 정부의 한글학교지원 부분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나 외진 곳에 있는 정작 지원이 꼭 필요한 한글학교에 는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 실체가 없는 한글학교나 재정이 넉넉한 단체・교회가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예산을 지원하는 문제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박 회장은 델라웨어한인회장으로 일하면서 한글학교 지원을 위한 음악회, 골프대회, 연말파티 등을 통해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임기 전 한인회관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불경기가 닥쳐 계획을 접해야 했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한인회재정이 열악하니 각종 경조사비와 경비를 사비로 충당해야 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업들이 본궤도에 오르면, 한글학교 지원에 적극 나설 생각입니다. 기업하는 교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한인회장대회 때 겨우 발언권을 얻어 당시 국회 외통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원웅 의원에게 한글학교 지원을 요청하는 질의를 한 적도 있는데, 그런 염원들이 쌓여 지금은 조금이나마 지원액이 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박 회장은 한글학교 지원에 대한 정부의 방침이 꼭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동북부한인회연합회에서의 활동

박 회장은 미동북부한인회연합회 창립멤버로 참여해 지금은 수석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로 설립 7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연합회는 올해 포럼을 계획하고 있다. ‘생색만 내는 연합회가 아니라 실질적인 활동을 통해 교포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돼야한다’는 방침은 이계훈 연합회 회장의 역점사업이기도 하다.

   
 ▲ 한인회 관계자들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 봉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회는 지역 동포들의 한국에 있는 병원이용의 편의를 위해 중앙대병원과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또 기금마련을 위해 지역 내 기업들의 연감제작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그밖에 교포들의 모국에서의 장례관계, 교포2세와 모국 청년들과의 결혼에 필요한 컨설팅 등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미국의 한국전쟁참전용사들을 위한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전쟁미군참전용사들을 보면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돌아가신 분도 계신데, 그 자녀들이 사진과 기념품을 가지고 와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너무 좋아합니다. 이분들의 자녀를 위한 장학금, 한국방문 프로그램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나설 일인데 안 되니 우리 연합회라도 해야겠지요.”

박 회장은 동포들의 병역문제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홍준표 법’으로 명명되는 개정된 국적법으로 인해 애꿎은 동포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원정출산을 일삼는 본국동포의 병폐를 막기 위해 제정된 국적법(홍준표 법)이 선천적 복수국적자인 재미동포 2세들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호적에도 없는 교포2세들이 본인과 상관없이 선천적 복수국적자가 되어 병역의무를 져야하고, 유학과 취업 제한 등의 불이익을 받고 있는데 이런 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며 국적법 개정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박 회장에게 32년 동안 미국시민권을 갖지 않고 생활하고 있다.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도 영주권을 고집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이 들면 꼭 한국에 나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민권 딸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나로 하여금 영주권만 가진 채 살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사업과 한인회연계활동은 교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모국에 대한 애정표현이다. 더구나 모국과의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상생을 펼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직과 성실한 자세로 펼치는 박희철 회장의 사업이 남달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실함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말처럼, 그의 열정과 성실함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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