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호/자유기고가

녹색 치마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살짝살짝 비치는 하얀 버선발, 분홍 저고리 부드러운 곡선 끝에서 하늘거리는 희고 고운 손. 사뿐사뿐 앞으로 다가오다 짐짓 뒤돌아 엎드리고 다시 일어서며 쥘부채를 활짝 펴고 빙그르르 도는 춤사위. 태평소 소리가 종달새처럼 높이 날고 거문고와 가야금, 아쟁, 해금, 장구가 둥두당당 어우러진다. 한국의 자태, 한국의 소리에 넋을 잃고 혼을 빼앗겼다. 이곳이 과연 미국인가 한국인가.

서양음악과 대중가요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줄 알았던 우리 국악이 힘차게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것도 미국땅에서 말이다. 지난 7월 12일 뉴저지 포트리고등학교에서 열린 제14회 세계 국악경연대회에는 130여 명이 참가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였다. 뉴욕과 뉴저지는 물론 커네티컷, 버지니아, 멀리 로스앤젤레스에서까지도 동참했다.

그동안 미국의 여러 대학에 한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국악 동아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국악과는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이민 2세 초.중.고 학생들까지 이렇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배우고 익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예쁜 한복을 차려 입고 고사리 같은 손에 부채를 들고 부채춤을 추는 초등학생 팀, 신나게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중등부 학생들, 판소리 한마당을 거방지게 부르는 여대생…. 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가.

이혜경의 거문고 산조로 시작된 2부 공연은 한국과 미국의 명인.명창들이 출연하여 진도북춤, 가야금 병창 사랑가, 살풀이춤, 신화선무, 민요합주, 교방춤, 사물놀이 등 다양한 공연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출연자로 나온 박수관씨가 '쾌지나칭칭나네'를 부르자 객석에 앉아있던 관람객들도 흥에 겨운지 저마다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관객과 출연진 등이 함께 어우러져 벌인 즉석 춤판에는 윤여태 저지시티 시의원과 버겐카운티장 보좌관인 에스더 정 여사도 보였다. 정 여사는 이번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가야금 병창으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회를 준비하고 성황리에 행사를 마친 미주한국국악진흥회 주옥근 회장님과 한국국악협회 미동부지부 음갑선 회장님, 그리고 여러 관계자 분들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학교 강당을 가득 메운 관람객 중에 미국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현지인들에 대한 홍보활동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칫 잊혀지기 쉬운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는 한국과 해외에 사는 한인이 따로 일 수 없다. 오히려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해외 한인들이야말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재발견하고 이를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한류의 물결에 '코리안 클래식' 국악이 더해진다면 그 흐름의 깊이와 폭은 더욱 깊고 넓어질 것이다. 세계국악경연대회가 우리만의 잔치가 아닌 세계인의 행사로 더욱더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